Thinking Monday

<천개의 고원> 읽기 시즌2ㅡ1강(09.23)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9-30 01:33
조회
220
지난 시즌 강의 중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 중 하나는 ‘지층’이었습니다. 들뢰즈-가타리의 개념들이 대개 그렇듯, 지층 또한 ‘이게 철학 개념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개념인데요. ‘지층’은 우리가 벙벙하게 ‘현실’이나 ‘사회’라고 말하곤 하는 어떤 것, 즉 우리를 구속하는 동시에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조건을 가리키는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입니다. 물론 들뢰즈와 가타리가, 우리가 막연하게 ‘현실이 어떻다’라고 할 때의 그 무엇을 똑같이 지시하기 위해서 지층이라는 개념을 쓴 것은 아닙니다. 모든 철학자들이 그렇겠지만 특히 들뢰즈-가타리가 개념을 만드는 것은 그 개념만이 이끌어낼 수 있는 어떤 효과 때문일 것입니다.
‘지층’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이들은 우선 지질학적 지층의 형성과 유기체의 형성, 의미의 형성을 모두 ‘지층화’라는 하나의 과정 속에서 보고자 합니다. 채운샘은 이를 ‘자연주의적 사고’라고 말씀하셨죠. 이들은 인간 사회에만 적용되는 설명, 자연과 문화 사이에 어떤 절대적인 단절을 수립하는 설명을 거부하기 위해 구조나 문화 사회 등등의 말 대신에 ‘지층’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지질학적 지층, 유기체적 지층, 의미의 지층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구가 운동하는 방식, 지구가 흘러가는 질료들을 붙들어서 특정한 방식으로 형식화를 하는 방식이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고 보았습니다(‘도덕의 지질학’이라는 세 번째 고원의 제목에도 이런 관점이 잘 나타나 있죠).

인간중심주의적 사고 외에, 지층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냄으로써 들뢰즈-가타리가 싸우고자 하는 또 다른 적은 구조주의적인 관점입니다. 구조주의자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조건을 ‘구조’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들은 ‘주체’에서 시작하는 사고를 배격하면서 어떻게 전체 구조 속에서 개별자들이 만들어지는지를 질문했죠. 들뢰즈-가타리가 이러한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문제 삼은 것은, 이러한 관점을 통해서는 어떻게 개별적인 것들의 움직임 자체가 전체로서의 구조를 움직이는지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구조주의는 개별적인 것들이 관계들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관계적인 사유’를 전개했으나 구조라는 전체에 갇혀버렸다는 것. 들뢰즈-가타리는 불변하는 구조를 포착해내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신에 이들은 ‘어떻게 지층에 붙들린 채로 살아가지 않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 속에서 지층에 대한 탐사를 감행합니다. ‘구조’라는 정태적 개념을 거부하며 들뢰즈-가타리가 만들어낸 ‘지층’은, 지층화되는 것과 지층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을 동시적으로 사유하기 위한 개념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인간을 구속하는,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차원이 있습니다. 유기체적 차원과 의미생성과 해석의 차원, 주체화의 차원이 그것입니다. 우선 우리의 몸은 그 자체로 지층화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병, 성, 늙음/젊음, 교육학적 권력 등등이 우리의 몸에 작용하죠. 우리 몸의 리듬을 스스로 만들어내려는 고민이 결여되어 있을 때 우리는 견고하게 지층화된 신체성에 갇히게 되고, 그럴수록 우리의 삶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도하는 힘들에 대해 어떠한 질문도 제기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지난 시즌에 살펴보았던 ‘기관 없는 신체’라는 개념에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유기체라는 지층으로부터 빠져나가서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신체성을 구성할 수는 없는가?’ 지난 시즌에 확인한 것처럼, 이러한 들뢰즈-가타리의 문제의식 속에서 볼 때, 예를 들어 도가의 방중술은 막연히 신비주의적인 양생의 실천이 아니라 ‘지층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테크닉의 발명’이라는 매우 정치적인 뉘앙스를 갖게 됩니다.

이번에 살펴 본 것은 ‘의미생성과 해석’의 차원입니다. ‘언어’ 또한 들뢰즈-가타리의 시선에서는 일종의 지층입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통과하게 되는 모든 공간들은 우리의 신체에 작동함과 동시에 언어들을 통해 우리의 정신을 형성합니다. 병원에서, 학교에서, 법원에서, 우리는 독특한 언어적 질서에 노출되고 그러한 질서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특정하게 형성하게 됩니다. 어떤 무의미하고 비정치적인 언표를 발화할 때에도 우리는 ‘문법’이라는 규칙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떤 이를 ‘장애인’이라고 명명함으로써 ‘장애/비장애’의 경계를 만들고 또 그를 ‘장애인’으로 출현시킵니다.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나 대상을 지시하는 투명한 매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언어가 관계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이 작동하는 배치”(채운샘 강의한 1쪽)라는 것. 따라서 ‘의미생성과 해석’은 지층화 작용 속에 있으며, 우리의 모든 발화행위는 지층과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 이것이 ‘모든 언어는 명령어다’, 라는 (지난 시즌에 살펴보았던) 들뢰즈-가타리의 말에 나타나 있는 그들의 문제의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문제는 언어로부터 어떤 정태적인 ‘구조’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구조주의자들은 어떤 목적이나 방향, 특정한 의미도 갖지 않는 ‘자연(퓌지스)’과 문화의 단절에서 출발합니다. 이들은 인간의 문화를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는 카오스를 자의적으로 결정화한 상징적 질서로 이해합니다. 구조주의자들은 이렇게 설명함으로써 문화의 자의성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카오스로서의 자연에 대해 하나의 완결된 구조가 단번에 주어진다고 생각할 때, 구조의 ‘바깥’을 사유할 수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언어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쉬르 같은 기호학자들은 언어적 질서가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인 연결 속에 수립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나, 연속적인 변이, 배치 속에서 언어적 질서가 역동적으로 변이하고 있음을 사유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때에는 언어를 실천/명령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들뢰즈-가타리는 우리의 구체적인 언어-실천의 배후에는 완결된 구조가 아니라 다양한 기호체제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네 가지 기호체제-기표작용적 체제, 전前 기표작용적 체제, 반反 기표작용적 체제, 후後 기표작용적 체제-를 제시합니다. 이 네 가지 기호체제는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이어지거나 대립하지 않고 항상 동시에 혼합적으로 작용합니다.

이번에 채운샘이 가장 길게 설명해주신 것은 기표작용적 기호체제입니다. 기표작용적 체제는 기표의 지고(至高)함에 의해 작동되는 체제입니다. 우선 이해해야 할 것은 기의가 기표로부터 항상 미끄러진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정의’라는 말이 가리키는 바를 이해하려고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사전을 참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 단어는, 언제나 또 다른 알 수 없는 단어들에 의해 정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기호의 의미를 움켜쥐기 위해 또 다른 기호들로 무한히 나아가게 됩니다. 기표는 기의와 단일한 대응관계로 묶여 있지 않으며 단지 하나의 언표를 둘러싼 의미의 원환들, 하나의 기호를 둘러싼 기호들의 계열들이 있을 뿐이죠. ‘정의’의 의미는 ‘정의’라는 기표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기표작용적 체제에서는 ‘기표’의 지고함 아래서 기의를 찾으려는 무모한 여정이 되풀이”(강의한 3쪽)됩니다. 군주의 말, 신의 뜻, 예수님의 말씀 등등의 초월적 기표를 중심으로 기호들의 무한한 연쇄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해석’에 의해 기표의 지고함이 보장된다는 점입니다. 전제군주의 옆에는 항상 사제, 관료, 서기 등등의 해석자들이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는 사제들, 왕의 뜻을 전달하는 관료들, 붓다와 공자의 말씀을 설파하는 제자들과 주석가들. 해석으로 인해 “기의는 기호들의 그물망이 자신의 실을 던져오는, 인식되지 않고 주어지는 무정형의 연속체이기를” 그칩니다. 기표작용적 기호체제에서 중요한 것은 해석자들의 권력입니다. 기표 자체에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표를 참조하며 끊임없이 해석을 증식시키는 해석자들에 의해 기표의 지고함이 부단히 재생산되는 것이죠. 카프카의 소설 <성>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성’의 메시지를 마을에 전하는 ‘전달자’들입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성’을 참조하며 성의 명령을 전달하고 실행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소설 속에 한 번도 성이나 성 안의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으며, 소설에 나오는 그 누구도 성에 가본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이라는 초월적 기표는 사실 비어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전달자’들은 성과 마을을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중심인 성을 해석함으로써 성의 지고함을 보장하고 또 그 권력을 생산해냅니다. 때문에 ‘성’이라는 기표는 언제나 결핍인 동시에 과잉입니다.

기표작용적 체제는 의미생성의 중심인 기표와 그 기표를 작동시키는 해석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깝게는 어떤 텍스트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서도 이러한 기표작용적 체제의 예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고전을 초월적 기표로 만들곤 합니다. 니체나 스피노자 같은 텍스트들에 어떤 진리가 담지 되어 있다고 믿고, 그 본 뜻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죠. 그러나 기표가 그 자체로 지시하고 있는 무엇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참된 뜻을 가장 잘 해설해놓았다고 여겨지는 주석서나 해석자의 권위에 의존하게 됩니다. 갑자기 다른 예가 떠오르는데 지금 정치인들의 언표 속에서는 ‘민심’이 일종의 초월적 기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인들은 끊임없이 ‘민심’을 참조합니다. 몇몇 통계들이나 지수들을 참조하여 ‘민심’을 대변한답시고 거기에 자신의 해석을 덧붙이죠. 그런데 이들이 대변하는 민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민심이라는 것도 대변자/해석자를 자처하는 정치인들의 해석과 더불어 지고한
기표로서의 실체를 부여받는 것 같습니다.

기표작용적 기호체제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개념은 바로 ‘얼굴’입니다. 얼굴은 기표에 실체성(몸체성)을 부여합니다. 채운샘이 예로 들어 주신 것처럼 ‘이따 옥상에서 보자’라는 말은 발화자에 ‘얼굴’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됩니다. 그 표정과 분위기에 따라서 공포를 자아내는 언표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설렘을 유발하는 말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얼굴은 모든 탈영토화된 기호들이 달라붙는 의미생성의 중심 몸체로서, 그 기호들의 탈영토화의 한계를 표시”(223)합니다. ‘얼굴’ 개념은 채운샘께서 다음 시간에 ‘후기표작용적 기호체제’와 더불어 설명해주시기로 했습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이 ‘얼굴’ 개념이 들뢰즈-가타리의 언어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개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굴’과 결부되는 순간 기표는 단지 ‘언어적’이기만 한 차원에 머물 수가 없게 되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얼굴이 부여될 때 ‘이따 옥상에서 보자’라는 언표는 추상적인 구조 속에서 하나의 위치를 차지하거나 기표-기의의 대응관계 속에서 고정된 의미를 재현하는 대신에, 아주 구체적인 힘으로 효과로 명령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죠.

얼굴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지고한 기표에 실체를 부여하는 ‘왕의 얼굴’에 항상 죄인, 얼굴 없는 자의 얼굴(?)이 대응된다는 것입니다. 이들 죄인들, 유배자들, 얼굴이 없는 자들은 초월적 기표와 그것에 기의를 재장전하는 해석자들의 권력에 반하는 모든 것들을 떠맡습니다. 기표작용적 기호체제가 자명한 것으로 작동하기 위해 배제되고 추방되어야 하는 잡음들. 기표작용적 기호체제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러한 얼굴 없는 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존재는 기표작용적 기호체제에 내재해 있는 도주의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무정형적 군중들, 추방자들의 반란, 도주의 가능성. 여기에서 완결된 구조가 아니라 역동적인 지층화 작용을 사유하려는, 다시 말해 지층과 지층화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동시에 사유하려는 들뢰즈-가타리의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저의 짧은 상식에서 비롯된 질문이 하나 생겼는데요. 이슬람(아마도 시아 이슬람?) 예술에서는 신성한 인물들을 그릴 때 그들의 얼굴을 가리는 전통이 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이란에 갔을 때 본 시아파 무슬림들이 신성한 전투로 여기는 카르발라 전투를 묘사한 그림에 이맘 호세인을 비롯한 성인들의 얼굴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들뢰즈-가타리의 관점에서 성인들의 얼굴을 가리는 (물론 무함마드를 비롯한 성인들의 얼굴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는 그림도 많긴 했습니다만) 전통을 어떻게 볼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지난 강의에서 잠깐 다뤄진 후기표작용적 기호체제는 채운샘께서 다음주(그러니까 내일)에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다고 하시니 다음 후기에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후기부터 엄청나게 늦어진 점 죄송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전체 1

  • 2019-09-30 19:43
    기의가 기표로부터 미끄러짐. 그로부터 해석의 만갈래 길이 열리는군요.
    측량사 K 씨가 백작님의 얼굴을 직접 봐야겠다며, 안되면 하급 관리의 얼굴이라도 꼭 봐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떠오릅니다.
    '지층'이 인간중심주의와 대결하는 개념이라는 점도 공책에 적어두어야 겠습니다. 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