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천개의 고원> 읽기 시즌3ㅡ2강(9.30)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10-06 17:12
조회
176
채운샘 강의를 듣다보면 ‘지층에 갇히지 않고 고른판을 향하기’, ‘기관 없는 신체를 구성하기’, ‘탈영토화의 운동을 절대적-지속적으로 밀어붙이기’, ‘추상기계를 작동시키기’ 같은 말들을 자주 듣게 됩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사유의 목표는 기관 없는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하죠. 이번에 들은 ‘얼굴성’ 개념을 적용해보자면 얼굴을 지우는 것. 이 말이 새삼 놀랍습니다. 아름다운 지층에 훌륭한 건물을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지층화 작용이 이루어지지 않는 고른판에 이르는 것이 문제라는 것. 그런데 고른판, 추상기계, 기관 없는 신체 같은 말들이 워낙 낯선 말들이라 ‘기관 없는 신체를 구성하라!’ 같은 들뢰즈-가타리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막막한 것도 사실입니다. 무언가 막연히 신비한 영역으로 느껴지는 것이죠. ‘기관 없는 신체’가 무엇이고 ‘고른판’이 무엇인지 따라가기 바빠서 그 개념들이 실천적으로 제기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뜬금없이 저는 절차탁마 NY에서 《즐거운 학문》을 읽다가 약간의 힌트를 얻었습니다. 《즐거운 학문》 1부의 첫 번째 글에서 니체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한 없는 웃음의 파도’에 지배되는 목적의 세계임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근거와 당위를 만들고 그것으로 공중누각을 쌓습니다. 그런데 인간으로 하여금 이렇게 끊임없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만들어내도록 추동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맹목적인 생에 대한 의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계속해서 삶의 목적을 갈구하고 ‘삶은 살 만한 것이야’라고 느끼게 해줄 어떤 근거들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사실 그 자체로는 어떤 의미, 목적, 당위와도 무관한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 확장하려는 본능에 봉사하고 있을 뿐인 것이죠. 이처럼 인간 삶의 조건이란 보다 근본적인 희극에 의해 규정되는 비극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지혜롭게,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충분히 그래야 할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앎으로써 진리 전체로부터 우러나는 웃음을 웃을 줄” 알아야 합니다. 즉 목적과 근거의 세계를 가뿐히 넘어가버리는 ‘웃음’의 차원에 자기 자신을 열어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니체는 ‘즐거운 학문’이라는 개념을 통해, 기존의 진리의 근엄한 이미지를 거부하고 웃음과 지혜의 결합을 시도합니다. 자기 자신의 관점, 자기가 만들어낸 목적과 의미의 세계를 절대화하지 않을 수 있는 힘으로서의 지혜, 철학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즐거운 학문입니다. 목적과 근거의 세계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 니체적 의미의 철학의 쓸모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니체가 지적하고 있는 이런 지점이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기관 없는 신체의 구성’, ‘얼굴 지우기’, ‘추상기계를 작동시키기’ 같은 문제들과 연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자신의 조건이 규정하는 사유의 패턴, 주체화의 양식, 감각의 체제, 의미의 체계에 갇히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들뢰즈-가타리의 이런 질문은 어떻게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목적과 근거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웃음과 희극으로서의 세계를 긍정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니체의 문제와 닿는 것 같습니다. 즉 들뢰즈-가타리가 생경한 개념들을 가지고 제기하는 문제들도 결국은 인간의 규정을 매번 빠져나가는 삶을 긍정하는 일에 관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들뢰즈-가타리는 역사적-정치적-사회적 장들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면서 인간이 삶을 긍정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문제인지를 (혹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잡소리가 길었습니다. 이번 시간에 다루었던 얼굴성 개념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이 개념 앞에서 독자는 곤란을 겪게 됩니다. ‘얼굴’이 철학 개념이라니. 어쩌면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효과를 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들뢰즈-가타리가 일상적 언어를 낯선 배치에 가져올 때 우리의 습관화된 재현적 사고는 갑자기 작동을 멈추고, 우리는 이전에는 내 본적 없는 사유의 길을 내도록 강요됩니다. 그래서 얼굴성이란 무엇일까요? 우선은 머리와 얼굴의 차이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얼굴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얼굴, 얼마나 소름끼치는가. 자연스럽게도 얼굴은 모공들, 평평한 부분들, 뿌연 부분들, 빛나는 부분들, 하얀 부분들, 구멍들을 가진 달의 풍경이다. 얼굴을 비인간화하기 위해 그것을 클로즈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커다란 판이며, 자연스럽게 비인간적이며, 괴물적인 복면이다.”(362) 이와 달리 동물들의 ‘머리’는 그것들의 몸체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머리는 동물들의 꼬리나 다리처럼, 포효하고 물어뜯고 냄새 맡는 하나의 ‘기관’입니다. 그러나 얼굴은 다릅니다. 인간의 얼굴은 몸체로부터 탈영토화 되어 있죠. 얼굴은 특정한 기능으로 환원되지 않는 의미작용의 기관입니다.

들뢰즈-가타리가 얼굴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의미작용의 몸체로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 들뢰즈-가타리는 어떤 추상적인 구조, 기표-기의의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명령이자 효과로서 언어를 사유했습니다. 명령어로서의 언어는 대상을 지시하거나 정보를 운반하는 대신에, 얼굴과 더불어 힘으로서 작용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기표작용적 기호체제에서 얼굴은 흔들리고 분산될 수 있는 기표작용을 붙들어주는 기능을 했습니다. 왕의 초상화, 종교화에서 그리스도의 얼굴, 박람회에 출품된 나치 독일의 아리아인의 얼굴과 소련의 노동자들의 얼굴. 이런 얼굴들은 초월적 기표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기호체제에 몸체를 부여해주는 얼굴들이라는 점에서 더 없이 정치적인 대상들입니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국왕의 신체’에 대한 칸토로비츠의 분석을 인용하는데, 분석에 따르면 국왕의 신체는 살다가 죽는 사적이고 생물학적인 신체와 “시간을 초월하여 머물고, 그 왕국의 구체적인 그러나 감촉되지 않는 (신성불가침의) 지주로서 보존되는” 신체로 나뉩니다. 푸코는 이러한 관점을 수형자의 신체에 대해 적용하는데, 아무튼 핵심은 기표작용적 체제 속에서 국왕의 신체가 그 자체로 중심적 얼굴로 기능하며 국가 자체를 재생산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굴은 후(後)기표작용적 기호체제에서도 핵심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기표작용적 기호체제에서 하나의 얼굴이 다른 모든 얼굴을 대변했다면, 후기표작용적 기호체제는 그러한 중심적 얼굴이 체현하고 있는 전제군주적 권력으로부터의 ‘얼굴 돌리기’에서 시작됩니다. 후기표작용적 기호체제의 중심인물은 전제군주와 그의 해석자(관료, 사제)가 아니라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지배적 의미작용을 배신한 채 정념/수난에 이끌립니다. 그리고 중심적 얼굴과 해석자를 매개하지 않고 방황과 수난 끝에 스스로 주체화를 수행하게 됩니다. 중심적 기표/얼굴과의 관계로부터의 도주에서 출발하는 후기표작용적 기호체제에서 주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주체화의 점이 필요합니다. 주체화의 점은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여인의 표정, 돈, 집단, 음식 등. 현대사회에서 주체화의 점은 주로 교육에 의해 형성됩니다. 이처럼 후기표작용적 기호체제는 중심적 얼굴/기표로부터의 도주를 긍정적으로 전유하지만 다시금 주체화의 점에 재영토화됩니다. 마치 성형수술이 주어진 얼굴로부터의 탈영토화를 통해 가장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얼굴에 도달하는 것처럼요.

후기표작용적 기호체제에서 얼굴을 지우고 주체화를 소멸시키는 것은 의식과 정념을 탈주체화시키는 것, 주체화의 점으로부터 도주를 감행하는 과정을 수반합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도표적 기능 위에 스스로를 해방시키기’라고 부릅니다. 채운샘께서는 이를 경혈도와 카스타네다의 예를 들어 설명해주셨습니다. 제가 이해한 핵심은 ‘점’과 ‘단절’이 아니라 ‘흐름’을 살아가는 것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의식, 정서, 언어 등등을 고정된 점이 아니라 이탈하는 흐름 속에 위치시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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