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천개의 고원> 읽기 시즌2ㅡ10강(11.25)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12-02 18:07
조회
274
철학하는 월요일의 대장정(?)이 막을 내렸습니다! 그동안 함께해주신 선생님들이 계셔서 저도 즐겁게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함께 이렇게 난해한(?) 철학 강의를 들은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년에 계획되어 있는 강좌들이나 세미나들에서 샘들과 다른 관계를 실험할 수 있길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일단 지난 강의 중 제게 인상 깊었던 대목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철학의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는 ‘인간이라는 부끄러움’입니다. 참 많은 생각을 하도록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만약 어떤 억압적인 현실을 더 나은 무엇으로 ‘개선’하고자 한다면 철학이 아니라 사회학을 공부하거나 당장 현실정치에 뛰어들어야겠지요. 또 단지 괴로운 현실과 불완전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여기’가 아니라 저편의 ‘다른 곳’을 꿈꾼다면 종교나 유사종교들이 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럭저럭 현실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어진 삶의 방식을 따르며 그 안에서 나름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인간이라는 부끄러움’은 이 모든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감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철학의 동기는 지금 우리를 둘러싼 배치 속에서 이런 방식으로 규정되고 있음에 대한,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의 품행을 인도하는 권력을 재생산하고 있는 자신과 타인들에 대한 어떤 참을 수 없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들뢰즈가 말하듯 이는 아우슈비츠 학살을 목도하며 느끼게 되는 것일 수도 있고, 버라이어티 쇼를 보며 느끼게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개선’을 시도하거나 ‘다른 곳’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도록 하는 체험과 감각.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인간이라는 부끄러움’인 것 같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질문에 미래의 그림자가 드리우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개선과 진보와 같은 말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부끄러움’을 회피하려 하지 말고, 마치 수행자나 시인이 죽음을 명상함으로써 지금의 살아있음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는 것처럼 우리의 확신을 의심하는 과정 속에서 참을 수 없음에 직면해야 한다고. 이것이 철학을 하는 자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채운샘도 말씀해주셨지만 제가 이러한 수치심, 참을 수 없음을 느끼는 것은 더 많은 자유와 함께 생산되는 더 많은 무기력이라는 역설 속에서입니다. 들뢰즈는 우리가 규범과 정상성을 강제함으로써 유용하고 순종적인 신체를 만드는 규율사회로부터 “피상적이고 순환적이며 연속적인 변수 위에 놓인” 통제사회로 이행해가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자본은 점점 더 열린 상태를 향해 나아갑니다. 신자유주의 통치성은 ‘반동’과 ‘체제유지’라는 관점에서는 더 이상 파악되지 않습니다. 자본은 이제 ‘혁신’, ‘변혁’, ‘유동성’, ‘자유’, ‘새로운 정체성이나 집단성의 적극적 구성’ 등과 같은 ‘운동’들을 적극적으로 전유합니다. 그리고 자본의 강제함 없는 관리는 교육, 취업, 노동, 여가를 가리지 않고 삶 전반을 미세하게 파고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본이 제공하는 자유에 탐닉하는 동시에 자본 밖에서 바깥에서는 무엇도 스스로 구성하지 못하는 예속에 빠지고, 쏟아지는 새로운 상품들과 컨텐츠들 속에서 즉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 외에는 무엇도 할 줄 모르는 무기력에 빠져듭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믿는다는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들뢰즈의 말이 절실히 다가옵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쾌락에는 자본과 제도에 대한 뿌리 깊은 의존성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일리치가 말하듯 스스로의 존재를 상품과 서비스에 몽땅 내맡긴 결과로 우리는 세계 안에 거주하는 우리 자신들의 역량을 보는 눈을 잃게 되었고, 이에 따라 역량의 빈곤화라는 ‘현대화된 가난’에 시달립니다. 세상을 믿는다는 것은 자본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본의 공리계로 환원될 수 없는 우리의 삶을 믿고, 제도와 자본에 포획되지 않는 관계를 실험함으로써 통제를 벗어나는 시공간을 구성하기. 이것이 우리가 ‘부끄러움’에 직면하는 길인 것 같습니다.

《천개의 고원》은 우리를 선택지가 소여로 제시될 수 없는 근원으로 내몹니다. 그러니까 주어진 항들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더 올바른 일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항들로 환원되지 않는 차원(그러니까... 리좀, 고른판, 기관 없는 신체 등의 차원)을 사유하도록 합니다. 말하자면 독자에게 철학을 강제하는 책인 것이겠죠. 들뢰즈-가타리가 우리를 선택지가 성립되지 않는 차원으로 내모는 것은, 그렇게 해야만 스스로 주어지지 않은 길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을 출간한 직후의 인터뷰에서 《천개의 고원》제시하는 세 가지 노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제 생각엔 세 가지가 결국 같은 말인 것 같기도 합니다만). ① 사회란 자체의 모순보다 도주선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 모순을 심화하고 극복해서 ‘더 개선된’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으로부터 달아나는 것, 코드와 영토에 갇히지 않는 역량을 구성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② 계급보다 소수를 고찰하기.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당하지 않는 존재 방식과 관계의 양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문제입니다. 소수를 규정하는 것은 상대적인 적음이 아니라 불가산(不可算)의 역량입니다. ③ ‘전쟁기계’의 위상을 구하기.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 전쟁기계란 전쟁을 수행하는 기계가 아니라, 홈을 파고 포획하고 끌어들이는 국가 장치의 외부성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는 모든 것을 사유화하는 동시에 늘 다른 곳을 꿈꾸는 ‘정주’의 방식이 아니라 어디에도 머물지 않음 속에서 시공간을 다르게 출현시키는 ‘유목(점유)’의 방식에 의해 규정됩니다.

도주, 소수, 전쟁기계. 이 세 가지 노선을 통해 들뢰즈-가타리가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우리 자신의 역량을 통해 길을 만들어 내지 않는 한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다시 말하면 주어진 선택지에 대한 의존을 버리면 길은 무한하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역량을 통해 길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혼자 힘으로 극복해라’라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것은 주어진 지층을 절대화하기를 그만둠으로써, 스스로가 자신이 아닌 모든 것들과의 상호되기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되어가고 있음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 안에서 주어지지 않은 관계를 생산해낼 수 있는 힘, 따라서 스스로를 변이시킬 수 있는 힘이 곧 자기 자신의 역량입니다.

채운샘이 청년들의 자립에 대해 말씀해주신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립’을 ‘경제’로 환원합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의미에만 국한된 자립이란 또 다른 의존에 다름 아닙니다. 제도와 자본과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절대적 의존이 경제적 자립으로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채운샘께서는 자기 자신이 타자들과 함께가 아니라면 살아갈 수 없음을 자각하는 일에서 자립이 시작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립이란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역량을 구성하는 동시에 이질적인 역량들과 접속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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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6 23:01
    인간이라는 부끄러움. 인간에 대한 질문. 철학.
    대장정을 마무리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부럽기도 합니다. 이질적인 역량들과 또 다른 방식으로 접속하는 2020년을 위해! 씨유 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