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천개의 고원> 읽기 시즌2ㅡ9강(11.18)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11-24 16:43
조회
140
이번 주에는 열두 번째 고원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에 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1227년은 징기스칸이 전사한 해로, 이 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전쟁기계'라는 독특한 개념을 통해 국가에 대한 다른 사유를 전개합니다. 전쟁기계란 무엇일까요? '전쟁'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전쟁의 표상, 즉 국가전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국가가 벌이는 전쟁이죠.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국가입니다. 전쟁기계는 전쟁을 수행하는 기계가 아니라 국가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기계입니다.

국가장치와 전쟁기계는 상이한 공간의 구성과 연관되는데, 국가장치가 홈 파인 공간을 만들어낸다면 전쟁기계는 매끈한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강의에서 좀더 자세히 알아보게 되겠지만, 우선 장기와 바둑의 예를 가지고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국가장치가 벌이는 전쟁은 장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장기에서는 각각의 말들이 정해진 코드에 따라 움직이고 부여된 코드에 따라 더 높거나 낮은 중요도를 지닙니다. 장기판은 정해진 것들이 정해진 방식으로만 오갈 수 있는 홈 파인 공간입니다. 이에 비해 바둑판에는 딱히 중심이나 가장자리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으며 각각의 알들도 미리 코드를 부여받고 있지 않습니다. 매번의 수에 따라서 바둑돌 하나가 전체 판을 다른 방식으로 출현시킬 수도 있으며, 아군과 적군의 진영이 따로 있지도 않죠. 바둑판은 매번의 수와 더불어 형성되는 배치에 따라 다르게 출현하는 매끈한 공간입니다. 바둑과 장기의 이 예를 축구와 야구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기계는 또한 유목민입니다. 그런데 이때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유목민이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유목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존재방식, 한 형태 혹은 유형으로서의 유목민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유목, 유목민이란 무엇일까요? 단지 '이동한다'는 것으로는 유목민의 특성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우리 정주민들도 끊임없이 '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주하기 때문이죠. 존재방식으로서의 유목은 공간과 관계하는 방식에 의해 규정되는데, 유목민들은 '머물지 않음', '사적으로 점유하지 않음'이라는 공간을 대하는 태도에 의해 정주민들과 구분됩니다. 유목민들은 언제나 다시 돌아오기 위해 떠납니다. 그래서 어느 지역의 자원이나 그 환경을 고갈시키거나 파괴해버리기 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이들은 특정한 공간과 다른 존재들이 다른 방식으로 접속할 여지를 언제나 남겨둡니다.

반대로 정착민들은 한 공간을 고갈시키고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만약에 인류가 지구를 모조리 착취하고 SF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다른 행성으로 이주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말해 그들이 아무리 멀리 떠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또 다른 '정착지'를 찾는 한 여전히 그들은 정착민일 뿐일 것입니다. 정착민들은 다른 이들이 다른 방식으로는 접속할 수 없도록 공간에 홈을 팝니다. 가령 이반 일리치는 '고속도로'를 산업적 도구로 간주하여 비판하는데, 그에 따르면 고속도로는 오직 차만이 다닐 수 있고 자가용을 지닌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 있으며 고속도로의 빠른 속도는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과 이용하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제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정착민인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은 '거주의 기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리치는 자본주의가 인간으로부터 거주의 기술을 빼앗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단지 자본의 논리에 따라 그 기능과 용법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홈 파인 공간에 일방적으로 '수납'될 뿐이죠. 끊임없이 새로운 음식점과 새로운 핫플레이스가 생기고, 눈이 번쩍 뜨이는 멀티플렉스가 들어서고, 독특하고 예술적인 조형물들과 건축물들이 들어서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홈 파인 공간에 수납될 뿐입니다. 그와 더불어 공간은 우리 자신과 함께 변이해가는 주거지가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거나 점유할 수 있는 상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일리치가 말하는 '거주의 기술'이란 소유하고 수납당하는 예속적 관계로부터 벗어나 공간과의 자율적인 관계 양식을 만들어내는 일일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 안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독점과 고갈로 이어지는 정착민의 방식이 아니라 매번 마주하는 공간과 자율적으로 관계하는 유목민의 방식이 요청됩니다.

전쟁기계는 국가장치의 '외부'입니다. 이는 들뢰즈 가타리가 줄곧 제시해온 두 차원에 대입될 수 있습니다. 지층과 고른판, 유기체와 기관 없는 신체, 나무와 리좀, 거시정치와 미시정치 등등.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지층화된 차원입니다. 우리는 지각 가능하고 척도화할 수 있으며 인과와 목적의 차원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질서화된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살아가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내부'를 구성하는 형식이 항상 외부성과 관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층으로 환원되지 않는 힘이 늘 요동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우리의 고질적인 습관을 문제 삼고 다르게 살기를 꿈꿀 때, 특정한 배치가 강제하는 예속적 주체화에 저항하고자 할 때 우리는 모든 문제를 제거하고 제로상태로 되돌아가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없으며, 그런 의미의 변혁을 꿈꾸는 것은 이상주의에 다름 아니겠죠.

지층은 언제나 외부성을 전유함으로써 존재하며, 바로 그런 점에서 언제나 내부로 환원되지 않는 차원의 위협에 놓이게 됩니다. 이것이 국가장치와 전쟁기계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에 저항하는 사회'를 이야기한 피에르 클라스트르를 비판적으로 계승합니다. 클라스트르는 진화론적 국가론과 단절하여 원시사회에 국가를 저지하는 힘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원시 수장제에서 추장은 전제군주의 전신이 아니라 그 안티테제였다는 것이죠. 실제로 원시사회에는 권력의 집중을 저지하는 다양한 메커니즘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원시사회를 막연하게 낭만화하며 국가의 출현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들뢰즈-가타리는 국가가 언제나 내재해 있는 하나의 극(원국가原國家)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원시사회는 국가 이전의 낭만적인 자연상태 같은 것이 아닙니다. 국가는 일정한 힘들이 현실화된 차원이며 원시사회는 그러한 내재해 있는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그것의 현실화를 저지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들뢰즈-가타리의 관점에서 국가는 어디에나 내재하는 동시에 어디에도 독자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푸코가 말하듯 합리성의 사령부 같은 것은 없습니다. 대통령도, 국가기관들도, 법도 그 자체로 '국가'는 아닙니다. 길을 막고, 길을 내고, 검문을 하는 등의 '홈을 파는' 실천들 속에서 국가는 구성되며, 견고한 절편들을 서로 이어주는 '공명상자'로 기능합니다. 따라서 국가는 언제나 준 안정적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국가 이전의 자연상태를 꿈꾸고 이상화하는 대신에 우리는 국가를 외부로부터 교란시켜야 합니다. 국가 내부로부터 틈을 발견하고 구멍을 내기.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국가의 다른 극에는 언제나 패거리, 소수집단, 밴드 등의 국지적인 집단성들이 존재합니다. 이들이 중심과 거리를 두고 자기 고유의 법칙성을 만들어냄으로써 국가를 교란시키는 전쟁기계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러한 소수집단들은 수가 많고 물리적 힘이 세다는 것이 아니라 독특하다는 것을 자신의 역량으로 삼습니다. 문제는 공허하게 '국가 타도'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화되지 않는 역량을 지닌 관계들과 집단들을 만들어내는 실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홈 파인 공간으로 환원되지 않는 움직임들은 도처에 있습니다. 일리치는 '경제'를 작동시키는 것은 언제나 경제학이 포착할 수 없는, 사용가치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자율적인 활동임을 강조했습니다. 사실 규문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관계들과 활동들이 이 공간을 굴리고 있죠. 어떻게 이러한 활동들을 단지 예외적인 체험으로서가 아니라 중심을 교란하고 주류적 삶을 문제화하는 능동적 과정으로 전유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일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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