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주역과 글쓰기 4학기 5주차 후기

작성자
곤지
작성일
2021-11-23 22:07
조회
362
은정샘이 산지박괘로 글을 써오셨고, 이번주 채운샘 강의를 효사 하나로 딱 표현하자면 산지박괘의 육오효, ‘관어, 이궁인총 무불리(貫魚, 以宮人寵 无不利)’ 였다고 생각한다. 글쓰기의 어려움에 빠져 있는 우리들을 하나로 꿴 말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 표상이 얼마나 이 우주의 걸음걸이와 어긋나는 표상인가를 점검해보세요.’ 이다.

아래 후기는 대부분 채운샘의 강의를 옮겨 썼다.

기쁨, 주역의 사고 속에서 기쁨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보통 무엇을 기쁨으로 여기고 있을까? 소유와 연관되어 있다. 집, 자동차, 학위, 주식의 오름, 사람 등. 이처럼 자본화 되어 있다. 나에게 이익이 되면 기쁘고 해가되면 슬프고 화가 난다. 거기에 너무 길들여져서 우리의 감정과 신체와 생각하는 방식이 이 자연의 메카니즘에 입각해서 생각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주역에서 기쁨은 소성8괘 중 태괘이다. 아래 두 효가 양의 작대기로 되어있고 세 번째 효가 음의 작대기로 되어진 것이다. 근데 복희씨는 기쁨을 왜 그런 모양으로 그렸을까? 알 수는 없다. 근데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태괘는 연못을 말하기도 하는데 연못에 물이 적당히 차 있으면 기쁘지 않겠는가? 그 안에 물고기도 기쁘고 그 물을 마시고 쓸 수 있는 사람도 기쁘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양효 두 개 만큼 차 있는 상태. 우리 신체에 있어서 기쁨은 그렇게 내면에 양효 두 개를 차오르게 하는 것 아닐까. 외부에 값비싼 물건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럼 어떻게 양효 두 개를 차오르게 하는가? 태괘 대상전에서는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하고 익히라고 말한다.

내 상황이 그닥 나쁘지도 않은데 왜 불안해하고 안정감에 집착하는가?

“내 마음이 요동치는 산지박의 때라고 써오셨는데...” 자기 마음과 괘를 동일시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박괘는 하나의 상황일 뿐 인 것이고, 아무리 잘나가도 우리는 늘 불안하고, 못나가도 불안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음, 양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니까 내가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내가 처한 하나의 상황일 뿐이다. 산지박은 어느 때인가? 음이 가득 차오르면서 제일 위에 양효 하나 남은 음력 9월이다. 절기로 생각해보면 죽음을 얼마 안 남은 때, 노년으로 접어드는 때 무엇을 해야할까? 후세가 살아갈 수 있는 열매 하나를 어떻게 하면 남길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기이다. 이처럼 노년을 맞아 죽음을 앞에 두고도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안다면 불안하기 보다는 차분히 하루 하루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자신의 상황이 박괘의 상황도 아닌데 불안해하고 안정감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과연 64괘 중에서 안정된 상황을 말하는 괘가 있는가? 괘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호괘, 도전괘, 착종괘, 배합괘들과도 연관되어 있고, 효 하나하나도 변해가는 와중에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어떤 상황도 변해간다. 7걸음만 가면 상황이 변한다. 안정이라는 말이 기만임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상황이 지속되어 가는 것에서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이미 반 주역적임을 알아야 한다. 질문을 하나 하나씩 해나가야 한다.

‘작은 것을 축적하는 것이 높고 위대한 것을 이룰 수 있는 근거다.’ 자, 여기서 질문. 작은거는 뭐고, 큰거는 뭐야?

우리가 저기 목표 지점을 정해놓고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것은 작은 것이고 저 목표지점에 도달하는 한걸음은 크고 위대한 것 인가? 작은 것에도 의미가 있다. 정이천이 작다 크다 라고 말한게 일의 경중을 말한 것일까? 동양의 세계에서는 한 스텝이 전부인 세계다. 한 스텝이 없으면 다음 스텝이 없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가 그런 것이다. 하나의 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단위의 n분의 1이 아니다. 이 한순간이 없으면 다음 순간이 없다. 이간이 생각할 수 있는 거보다 더 작은 순간을 찰라라고 한다면 그 찰라를 대충하고 다음 찰라를 맞이할 수 없다. 그 찰라가 도래해야만 내가 존재하는 거고 그 찰라가 도래하려면 다른 모든 것들의 찰라가 함께 도래해야 된다. 그런 점에서 시간은 흘러가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겪는 하나의 순간이 전 영원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시작하는게 쉽다고 했는데 시작이 쉬워서가 아니라 지속하지 못하는 것을 그냥 그렇게 표현한 것일 수 있다. 삶과 죽음이 교대되는 것이 없이 봄, 여름만 지속된다면 이 지구는 터져 버릴 것이다.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목표를 정해 놓았는데 세세한 것은 왜 못하게 될까? 표상인 도달치가 언제나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64괘를 다 외웠다고 쳐보자. 그럼 어디에 도달하는 거에요? “아무것도 없더라구요.” 64괘가 목적지가 될 수 없는게 64일 이라고 쳐봅시다. 63일 동안 못 외우다가 64일 째 다 외우는게 아니다. 그렇게 되면 64일 째가 더 중요한 날인가? 이러한 양적인 사고를 바꾸셔야 한다. 그리고 외우는 것은 습관이다. 습관은 관념이 아니다. 몸에 붙이는 것이다. 어떤 것을 암송한다는 것은 근육을 쓰는 문제이다. 머리로 뭘 해가지고 암송을 할 수 없다. 소리내서 계속 읽는 것도 몸에 붙이기 위함이다. 그래서 외운다는 것은 신체의 항상성을 동반하는 것이다.

누구나 망동을 하는데 망동을 언제 하는가? 소화해야 공부가 되는 것인데 언제 건너뛰고 싶을까? 우리는 목표지점인 마치는 순간에만 도달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마침도 하나하나 가는 스텝의 한 순간일 뿐이다. 그래서 망동은 자만심에서 생긴다.

역량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남의 역량과 비교하지 말라. 그 사람이 내 인생이 아니다. 그 사람이 5번 만에 되도 나는 20번 하면 되는 구나를 아는 것이 자기 역량의 실험이고 자기의 리듬을 아는 것이고 거기서 충만함이 자란다.

자기를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하는 것이 가능한가?

덕에 대한, 대인에 대한, 군자에 대한, 좋은 사람에 대한 아주 관념적인 표상이 있다. 어딘가에서 들은 것이다. 들었으니까 상으로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떠어떠하다는 이미지만 가지고 있다. 그 사람들이 어떤 조건 속에서 뭘 어떻게 해보려고 했을까는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흉내만 내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하늘에 있고 자신은 저 땅바닥에 두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긍정이 안 된다. 위대한 사람이 위대하게 된 건 위대한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무언가가 평생토록 견지됐기 때문인 것이다. 그 사람이 타고난 무언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는 원래 저만치 떨어진 위대함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태양을 위대하고 얘기하는 것은 태양이 높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매일 뜨기 때문이다.

자기 비하를 계속하는 것은 거기에서 오는 이상한 쾌감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생명도 자신을 괴로움에 빠트리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는다. 쾌감이 안 따르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자기를 저 밑바닥에 두는 관계 속에서 유용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걸 진솔하게 봐야 그런데서 벗어날 수 있다. 누구도 자기를 위할 수 없으면 남도 위할 수 없다.

덕을 쌓기 위한 계단은 없다. 매일 매일인 것이지. 매일 매일 계단을 오르는가? 그럼 죽는 날엔 최고의 계단에 올라가는가? 이런 생각을 빨리 버려야 한다.

고집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때에 지켜야 고집이 능동적인 행동이 될 수 있는 것인가?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동일화 하려는 욕망에는 자기를 굳건하고 고집스럽게 지키려는 완고함이 있다. 완고함을 고집스럽게 지키면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을까? 완고함을 유지하면 언제 관계가 틀어지는지? 완고함이 극단적으로 치우치게 되면 꼴통이 되거나 아무 중심 없이 흘러가게 되는데 그런 두 극단이 아니라 자기 중심을 가지고 중(中)을 견지하며 사는 정고함은 어떤 태도인 것일까?

나한테 안 좋으면 다 고난인가? 그럼 우리는 고난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피할 일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거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느냐 없느냐가 자신의 역량이다.

주역 1년차 호진샘의 10주 완성 64괘 낭송이 아름답게 마무리 되었고 더불어 양적사고에서도 벗어났다는. 64괘 낭송 후 회식에서는 내년 규문 불교 수업을 해주시는 효암스님의 암송에 대한 귀한 말씀도 듣게 되는 행운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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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24 13:07
    곤지님 덕분에 역량을 실험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 이었습니다. 곤지샘은 공감이 안된다고 하시지만 ㅋㅋ 닮은듯 다른 샘을 보며 한스텝 나가려는 마침과 시작이 함께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누차 말씀드렸지만... 샘이 간 길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따라 갈 수 있었다는거~~ 그 의미를 긍정적으로 해석해 주시길 바래요~^^ 샘이 저를 키우셨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보셔야 된다구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