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와 글쓰기

9월 1일 강의후기

작성자
지현
작성일
2019-09-02 14:29
조회
146
1.비판한다는 것

‘장자는 문명에 비판적이다, 반면 맹자는 문명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비교는 우리들끼리 세미나를 하면서도 뭔가 헛헛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장자가 문명을 비판한다면 어떤 맥락으로 비판하는 지, 맹자는 문명을 예찬하는 지점이 뭔지를 살펴보라고 선생님은 강조하십니다.

선생님은 문명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는 방법으로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를 예로 들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프로메테우스(먼저 생각하는 사람)는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준 대가로 캅카스의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날마다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고, 밤이 되면 간이 다시 회복되는 고통을 겪지만 우리에게는 영웅의 이미지로 남아있습니다. 이반일리치는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뒤늦게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 주목하자고 말합니다. 에피메테우스의 아내가 바로 판도라인데, 제가 어릴 때 읽은 동화책 속의 삽화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상자 속에서 검은 안개가 펼쳐져있고 제일 아래에 반짝거리는 노란 구체가 그려져 있었는데 바로‘희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얼핏 생각해보면 ‘검은 안개’로 표현된 온갖 재앙과 고통을 잘 견디면 마지막에는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기 전 상태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일요일 아침에 ‘한 지붕 세가족’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단칸방에 세 들어사는 순돌이 아빠는 가전제품을 수리하는 전파상을 운영했고 가게는 동네 남자 어른들의 사랑방 노릇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전파상이라는 가게 자체를 좀처럼 보기가 힘듭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가전제품을 수리해가면서 십년 이십년씩 쓴다는 생각을 안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집집마다 공기계 스마트폰 한두 대는 기본적으로 있을 테고 또 그만큼의 충전기와 배터리 각종 가전제품과 관련된 전선 뭉치들이 서랍을 채우고 있습니다. 왜 희망은 재앙과 함께 있을까요. 재앙을 견디면 희망이 오는 것이 아니라‘재앙’을 제거한 희망만 있는 상태란 없다고 ‘판도라의 상자’가 슬며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장자가 문명을 비판한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에서 원시 수렵사회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고 문명은 누리는 만큼 감당해야할 대가가 있음을 살펴보라는 것 같습니다. 홀쭉한 북극곰, 녹아서 거대한 얼음바위가 주저앉는 빙하 영상에 주목하면서 정작 정처 없는 우리의 마음이 문명의 결과라는 생각은 안하게 됩니다. 노력하면 더 잘살게 된다고 낙관할 수 없기에 막연한 미래를 부여잡을 수도 없고, 당장 오늘의 출구는 보이지 않으니 ‘화풀이 대상’을 찾아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 기력을 낭비하는 것은 아닌지. 내가 증오하는 상대가 ‘정처 없는 내 마음’이 빚어낸 망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 맹자의 문명

어느 사회를 두고 평등하다고 말할 때는 어떤 지점에서 평등한 것인지에 대한 상세 설명이 동반되어야 ‘평등함’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유가에서 인간이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선한 단초를 갖고 있다는 전제입니다. 유학에서 말하는 삶의 철학은 부부, 친구, 이웃, 부모처럼 비근한 데서 출발합니다. 인간이 사리사욕에서 벗어나 가까운 사람들의 뜻을 받들어 확충하여 상하좌우의 관계를 잘 살피는 것. 맹자가 예찬하는 문명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실천하면서 점차 확충하는 사회질서를 말합니다.

저는 인간에게 인(仁)이라는 단서가 있고 그것이 본성이라면 발현될 수 있도록 수신(修身)하면 그만이지 인정(仁政)이라는 것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세금을 경감하고, 형벌을 줄이는 인정(仁政)이 펼치기에 꽤 복잡한 시스템 같았고, 단초를 확충하기 위한 수신(修身)으로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신(修身)이 뭔지도 모르면서.

맹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계층을 없애는 평등을 말한 것이 아니라 정해진 자기 위치에서 성선(性善)이라는 단초를 확충하기 바랐던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허세 부리느라 분수에 넘치는 잔치를 벌이는 것은 흉이지만, 부자가 떡 벌어지게 며칠 동안 동네잔치를 벌이는 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부자가 곳간 문을 활짝 열어야 동네 사람들이 잘 먹고 거지들도 기름진 음식을 맛 볼 수 있으니까요. 인정(仁政)은 왕의 위치에서 선의 단초를 확충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맹자』에는 위민부모(爲民父母)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왕이 백성을 대하기를 부모처럼 하라는 뜻이지요. ‘ 부모가 얼고 굶주리며 형제와 처자가 떠나고 흩어지는 판에 물질적인 조건에 지배당하지 않는 항심(恒心)이라는 것이 있으니 수신(修身)하라’고 한다면 그 왕의 성선(性善)을 되묻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네요.

3.도덕적인 삶

이번 시간에는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도덕적인 행위를 하게 하는 가에 대해서 고민했고 그 답의 힌트를 맹자에게서 발견한 것 같습니다. 이 고민을 하기에 앞서 무엇을 도덕이라고 생각하는 지 스스로에게 되물어야할 것 같습니다. “당신은 도덕적인가”라는 질문으로 말입니다.

“나는 스스로를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이렇게 대답함으로써 비로소 제가 도덕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지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법보다는 완화된 규칙과 약속 정도로 도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고 약속과 규칙을 강제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지키게끔 습관화된 무엇. 딱 그 정도가 제가 생각하는 도덕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덕적인 삶에 대해서 숙고한 적도 없고 비도덕적인 기업가나 정치인들에 관한 뉴스를 들었을 때 발끈하거나, 가까운 사람 중에 비도덕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사람 별로네, 좀 거리를 두어야 겠다’라고 생각하는 정도였습니다.

붓다에게 윤리적인 삶이 지혜와 자비를 가지고 사는 것이라면 스피노자에게 윤리는 정념에 휩싸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서양의 도덕 철학은 당장 이익이 따르더라도 옳지 않은 것이라면 그 욕망을 억누를 수 있는 ‘이성’에 주목한다고 합니다. 반면 동양철학은 본성에 준거해서 사는 보편 도덕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성이나 논리가 부재한 반면 경험으로부터 사유를 구성하는 방식이 동양철학의 특징인데, 여기서 말하는 경험은 신체성을 중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요 부분이 엄청 중요한 것 같은데, 잘 모르겠고 일단 기억해둬서 강의 시간이나 책 읽을 때 더 주목해야할 것 같습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말했듯이 나에게 호의롭기만한 상황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자유로울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도덕이라고 한다면 제가 기존의 도덕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너무 단순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주 공통과제 -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고 프랑스아 줄리앙이 맹자의 도덕에서 끄집어낸 어떤 부분이 흥미로운지, 논의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지, 맹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줄리앙의 생각에 동의가 안되는 부분에 대해서 써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맹자> 텍스트를 장악한 만큼 질문이 나오겠지요. 월요일부터 미리 조금씩 읽어두지 않으면 낭패를 겪을 듯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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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02 20:51
    그동안 미뤄왔던 숙제가 다가왔네요... 맹자와 장자를 기계적으로 비교하는 게 재밌기도 하고, 또 그 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게 답답하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어떻게든 둘을 '분석'하면서 같이 읽기를 시도해야겠네요. 물론, 마음처럼 되지는 않지만 ㅠㅜ 治가 어떤 행위들로 드러나는지, 둘의 윤리는 어떤 차원에서 성립하는지 등등 너무 많은 것들을 알아보고 넘어가야 합니다. 크... 화이팅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