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와 글쓰기

장자와 글쓰기 12월 1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9-11-25 15:41
조회
241
다음 주는 에세이 초고입니다. 연구실에서 진행하던 프로그램들의 마무리가 이제 코앞인데요. 어떤 프로그램을 봐도 다 쉽지 않아 보입니다. 끙끙대면서 에세이를 쓰는 모습은 프로그램을 불문하고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입니다. ㅋㅋㅋ 저희 프로그램이 비록 쇠퇴하고 토론보다 웃음이 가득하다고 할지라도 저희의 어려움은 저희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지가 많으니 힘내서 마지막까지 웃으며 에세이를 마무리하죠! ^_^

에세이에 대한 코멘트를 들으면서 맹자와 장자에 대해 새삼 놀랍다고 느끼게 된 것들이 있습니다. 각자 에세이와도 연관되니 몇 개만 정리해볼게요.

양생(養生)

우선 양생에 대한 맹자와 장자의 관점이 새삼 놀라웠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욕망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맹자는 사는 것과 의(義)를 실천하는 것을 선택하는 문제를 물고기 요리와 곰발바닥 요리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그러니까 물고기 요리보다는 곰발바닥 요리를 선택하듯이 구차하게 살기보다 ‘의’를 실천하는 것을 선택한다는 얘기인데요. 여기서 맹자는 둘 중 하나가 살기 위한 욕망이고 아닌지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물고기 요리를 먹거나 곰발바닥 요리를 먹는 것은 모두 자신의 욕망입니다. 구차하게 사는 것과 ‘의’를 실천하는 것도 모두 욕망입니다. 다만 맹자는 어느 행위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규정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죠. 따라서 양생, 삶을 문제 삼는 것은 곧 자신의 욕망을 질문하는 일입니다.

맹자 식의 양생은 곧 마음을 기르는 양심(養心)입니다. 그리고 ‘양심’은 자기 마음을 보존하는 존심(存心)과도 연관되죠. 그건 장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 제물론에도 꿈에서 마음이 내달리는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비판이 있었죠. 어떻게 양생이 양심, 존심의 문제와 연관될까요? 그리고 맹자는 ‘양심’을 위한 일환으로서 과욕(寡慾)을 제시했는데 이때 ‘과욕’은 금욕과 어떻게 다를까요? 그들은 욕망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 것에서 ‘양생’을 얘기했을까요? 채운쌤은 둘이 공통되게 혼자 즐기는 것, 사적(私的)으로 욕망이 작동하는 것을 경계했다고 하셨는데요. 사적으로 작동하는 욕망과 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욕망은 무엇이 다를까요? 새삼 생각하려니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맹자의 여(與), 장자의 우정 등은 왜 제시될 수밖에 없었을지 은남쌤이 잘 풀어주시겠죠?

배움(), ()

맹자의 배움(學), 장자의 앎(知)에 대한 얘기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공부와 삶은 조금도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하는 이유와 자기 삶에 대한 비전이 조금도 다르지 않죠. 맹자는 공자를 사숙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고통 받던 천하를 문왕과 무왕, 주공이 구제했듯이, 공자는 주나라의 문화 회복을 통해 질서를 바로잡을 임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그의 자부심이었습니다. 맹자는 그런 공자를 이어서 자신에게도 하늘이 내린 임무가 있다고 생각했죠. 역사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모든 것이 공자와 맹자의 공부였습니다.

그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긴 했지만 그것은 단지 어떤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수단적 공부와 너무도 다릅니다. 그들의 공부는 자기 삶의 양식을 발명하는 것이었고 계속적인 자기수양의 과정이었습니다. 지금도 공부를 절실하게,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공자와 맹자처럼 공부하는 사람들은 정말 손에 꼽은 것 같습니다.

결여 없는 세계와 자족(自足)하는 삶

맹자와 장자가 그리는 세계는 조금의 결여도 생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쉽게 나에게 없는 것을 결여로 간주하고, 나에게 결여된 것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합니다. 그러나 맹자와 장자가 보기에는, 세계는 원래 모두 다릅니다. 양은 사자처럼 육식하기를 바라지 않고, 거미는 독수리처럼 날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자신의 타고남 이상을 바라거나 행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르기 때문에 평등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왜 인간만이 유독 불만족스럽게 살아갈까요? 똑같이 자연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만은 자신이 타고난 바탕에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요? 인간은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갑니다. 목표가 이뤄지지 못해서 불만족스러운 것 같은데, 정작 목표를 이루고도 여전히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도대체 어떤 원리가 여기에 있는 걸까요? 자족(自足)은 ‘스스로 만족하다’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저절로 만족스러워지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절로 만족스럽다’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만족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물질 같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장자는 이를 도(道)와 합치된 지인(至人), 진인(眞人) 등으로, 맹자는 선인(善人) 등으로 설명합니다. 그들이 그리는 모델들은 조금의 결여도 없이 살아갑니다. 그들은 ‘도’의 작용으로 돌아가는 이 세계에 어떤 결여도 없다는 것을 삶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뭘 하든 어떤 상황이든 항상 떳떳하고 유쾌하죠. 심지어 장자는 아내가 죽은 순간에도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한 삶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떻게 그들은 외부 상황이 어떠하든 항상 충만하게 살아갔을까요? 생각할수록 낯설고 멋있습니다.

맹자와 장자는 어떻게 읽어도 재밌는 책인 것 같습니다. 자유, 공부, 정치, 우정 등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얘기한 것 같습니다. 혹은 어떤 주제를 가지고 들어가도 맹자와 장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재미난 만남을 우리 스스로 걷어차지 않도록 에세이를 한줄 한줄 써 나가요~5ddb7915c73078245275.jpg5ddb791653dd83369175.jpg

오늘의 주인공도 은남쌤입니다. 상원이에게 은남쌤은 항상 너무 공부를 재밌게 하시는 철학하는 존경스러운 엄마입니다.
그러나 매주 일요일에는 한 주 걸러 울었다, 웃기를 반복하는 도반이죠. 두 가지 모습 중 무엇이 진실인지를 곧 밝혀지겠죠? ㅎㅎ
전체 1

  • 2019-11-26 17:06
    '철학맘' 은남쌤께서 가슴치며(?) 읽으시는 건 정옥샘의 글입니다. 벌써부터 술렁이는 에세이 기간인데 과연 당일은 어떻게 될지... 두렵습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