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이 아카이브

9.27 천일야화 강의 1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10-01 10:37
조회
110
-천일야화는 이야기


천일야화와 관련된 연구들은 주로 모티프 연구. 어떤 지역에서 동일하게 발견되는가. 문화권 형성. 그런 연구들은 참고할 필요가 없다. 이걸 우리가 어떻게 이슬람을 만나는 계기로? 각자의 질문 속에서 만나볼 것.

천일야화는 이야기. 이야기 속에서 반복되는 흥미로운 지점을 볼 것. 그리고 그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들(그리스 로마 신화, 서사시)와 차이점을 볼 것. 자기 머리로 생각해보기.

천일야화에 대해서는 쓸모있는 논문이 별로 없다. 천일야화를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맨 앞에서 봐야 할 인트로는?

천일야화는 어디의 이야기인가. 맨 앞에 나오는 이야기. 사산이라는 이름의 왕조가 있었다는. 그런데 뒤를 읽다보면 샤리아가 어떤 왕이냐고 나오냐면, 인도의 왕이라고 나온다. 이 글의 배경은 그럼 뭘까?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물론 중간중간 이슬람이지만 흑인들도 많이 나온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어느 지역의 사람들일까? 일관되지 않는 기이함. 그래서 이 이야기의 연원을 추적하다보면 만나게 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서양이 동양을 이미지화하는 데 있어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게 바로 천일야화.

그런데 서양이 생각하는 동양이란? 그 심상지리.

서양이 처음 동양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 동양은 중국, 일본. 하지만 서양인에게 일차적으로 동양은 이집트. 그 동양에 대한 이야기는 헤로도토스에 나온다. 서양이 어떻게 동양을 만나가기 시작했는가의 선두에 헤로도토스가 있다. 그런데 잘해봤자 소아시아와 이집트 지역을 갔다. 동양에 대한 표상이 이집트를 포함한다는 게 중요.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드로스가 동쪽으로 정벌하면서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웠다. 그 알렉산드리아는 다 없어지고 이집트에만 나왔다.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는 그 원정대에게 처음 맞닿는 동양이었다. 이집트부터 시작해서 터키, 이란, 인도까지 간다. 동양이라고 하는 건 이렇게 넓은 지역이다. 그리스인들은 자기들을 중심이라고 보고 외부를 바바리안이라고 보았다. 바바리안은 야만이라는 말 보다는 주변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런데 중세의 심상지리가 나오는데 플리니우스의 박물지. 중세 서유럽에서 경험하는 동식물 이외에 전설이라든가 자기들이 경험하지 못한 동식물에 대한 박물지. 거기에도 낯선 것들을 통한 동양의 이미지가 드러난다. 우리가 낯선 세계, 경험 못한 외부에 대해 어떤 이미지화를 할까?

우리가 이국성을 느끼는 것은 보지 못했던 산천. 중국을 가도 멋있긴 하지만 이국적이지는 않다. 라오스도 별로 이국적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이국적이라고 느끼는 곳은 아메리카 대륙 정도? 그런데 제일 이국적이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의상과 동식물. 우리에게 없는 동식물이 어딘가에 있다. 그걸 가지고 만들어진다. 타자는 언제나 이미지로 다가온다. 헤로도토스, 플리니우스, 그 다음에 이국에 대한 이미지가 또 서유럽 사람들에게 전해진 게 십자군 원정. 십자군이 정복하고 돌아오며 갖고 온 것이 바로 전염병과 이국에 대한 기억. 이슬람 관습에 대한 기억. 그 다음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동양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역사가 있다. 그 역사의 시작은 알렉산드로스. 아주 멀리 보면 그 이전에 헤로도토스가 있고. 가장 멀리 잡으면 헤로도토스, 기원전 5세기. 그 다음 알렉산드로스 기원전 3세기. 플리니우스는 기원 2세기. 접촉의 계기들이 몇번 있었고, 그 다음 동양에 대한 이미지들이 생겨난다.

동양에 진출하면서 이야기들이 수집되기 시작한다. 지금이야 구글이 있으니 낯설지 않은데, 이당시 사람들이 낯선 곳에 가면 먹고 입는 것이 신기하고 그것에 얽힌 전설들을 채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는 지식인들과 뮤지엄이 있던 곳. 일종의 도서관. 거기에 서양에서 가지고 온 책을 보관하면서 거기에 있는 언어들, 말을 배우도록 한다. 동식물 이름과 전설만큼 재밌고 쉬운 게 없는만큼 그런 것들을 채집하고 기록하게 된다. 그러면서 15세기 말 처음으로 이집트에서.

원래 천일야화는 인도에서 나온 이야기들. 아랍권에서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런데 배경은 페르시아. 그래서 중간에 보면 대인도의 여왕이라든가 갑자기 인도가 나온다. 페르시아 옆에 인도가 있다. 우리가 아닌 애들은 다 비슷하게 보이는 것과 똑같다. 우리도 서양애들이 보기에는 일본과 똑같은 애들. 동쪽의 이야기들을 채집해 오는데 이야기의 중심은 인도의 이야기들이 많다. 그 인도의 이야기들이 페르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것. 그러면서 확장되어 간다. 그러면서 이야기가 점점 더 아랍화 되어서 서양인들에 의해 전승, 전달되기 시작한다. 인도 쪽 이야기들이 서쪽으로 오면서 점저 바뀌고 카이로에 모이게 된다. 알렉산드로스가 일종의 문 같은 곳. 그렇게 해서 처음에 페르시아, 이집트에서 우리가 아는 첫번째 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천 개의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카이로에서 출판. 15세기.

이거는 알바 사람들이 자기들이 원형적으로 떠들던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기록하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천일야화 자체가 서양의 입장에서 그리스 문명 중심의 입장에서 인도까지 걸쳐진 이야기의 파편들을 서양이 모은 것. 아랍의 정수가 담겨 있다고 아랍인들이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프랑스어판,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판이 있는 천일야화. 우리나라도 버턴과 앙투안 버전이 번역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직접 아랍판을 번역한 건 없고, 사실 그런 번역은 별로 의미도 없다. 처음 이런 형태로 만든 것은 앙투안 갈랑이기 때문에. 열두권 버전으로 종합한 것. 아랍의 문학이라고 할 수 없는 천일야화. 그래서 번역의 문제가 천일야화에서는 거의 다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인도에서부터 페르시아를 걸쳐 이집트 북부에서 정리가 되었다. 최초의 판본은 아랍어로 쓰여진 카이로 버전이다. 그 버전의 원래 제목은 '천 개의 이야기'였다. 원래 여기 살던 애들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신기하지 않다. 그 이야기가 신기하다고 생각하던 서양인들에 의해 채집/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 천 개의 이야기가 천일야화가 되었나? 여러 설이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해 남은 일화중 그런 게 있다. 알렉산드로스가 원정을 하면서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해 '밤의 이야기꾼'을 불렀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밤의 이야기꾼을 불러다가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때 같이 원정을 간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았나 하는 설이 있다.

그런데 천일이 된 첫번째 설은 바로 미신. 짝수가 불길한 숫자였기 때문에 홀수로 만들었다. 짝수가 주는 불길함을 제거하려는 미신적인 힘이 있다.

또 하나는 천 자체가 무한. 중국에서는 아홉을 쓰면 많다는 의미. 아홉은 꽉 찬 수. 그런 것처럼 이들에게 천은 무한. 그 무한에 플러스 원. 무한에 플러스 원. 무한의 반복이라는 의미가 들어간다. 아랍권에서 천일야화에 대한 그런 전설이 있다. 천 개의 이야기를 다 알면 죽는다는. 무한에 하나 더.

아라비안 나이트라고 번역하면 아랍의 밤의 이야기라고 멋없이 직역한 것. 천일야화라는 말이 주는 것 만큼 상상력을 가하지 않는다. 이 책이 제목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니까 아랍을 배경으로 한 밤의 이야기라고 해서 '아라비안 나이트'라고 하면 멋없는 번역. 천일야화라고 번역을 처음 한 사람이 앙투안 갈랑. 플러스 일이 주는 느낌이 굉장히 다르다. 그럼 그게 뭘까? 보르헤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문학이란 영원한 과정이다. 그 영원한 과정으로서의 문학이란 결국 삶이다. 천일의 이야기, 무한한 이야기들이 사실 거기서 거기다. 읽다보면 어느순간 너무 지겹다. 등장인물이 바뀔 뿐 계속 같은 모험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 모험이 계속 바뀌는 구조. 그게 바로 삶.

니체가 그리스 신화를 해석하는 방식. 그리스인들에게 신들이란 뭐였을까?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해했던 것일까? 우리의 삶이란 신들의 유희. 니체의 말. 유희는 목적과 대립되는 말.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 유희란 목적과 결별한다. 인간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 대하는 태도와 결부된다. 자신의 행복에는 이유를 묻지 않지만 고통에 대해서는 이유를 묻는다. 하지만 니체의 주장, 삶은 유희이기 때문에 이유가 없다. 그리스인들은 삶이 고통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데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신들이 우리의 삶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그럼 재밌게 놀아주자. 이것이 그리스인들의 명랑성. 그리스인들에게 개체의 삶이란 유한. 필멸. 그런데 그런 필멸하는 개체의 삶은 불멸한다. 어떤 목적도 없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세계를 유희로 보았다. 이게 니체가 그리스인들에게서 본 것. 그래서 그들은 삶을 고통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명랑성을 잃지 않았다. 영원한 과정으로서의 문학이란?

보르헤스는 천일야화에 크게 매혹되었다. 특히 남미작가들이 천일야화에 크게 매혹되었던 것 같다. 그건 아마도 천일야화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번역되었기 떄문일지도. 모든 모험의 원형은 오뒷세이아. 그것이 서양에 있는 것이라면, 그 오뒷세이아와 견줄 수 있는게 천일야화 특히 신드밧드의 모험. 그런데 모험은 예기치 못한 일들을 겪는다는 것. 그리고 그 예기치 못한 일들을 겪는 게 바로 삶. 그 영원한 과정이라는 게 바로 무한한 반복. 그 무한한 반복 속에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품고 있고 그 이야기가 계속 다른 이야기를 낳는다. 반복과 증식. 그 삶을 보는 원형이 천일야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어의 표현. forever and a day. 그 영원성 자체의 고갈되지 않음. 끊임없는 과정성 자체를 보여주는 게 있다.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이 무한을 나타낸다. 그 무한을 나타내는 것. 천일야화의 이야기는 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반복과 증식이라는 점에서도 영원. 영원성의 의미는 늘 과정적인 의미. 증식과 반복과 차이. 천일 속에 아주 많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들어있다.

천 일 밤의 이야기.


-앙투안 갈랑


유럽인 최초로 천일야화를 번역한 사람. 원래 앙투안 갈랑의 판본은 281일간의 이야기. 버전이 항상 달랐다. 오랫동안 많이 읽었던 게 마르드뤼의 번역본. 가장 음탕한 버전.

이야기들은 어차피 하기 나름이기 때문에. 내가 전해들은 이야기의 상황을 어떻게 그럴듯하게 이야기 할 것인가. 그럴 때 갈랑 버전은 가장 품격 있는 버전. 그런데 다른 버전은 더 노골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천일야화는 하나가 있는 게 아니다. 천일야화는 번역이 누군가에 따라서 버전이 다 다르다. 누구의 번역인가 할 때 갈랑은 첫번째라는 것도 있고, 아랍어 버전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를 동행해서 원래 그 책 자신이 갖고 있는 버전에 없는 이야기를 껴넣었다. 알라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등 그런 유명한 이야기들이 동행한 무슬림이 들려준 이야기. 천일야화는 갈랑이 지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이야기가 몇 개 없는 것을 자기가 첨삭했으니까. 거기다 이게 캐논이 되었다. 17세기, 18세기 사람 갈랑. 과학과 합리성의 시대에서 낭만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시대. 로코코 시대. 가장 우아함의 극단인 시대.

이국성이 주는 에로틱함. 이국적인 것을 부각시켜야 하다. 그러다보니 인도, 이집트 이야기가 부각된다. 그래서 클레오파트라가 주는 이국성 자체를 높이 산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이야기가 뻥이 많다. 이집트라는 이국성, 그 다음에 페르시아라는 이국성. 그리고 금. 금 자체가 이국적이다. 서양에게 동양은 늘 금빛과 연관된다.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곳. 모르겐슈타트(아침의 나라)는 동쪽. 아침. 태양의 나라. 그 태양이 황금빛. 그리고 그 지역은 황금이 많다. 황금색이 동양의 이미지. 동양을 묘사할 때 한창 19세기 오리엔탈리즘이 유행할 때 금빛 장식으로 많이 묘사된다.

그 다음 의상에 대한 묘사. 그 다음에 언제나 이그조틱한 것이 불러 일으키는 묘한 환상. 인간의 성적인 것이란 늘 낯선 것과 결부된다. 낯선 것에 대한 환상. AV도 남미 것을 보면 더러움의 뉘앙스가 다르다.

왜 항상 식민지는 여성화되는가. 오리엔탈리즘의 공식. 모든 이국적인 것은 성적인 것을 불러 일으킨다. 성적인 것이 환상적인 것을 통해 불러일으켜지기 때문이다. 같은 나라 사람간이라도 이상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섹스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처럼. 여성과 남성에게 물어보면 집이 아닌 이상한 장소에서 하는 성행위에 대한 환상이 있다.

이때는 처음 이런 것을 맛보았기 때문에 이그조틱한 것에 대한 환상이 크다. 그런 묘사들이 천일야화에 모인다. 어떨 때 보면 그건 인도 물건, 어떨 떄 보면 그건 페르시아 물건. 그리고 흑인과 부정을 저지르는 왕비. 우리와 다른 것. 그러면서도 갈랑은 프랑스인들의 품격을 위해 최대한 맞춰 주느라 모든 성적인 묘사 제거. 장황항 묘사 제거. 그렇게 가장 읽기 좋으면서 이그조틱한 환상을 해치지 않는 번역을 했다는 게 갈랑 번역의 핵심. 18세기 초의 일.


-에드워드 윌리엄 레인의 번역


영국인.

19세기의 판본. 1801년부터 1876년. 그때 아랍에서 거꾸로 그런 번역들이 취합되고 증식된 버전들이 있었는데 그런 판본을 번역한 게 레인. 카이로에서 생활하고 아랍식으로 생활했던 사람. 백과사전식 번역. 꼼꼼하게 주를 달았다. 읽는 맛이 떨어졌다. 또 빅토리아 왕조의 영국인 관념이 있기 때문에 성표현에 대해 과감히 생략하고 재미없게 바꾸었다고 한다. 가령 '왕은 두 여자와 번갈아가면서 잤다'가 아니라 '왕은 두 여자에게 공평했다.'

우리가 읽는 모든 것은 번역을 통해 읽는다. 그런데 번역은 늘 번역자가 놓여 있는 시공간 맥락이 있다. 지금 내가 어떤 문화적 감수성을 가지고 어떤 언어를 가지고 있는가. 나의 정치적 성향과 도덕적 성향은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발터 벤야민, <번역자의 과제>. 번역자는 단순히 A라는 언어를 B라는 언어로 매개하는 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그걸 천일야화만큼 잘 보여주는 사람이 없다. 정치적 지평과 윤리적 지향성 속에서 어떤 어휘를 갖고 있는가를 봐야. 외국어를 배운다는 건 뉘앙스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뉘앙스를 많이 알아서 우리말로 번역하지 못하면 말짱 꽝. 나는 이 언어와 저 언어 사이에 있어야 한다. 언어의 소수성이란 A언어를 쓰거나 B언어를 쓰는 게 아니라 A와 B언어 사이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문학가는 번역가이기도 한다.

하루키의 번역. 아주 많은 일본의 최고의 소설가들은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언어에 대한 감수성이 굉장히 뛰어났다. 영어를 번역할 때 이게 어떤 일본어를 써야 가장 이 뉘앙스를 살릴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우리 말에 대한 감수성이 같이 따라주지 않으면 외국어를 잘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외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기(한문 포함) 한문 같은 경우는 더 많은 번역이 가능한 글자. 어떻게 어미를 번역하는가에 따라 뉘앙스가 너무나 달라진다. 번역을 하고 나면 우리말로 글을 쓸 때도 그냥 쓸 수 없게 된다. 배가 고프다고 쓸 것인가 아니면 다른 표현으로 쓸 것인가. 글을 쓰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거다. 뜻을 전달하는 게 아니다. 내 상황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느냐의 문제. 그러므로 니체에게 부호 하나하나가 모두 글쓰기. 내가 내 글의 호흡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그렇게까지 고민한다는 건 모두가 번역자여야 한다.

콜리지와 퀸시, 스탕달, 에드가 앨런 포. 갈랑의 번역을 예찬했던 문학가들. 번역에서 의미만 본 게 아니라 문장을 본 사람들. 하지만 보르헤스는 갈랑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바벨의 도서관에서 갈랑의 버전을 가져왔지만.

어쨌든 레인은 꼼꼼한 주가 특징. 하지만 보르헤스는 레인과 갈랑이 천일야화를 소독했다고 평. 그 정제되지 않은 구어를 정제된 유럽의 언어로 만들었다고.


-앙투안 갈랑 버전과 쌍벽을 이루는 리처드 버턴 버전


1821~1890년. 19세기 말 16권짜리로 출간. 갈랑과 레인의 천일야화를 가장 야만적인 색채를 복원하며 번역한 게 버턴. 지금은 버턴이 가장 많이 읽힌다.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읽힌 사람은 갈랑. 버턴은 아프간 사람처럼 변장하고 살기도 했고 온 나라를 여행했고, 카이로에서 의사로 살면서 관습을 많이 공부했다. 가장 많이 돌아다닌 사람. 이슬람 교도를 자처하기도 했고. 보르헤스는 버턴의 천일야화를 좋아한다. 버턴이 번역한 천일야화를 읽는다는 것은 흘러가는 아랍어를 읽는 것과 같다고 평.

영국인에게 읽히면서도 원래 이야기의 야만성을 어떻게 제거하지 않고 최대한 살려낼 것인가. 이런 것을 고민했던 버턴 버전. 무슬림의 관습에 대해 누구보다 꼼꼼한 주석을 달 수 있었다.

마르뒤르를 많이 읽다가 다시 갈랑을 많이 읽는다. 왜냐하면 마르뒤르 버전이 가져온 아랍에 대한 편견이 있기 때문에. '무슬림은 성적이다'라는. 가령 터키탕에 대한 환상. 퇴폐적으로 그려넣은 것. 이슬람 세계에 더해진 섹슈얼한 이미지. 그게 마르뒤르의 번역이 일조했다. 그 당시 그림을 찾아보면 온갖 나체 여인들이 이국적인 풍경 속에 그려져 있다. 서양에 없는 목욕탕, 흑인들, 이집트 등의 이미지로 소비하다보니 서양인에게는 이슬람에 대한 이미지가 19세기 내내 지속된 것.

그래서 서양인이 그런 번역을 많이 읽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하자 갈랑 버전이 많이 읽기 시작한다. 왜 이걸 번역했는가 보면 최초의 번역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18세기의 우아한 프랑스인을 만족시킨 품격있는 문체 때문에 이슬람인을 비하한 문장이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어떤 세계도 고스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역시.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표상할 때 우리나라 관광역서를 그린다. 그런데 전부 조선 처녀들이 기생옷을 입고 들판에 앉아 있는 모습. 관광엽서에는 그 여자들이 기생이라고 하나도 없다. 그런데 배경에는 한옥이 있고, 기생옷을 입은 여자. 그럼 그 이미지가 딱 보여주는 것은 조선은 기생의 나라. 거의 식민지가 섹슈얼한 이미지로 많이 결합이 되었다.

항상 타자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어서, 어떤 방식의 타자가 이루어지는가. 타자를 누구도 투명하게 만나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은 절대 투명하게 만나지 않는다.

남성들의 가부장, 섹슈얼한 환상에 대해 생각하게 된 책이 있다. 벨 훅스. <남자다움을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 남자들이 왜 그런식의 이상한 환상을 만들 수밖에 없는가? 가부장제는 억압이 아니라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바로 남성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남성이 어떻게 그런 남성성을 구현하고 사는가. 그걸 여성이 이해해야 한다. 타자를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 잘 드러나는 책. 남성 쪽에서 그런 식으로 여성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 없는 것. 우리가 어떤 문화를 만날 때도 투명하게 만나지 않는다. 우리도 서양에 대해, 동남아에 대해, 남미에 대해 갖는 이미지가 있다. 우리에게 남미는 서양이 아닌데 보르헤스는 자신을 서양인이라고 생각하고 서양인의 입장에서 갖는 천일야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남미는 정체성을 따지자면 서양. 그럼 우리는? 우리는 우리 것을 바라볼 때 뭐하고 동일시해서 바라보는가? 우리에게 아랍은 너무 먼제, 보르헤스가 볼 때 천일야화는 '동양문학의 정수'. 그럼 우리의 심상지리는 무엇인가? 그 밖의 세계에 대해 우리가 갖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19세기 조선인이 가졌던 심상지리와도 또 다를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경계는 뭘까? 우리는 미국과 더 가깝나? 아니면 북한과 더 가깝나? 우리는 뭘로 경계를 짓고 있는 것일까? 자기 의식이 어떻게 심상지리를 그리고 있는가를 계속 점검하며 봐야 한다.

오뒷세이아가 더 낯선가 천일야화가 더 낯선가? 뭘 읽을 때 더 낯설다고 느끼는가? 이걸 질문하며 읽지 않으면 모든 이야기는 다 비슷하다. 이야기의 모티프, 형식 사실 다 비슷하다. 모든 책은 분열적인 시선 없이 읽지 않으면 스토리와 교훈만 남는다.


-이야기


옛날 이야기의 특징. 분절이 가능하다 전체가 없이 부분만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작가가 플롯을 가지고 풀지 않기 때문에 당연하다. 삼국지는 역사적인 이야기에 플러스한 것. 하지만 천일야화에는 역사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이야기의 시작은 '옛날에'다. 페르시아나 사산조라고 하지만 그 시공간이 인물을 규정하는 힘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역사성의 탈각. 그래서 반복되는 영원한 삶. 하루를 살 때마다 하는 이야기는 반복. 그건 하루치의 삶. 하루의 삶이란 하루의 이야기. 누군가를 만나고 무엇인가를 겪고, 그게 하루의 이야기. 그럼 거기서 질문을 할 수 있다. 이야기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야기를 근대 소설적 개념으로 환원하다보니 플롯 개념을 가지고 생각을 한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 그런데 삶이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게 아니다. 뭔가를 겪는다는 것은 시작도 끝도 없다. 그리고 다시 비슷하게 시작되고 반복된다. 그런데 중요한 건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게 계속되는 것. 영원 플러스 일. 거기다가 거기 안에서 주인공A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고 등등 모든 등장하는 것이 나름대로의 사연을 갖는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갖는 증식구조. 그러니까 도대체 이야기가 무엇인가? 그건 시작과 끝을 갖는 플롯 구조가 아니다. 비슷비슷한 것이 갖는 반복 안에서 스토리를 갖는다.

스토리는 문학이라는 제도로 환원되지 않는다. 문학의 질료로서의 이야기를 천일야화는 보여준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명을 연장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이를 밴다. 하루하루가 지나간다는 건 하루하루의 이야기를 사는 것이다. 우리가 하루를 산다는 것은? 남는 건 삶이 아니라 삶을 어떻게 기억하느냐. 즉 이야기. 셰에라자드가 하고 있는 것은 결국 기억. 왕비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사는 것.

셰에라자드는 뭘까. 이야기꾼으로서의 셰에라자드. 여기서 이야기꾼이라는 존재가 중요해진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오뒷세이아도 호메로스가 지은 것이 아니다. 그 방대한 이야기는 호메로스가 플롯 짜서 전개한 게 아니다. 떠돌던 이야기 부분만을 낭송하던 시인. 그런데 '호메로스 문제'. 개인인가 집단인가. 트로이 전쟁과 연관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자들=호메로스. 호메로스를 보통 눈 먼 자로 묘사한다. 눈이 멀었다고 하는 것은 뭘까. 그는 보지 못하는 대신 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자. 기억한다는 것은 듣는 것과 연관된다. 항상 청각이 기억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듣는 것을 특화한다는 것이 눈멀었다는 특징을 특화한다. 그리고 떠도는 자. 즉 모험하는 자이자 새로운 자들을 계속해서 만나면서 새로운 시공간에서 그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자.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대신 전하는 자. 헤로도토스도 사실 이야기꾼. 이야기의 본질은 타인의 생을 기억하는 자.

이야기로서의 문학. 전설의 형태, 신화의 형태, 뒷담화의 형태는 왜 사라지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는 이야기를 할 때 물론 자기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가 가능할 때는 자기 삶을 타자화 할 때. 자기 삶을 타자화 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남 얘기로 만들 때 이야기로 나온다. 어떤 것을 이야기로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건이 상처로 기억되지 않을 때 가능할 것. 그때 이야기는 삶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

이야기는 내가 어떤 것을 겪었고 슬펐다는 게 아니다. 이런 것을 겪었다는 게 끝이다. 천일야화에 나온 사람들이 얼마나 억울하고 슬펐는지 나오지 않는다. 내면이 없다. 그리고 시공간이 특정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배경을 바꿔가며 계속 전승될 수 있었다. 페르시아 이야기가 아랍화 되고 인도 이야기가 페르시아로 전해지고. 시공간을 바꾸면서 끊임없이 이야기 자체가 반복되고 업그레이드 될 수 있다. 이야기 자체는 뭔가를 겪고 그것을 객관화 할 수 있는 자가 그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렇기 떄문에 이야기 자체가 치유다. 왜냐하면 그런 것 자체가 치유이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 것은 모두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주로 배신 이야기. 어떤 방식으로든 겪고 그 뒷 얘기는 모른다. 그런데 그 뒷 얘기는 모르는데 그 다음날의 이야기가 그 비슷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일어나는 일들의 연속. 이야기의 끝이 바로 삶의 끝이다. 이야기가 끝나면 죽는다는 게 셰에라자드 개인의 목숨이 아니라 이야기의 끝이 삶의 끝이다. 누구도 한때 살았던 자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바로 이야기의 끝. 오로지 누군가가 기억하고 있는 동안만 생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야기의 끝은 세계의 끝. 불교에서도 하는 말. 세계란 기억이다. 세계가 있어서 사람들이 각각의 방식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다. 세계란 곧 기억이다. 특정한 방식의 기억이 세계를 출현시킨다. 오뒷세이아가 출현시키는 세계. 페넬로페가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끊임없이 수의를 짓다가 다시 풀어낸다. 아직 수의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계속 오뒷세우스의 모험이 이어진다. 수의는 중요한 상징. 왜 페넬로페는 수의를 짓고 있을까. 오뒷세우스가 돌아왔을 때 기다리는 것은 죽음. 그렇게 모진 고생을 하고 귀향을 했을 때 고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편안함이 아니라는 게 오뒷세이아의 핵심과 반전. 기다리는 것은 전쟁. 오뒷세이아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모험 자체가 나를 살게 한다는 역설. 인간들은 편안하면 좋겠고 최소한만을 겪으면 좋겠고 모험의 끝이 편안함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인식을 뒤집는 게 천일야화.

여행은 우리를 병들게 하고 삶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 병들지 않는 여행/삶이 따로 있지 않는다. 모든 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런 게 있는 그대로 느껴질 때 삶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이지 피곤하지 않는게 따로 있다고 생각할 때 긍정할 수 없다. 천일야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죄다 힘든 사람들.

그리고 천일야화에는 정령들이 나온다. 보르헤스가 해석한 정령. 툭하면 정령이 나오고 마법이 나오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다짜고짜 나와서 세상 억울하게 만든다. 세상은 우리 상식으로 인과가 펼쳐지지 않는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이건 신의 뜻으로 나온다. 내가 설명할 수 없는 인과가 너무나 많다. 우리같은 유한한 존재가 따져 물을 수 있는 인과가 아니다. 인간의 알음알이를 가지고 설명하기를 포기할 때, 그리스인에게 신이 옆을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근대인들에게 주는 고대 서사의 겸허함. 뭔가를 공부하다보면 오만해진다. 그러면 그걸 가지고 뭘 설명할 수 있는 척 한다. 하지만 내가 설명할 수 있게끔 일이 된 적은 없다. 그걸 알기 시작하면 인간이 삶에 대해 덜 오만해진다. 그런 방식으로 앞으로 모든 일이 일어날 것. 내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을 때 정신을 차려야 한다. 설명할 수 없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다는 걸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알게되는 지점에서 인간은 종교를 찾거나 또다른 앎을 향해 간다. 인간이 자기 자리에 머물지 않을 때는 인과로 설명하기를 포기할 때.

천일야화에서는 마법으로 설명한다. 푸코, 근대 이전의 지식 형식은 마법이었다. 마법이 지식이었다는 것. 우린 앎을 원료를 따져서 사물을 파악한다. 그런데 16세기까지의 지식은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가 보기에 세상 모든 사물은 다 다르다. 그런데 16세기 관점에서 보면 그건 아는 게 아니다. 안다는 것은 다 다르게 보이는 것이 닮았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게 마법. 세상 모든 것은 고립된 채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의 별간의 연관성이 우리 인체의 연관성과도 엮어 있다. 그걸 아는 자가 아는 자다. 그리고 그것이 마법. 어떤 게 더 올바른 앎인가가 아니라, 안다고 하는 게 다 다르다. 그럼 내가 나를 안다는 건 뭘 안다는 것일까?

삶을 바라보는 다른 어법과 태도가 천일야화에도 있다. 셰에라자드가 계속 매일 연명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삶을 연명하고 있는 것은 술탄이 아닐까. 셰에라자드는 기억하는 자. 그녀가 술탄의 목숨을 쥐고 있는 게 아닐까. 술탄은 자신의 불행을 자기 스스로 이야기화 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 분노에서 이 사람이 하는 것은 자신과 잔 여자는 모두 죽이겠다는 것. 자신의 삶을 조금도 이야기 화 할 수 없는 자.

우리는 나와 비슷한 일을 겪는 아주 많은 사람들 중 하나. 나만 겪는 일은 없다. 가장 유아적인 사람은 자기만 겪는다고 슬퍼하는 자. 자기만 겪는다고 기뻐하는 자가 가장 유아적인 자. 그러니까 술탄은 가장 유아적인 자. 그런데 셰에라자드와 총명한 동생은 이야기를 듣고 그걸 풀어낼 수 있는 자. 자신이 겪는 것을 자신의 감정 속에 가두지 않을 수 있는 자. 그럼 왕과 왕비 중 누가 더 강자인가?

셰에라자드는 결국 임신할 수 있었다. 반면 술탄은 누군가를 죽이면서 살아야 했다. 누군가를 죽이는 건 자신을 죽이는 것. 그걸 셰에라자드는 그 죽음을 멈춰주었다. 그래서 문학은 치유일 수 있다. 술탄은 이야기 없이 살 수 없다. 술탄은 그 시간을 겪어야 자신이 아내의 부정을 겪고 처녀를 죽이는 과정에 대해 객관화할 수 있게 될 것. 나의 삶은 무수한 삶들 가운데 하나일 뿐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삶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인과가 있다. 그것을 천일야화는 마술이라고 한다.

남미소설의 특징은 마술적 리얼리즘. 남미의 독특한 신화적 세계가 있다. 그들에게는 시간의 통일성이 없고 공간의 통일성도 없다. 그러므로 서양 사람들이 그걸 읽으면 마술적이라는 말밖에 붙일 게 없다. 그런데 남미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이 겪는 시간인 것. 그들이 천일야화를 보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인간이 겪는 사건에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마법일 뿐.

버턴은 35개국어를 했다고 한다. 자기가 돌아다닌 온갖 지역의 언어를 익혔다. 꿈을 다언어로 익힌 사람. 그게 들뢰즈가 말한 분열증. 우리는 계속 하나의 언어 속에서 하나의 감정, 하나의 스토리 라인 속에서 모든 사건들을 영토화 해버린다. 그런데 언어를 벗어난다는 것. 들뢰즈가 글을 쓴다는 것을 모국어를 더듬거리게 한다고 말했다. 하나의 언어에 영토화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자~

이야기의 끝, 삶의 끝이란 뭘까.

우주의 어떤 존재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그 사람이 위대해서 기억되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는 사람에 의해 기억되는 것.


-호기심


왜 사람들은 남얘기에 관심이 많을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을 끌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남 얘기만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그리고 제일 이야기하기 쉬운 인물이 대상화된 인물. 지금은 그걸 연예인이 담당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자기를 노출하면서 자기를 이야기의 재료로 만들기를 바라는 존재, 연예인과 정치인. 왜냐하면 자기의 이야기를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소설가들이 자기 얘기를 쓰지 않더라도 결국 자기 얘기를 쓴다. 하루키. 소설가들에게는 인칭이 중요하다. 3인칭으로 쓰면 1인칭으로 쓸 때의 효과를 보기 어렵다. 소녀의 1인칭을 하루키가 쓴다면? 하루키. 1인칭으로 쓸 때 특별히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라고 주어를 쓰는 순간 소녀의 말투가 나오고 그것을 소녀의 말투라고 생각한다. 그게 이야기꾼.

그런데 우리는 언어가 다양하지 않기 떄문에 자기에 갇혀서 다르게 언어화 하지 못한다. 공부를 한다는 건 다른 어휘로 세상을 보는 것. '슬프다'에 해당되는 다양한 어휘를 안다면 '슬프다'라는 언어로 감정을 고착시키지 못할 것. 그러므로 문학은 한발짝 건너서 자신을 보는 것. 그게 문학의 구원.


내면세계가 없는 고대 이야기. 원한과 복수의 매커니즘이 없다. 복수하겠다고 하면 하는 것. 그런데 그렇게 복수하는 것에 대해 특별히 자의식이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내면 없는 세계라는 것이 중요하다. 내면이 발생하는 세계는 근대소설에 가야 나온다. 그게 오히려 훨씬 낯설다. 우리는 왜 뭔가를 행동하기 전에 끊임없이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원한과 자기 정당성을 만들고 행동하는 것일까?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당연함이 낯설게 보이는 것이 천일야화의 세계.


-정령


정령은 분명 물질적이다. 이즈쓰 도시히코는 잠깐 정령과 요정에 대해 말했다. 그런데 특히나 아랍 쪽에서 많이 나왔다. 중국 쪽에 오면 천인. 어쩄든 이 세계에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천사와는 다르고, 이 세계에 있는 물질성을 가지고 있다. 램프의 요정 같은 경우도 연기로 드러난다. 언제나 형태를 가지고 나온다. 모든 동식물은 다 자기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동식물과 인간 사이의 경계가 없다. 이런 건 고대 신화의 흔적. 그리스에도 없는 건 아니다. 거기에서는 특별할 게 없는 이야기. 하지만 좀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정령이 하는 역할.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신들이 하는 역할. 중세문학에서 천사가 하는 역할. 천일야화에 정령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런 것을 분석하고 비교해본다면 뭔가가 있을 수 있다.


다음 시간부터는 요소들을 분석해보기. 인물이 행위할 때의 기준. 정령의 존재론적 특징. 여성을 그리는 방식. 자매들이 반복적으로 밤을 이르는 방식. 부부관계. 사랑. 최고의 작품,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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