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이 아카이브

10.4 천일야화 강의2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10-09 17:19
조회
109
상인
상인은 세일즈맨. 돌아다니는 사람. 장사의 본질은 내가 없는 걸 교환한다는 게 아니다. 모험 같은 것을 봐도,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얻으려고 하는 건 생필품이 아니다. 향신료 같은 사치품. 인간은 물론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장사를 하고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은 내가 여기서 볼 수 없는 진귀한 것들. 그럼 그 진귀한 것들을 얻으려면 무릅쓰고 어딘가를 가야 한다. 이게 장사의 본질.
거기다 장사는 이문을 남는 것. 서로 갖고 있는 것을 교환하는 건 없다. 여기 없는 것을 가져와 팔아야 한다. 이전에 보따리 장수가 온다. 일명 미제 아줌마. 아줌마가 보따리를 펼친다. 그럼 거기에는 미제 물건부터 시작해 온갖 물건들이 있다. 보부상이 그런 것. 장사를 한다는 건 아주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는 게 아니다. 인간의 행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지갑을 열게 하는 것은 흔하게 볼 수 있는 생필품이 아니다. 흔하게 볼 수 없는 어떤 것에 기꺼이 돈을 쓴다. 그게 이문. 우리가 눈독을 들이는 건 볼 수 없던 물건너 물건들. 장사치들은 먼 길을 왔다갔다 할 때 다 낙타 타고 배를 타고 왔다갔다 하면서 귀중한 것, 희소가치가 있는 것을 판다.
지금도 유물 남아 있는 것 보면 생필품이 아니라 보석이 남아 있다. 인간은 무용한 것에 끌린다. 이야기 자체도 마찬가지. 우리에게 흔한 것을 들여오면 신기해 하지 않는다. 인간을 매혹하는 건 뭘까. 옆집 얘기가 아니다. 내가 안 가 본 나라 이야기.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인간에게 있다. 자기가 안 해 본 것일수록 그것에 대한 환상이 어마어마하다. 결혼을 해서 살면 혼자 사는 것에 대한 환상이 어마어마하다. 갖지 않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매력과 소유. 그래서 장사라는 건 사라지지 않는다. 먼 곳의 물건, 본 적 없는 색깔, 맛본 적 없는 감각. 모험, 상인을 말할 때도 이런 이야기가 옛 이야기에 남아있고 반복된다면 인간의 무의식과 연관될 것. 인간은 왜 이런 것에 매혹될까?
인간에 대한 질문을 해야 철학적으로 사유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질문을 통해 타자들에 대한 질문이 만들어진다. 상인이든 사랑이든. 질문해 볼 것.
이들이 유독 부정을 참지 못한다는 건 뭘까? 아내의 부정 때문에 시작된 이야기. 사과 세 개도 마찬가지. 이들은 부정이라는 걸 뭐라고 생각할까? 이런 질문을 가지고 글을 읽다보면 다른 구절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그런 얘기들 하나하나를 인간을 이해하는 통로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천일야화를 읽고 인간이란 이런 존재가 아닐까. 이렇게 도달하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 그게 사유의 깊이이고 삶의 깊이.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
공부: 진귀한 물건을 구해서 이걸 어떻게 구했는가를 이야기하는 장사와 비슷.

신드바드
신드바드 이야기는 버턴 버전에 없다. 유명한 일화지만 앙투안 갈랑 버전에밖에 없다. 신드바드가 매번 죽을 고생을 하고 갔다 와서 편안해지면 다시는 안 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도 또 가고 싶어진다. 이걸 일곱 번 반복한다. 이 반복은 뭘까? 우리는 이걸 가지고 뭘 생각할 수 있을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폐착 내지 전도는? 안정된 삶을 살면 좋을 거 같다는 것. 나에게 충분하게 살 수 있는 금은보화가 있을 때. 신드바드는 충분히 많은 금은보화를 가지고 와서 부자가 된다. 그런데 그 부자가 된 신드바드는 아이러니하게도 만족할 수 없다. 다시는 그 끔찍한 고생을 하고싶지 않을 거 같은데, 인간은 안정보다는 죽을 고생에 더 끌린다. 이걸 이해해야 우리가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다. 뭐가 힘들고 일이 많으면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 하는데, 하루도 못 견딘다. 인간이 가장 취약한 것이 바로 권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주 쉽게 권태로움을 느낀다. 사랑할 때는 설레고 떨리고 너무 좋지만 그건 1년을 못 간다. 연인 사이에도 마찬가지. 떨림과 설렘이 1년 내내 갈 수 있는 관계는 없다. 지겨워진다. 인간의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들쑥날쑥 한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매혹할 수 있는 다른 무기가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얼굴과 몸매를 본다. 하지만 그건 100일 이상 못 간다. 그건 진리. 내가 사람들을 매혹할 수 있는 독특한 아우라가 없으면 금방 싫증난다.
여자가 못생겼다고 남자가 바람피우는 게 절대 아니다. 어떤 경우에 바람을 피느냐, 새로운 매력이 하나도 없을 때. 그건 너무 당연하다. 남자든 여자든. 그 독특한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독특한 정신성, 힘이 있어야 한다. 어펙트. 사람한테 끊임없이 약간의 긴장감을 유발시킬 수 있는 그 사람의 독특한 게 있다. 그게 없으면 안 된다. 자기중심이 없는 사람, 남편만 바라보는 사람. 배우자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 사람은 자기만 보는 사람을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자기가 계속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의 존재가 계속 변화해야만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다. 자기 존재가 변이되지 않는 건 아무것도 끌어당길 수 없다. 인력과 척력의 문제. 힘이 계속 상이하게 작동해야 한다는 건 존재의 중요한 지점.
권태. 그렇게 사랑해도 지겨워지는 순간이 너무 빨리 온다. 너무 바라던 일을 하게 되더라도 막상 그걸 하고 나면 권태롭다. 그건 법칙. 그게 어떤 걸 알려주는가. 계속해서 생명은 새로운 힘과 접속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차라리 나와 싸우는, 나를 계속 힘들게 하는 장소에서 힘들어해도 그게 살아가는 힘이 된다. 무조건적으로 우호적인 세계에서 인간은 더 살아갈 수 없다. 진화론이 보여주는 것.
도대체 신드바드는 왜 저 개고생의 길로 매번 다시 접어들까. 우리가 계속 생각하는 자본주의적 환상은 돈과 명예와 안락한 삶이 있고 고생한 삶이 있으면 전자를 당연히 택할 거 같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래서 신드바드를 보면, 그런 구절이 계속 반복이 된다.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해서 왔는데...
351쪽. 남은 삶을 바그다드에서 보내겠다고 생각했는데 한가한 생활이 따분하다. 이건 새로운 사람을 새로 만드는 문제. 계속 이 패턴의 반복. 바다라는 건 나를 계속 한시도 가만두지 않는 곳. 나는 왜 육지라는 안락한 곳에 있는데 왜 이내 지겨워질까. 우리 삶을 추동하는 힘은 대체 뭘까. 그건 나에게 우호적인 힘이 아니다. 우호적인 힘은 나에게 적대적인 힘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 세상에 우호/적대가 미리 나눠져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적대를 겪지 못하면 감사하지 못한다. 내가 힘든 순간에야 내가 누구와 친구구나, 내가 정말 누리고 있는 게 무엇이구나를 알게 된다. 잘 풀릴 때는 내가 잘해서 잘 풀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만해진다는 것. 이게 바로 인생이 주는 아이러니. 그리고 우리가 꿈꾸는 안락한 생활은 인간에게 맞지 않는다.
인간은 끊임없이 죽을 고생을 넘긴다. 신드바드는 그때마다 그래도 살 수 있을거야 하면서 살기 위한 노력을 한다. 그런 사람에게 꾀가 생겨난다. 인간의 성취감은 어려운 상황을 내가 어떻게 넘어가느냐를 통해 자기 존재감을 알게 된다.
중년의 안락한 사람이 자기 존재감을 못 느껴서 사랑을 갈구한다. 누가 사랑해주지 않더라도 자기 행위를 통해 자기 스스로의 존재감이 충만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자기 스스로의 존재감이 충만해지지 않는 경우라면 인간은 절대 자기 존재감을 충족할 수 없다.
자존심 없는 사람은 자기가 어떤 문턱마다 자기 힘으로 넘어가겠다는 독립심이 매번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 신드바드는 그렇지 않다. 어떻게든 거기서 나온다. 나오면 또 거기서 다른 죽을 고비가 넘어간다. 니체 말대로 인간은 육지를 꿈꾸면 안된다. 인간의 삶은 바다. 매 순간 신드바드가 겪는 모험이라는 것. 모험은 다른 게 아니다. 매번의 삶의 반복이 바로 모험인 것. 일상 자체가 삶과 죽음의 모험. 내가 뭔가를 하나 생각하게 되는 것도 이전의 생각이 죽는 과정이다. 저 살마에게서 오늘 또 힘을 내가 느끼게 되는 것 이것도 또 모험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생사의 문제가 바로 화두라는 것.
돌아온 신드바드가 하는 일은 하나.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대가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 그러면서 자기가 뭘 받는 게 아니라 자기 얘기를 한다. 남의 돈을 받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아니다.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신드바드의 존재. 사람들에게 그것을 베풀어 주는 것. 사람들은 그 남의 이야기를 통해 또 하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오디세이아를 보면 이야기꾼이 주인고이다. 가는 곳마다 오디세우스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우리의 문화는 이방인을 보면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배척하는데, 고대인은 이방인을 보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이 세계는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몹시 좋아한다. 존재가 존재에게 주는 선물이란 저 사람이 살아보지 못한 또 다른 삶을 들려주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통해 유한한 인간의 삶은 무한해진다.
들뢰즈. 예술작품은 유한하다. 그러나 그 유한한 예술작품이 인간을 무한한 세계로 실어 날라준다.
유한한 존재가 그 유한성을 넘어갈 수 있는 것은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뿐이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그 비슷한 상황을 처했을 때 생각이 달라진다. 삶 자체가 유한성 속에서 무한성을 구현하는 것.
인류는 이야기가 우리의 유한한 삶을 무한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았다. 이야기가 기억이라면 사유라는 건 관점. 유한한 관점 속에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는 인간이 철학을 통해 무한한 관점으로 간다. 스피노자는 철학을 통해 인간이 신의 관점으로 갈 수 있게 한다고 했다.
왕들도 이야기를 들으면 꼭 기록하라고 한다. 교훈이나 이익을 가져다주는 문제라서가 아니라. 신기한 이야기라서. 왜 이런 이야기를 꼭 기억해야 할까? 인간의 삶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뭘 상상해도 인간의 일이다.
세상이란 기대대로 되지 않는다. 이걸 어떻게 배울까. 자기 경험만으로 배울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는 모든 연령이 비슷. 20대가 50대가 살아보지 못한 상태로 갈 수도 있는 것. 나이에 따른 게 아니다.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역량에 있다. 그리고 그 역량은 내가 아니라 타자에게 있다. 타자에게 접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생각과 기억의 변주가 일어나고 결국 자기 자신이 내가 아니게 된다. 그러면서 어디를 가지 않더라도 제자리에서 유목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었으니, 거기를 가서 뭘 볼건가, 어떤 방식으로 타자와 접속하려 하는가 그만큼이 보인다. 카프카는 미국을 간 적 없지만 미국에 대해 썼다. 기행문 중에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땅에 대해 쓴 기행문도 많다. 그런 건 어떻게 가능할까? 간 사람들 못지 않게 거기를 가고 있는 어떤 것을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편안하다고 할 때가 위험할 때다. 워낙 어떤 일이 많고 보면 제발 아무 일 좀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바람이 온다. 그럴 때 인간은 뻘짓을 한다. 뻘짓은 일이 많을 때 하지 않는다. 편안할 때 뻘짓을 한다. 먹고살만할 때 이상한 짓을 한다. 먹고살기까지 힘든 과정에서는 서로 부부가 협력하지만 먹고살만해지면 서로 바람피우고 도박한다. 인생을 살다가 내가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 때 반드시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내가 뻘짓을 할 타이밍이 왔구나(!)
인간은 자기 삶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신드바드의 모험이 보여주는 것. 인간은 끊임없이 여기 없는 이야기를 원한다. 내 눈 앞의 금은보화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 있는 똥덩어리가 더 흥미로운 게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죽는다.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죽는. 그런데 한곳에 머물러 노동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지금 시대. 그래서 살기가 힘들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정착을 하고 살지 않았다. 전쟁이든 뭐든 이동이 많았다. 지금처럼 이동하기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모든 이야기꾼은 떠나는 자들과 연관된다. 사람들은 외부에서 오는 새로운 이미지가 아니면 별로 재밌어 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공부도 외부의 이야기다. 일상의 가치가 전부라고 생각하면 외부가 없다. 하지만 공부를 한다는 건 일상을 다르게 구성할 수 있는 생각을 만드는 것.
모험을 상인 같은 것과 연관시킬 게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 대해 질문할 것. 신드바드는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시간은 우리에게 의식되는 게 아니다. 끊임없는 권태 속에서 시간을 의식하게 되면 과거 현재 미래가 확연하게 보인다. 그러면서 지겨운 삶을 의식하게 된다. 그런데 뭔가를 하고 있을 때는 시간이란 과거 현재 미래 이런 식으로 확연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시간 자체가 뒤죽박죽이 되어 요동치는 것처럼 느껴지지. 신드바드에게는 권태의 시간과 모험의 시간이 있다. 이 두 시간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정직
기껏 시체 버려놓고 왜 자기가 죽였다고 하는가? 자신이 무마하려고 했으면 끝까지 해야 하는데 왜 자수하는가? 애초에 왜 버리는가? 이야기가 이상하다. 거짓으로 모면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의 자초지종을 말하고 또 사람들은 그걸 믿는다.
도대체 우리가 가짜뉴스냐 팩트냐 진실이냐 그런 것의 기준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픽션들을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는 조건은 뭘까? 우리는 증언이나 물증을 요구한다. 우리 근대인들은 어떤 것이 진실로 판명되기 위해 사람이나 물건 같은 물질적인 것을 진리의 근거로 들이댄다. 그런데 여기에는 진리의 근거랄 게 없다. 오로지 이야기.
이들에게 진리의 기준은 뭘까? 우리는 누구의 말을 믿고 안 믿고를 할 때 내가 진실의 판단기준을 뭐라고 생각할까? 내말의 진실의 판단기준은? 이들의 세계에게 판단기준으로 삼는 것은 같은가? 너무 다르다. 진실을 진실로 만드는 것은 뭘까.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가 진실이라는 걸 알면 그만. 더 많은 진실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행위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으로 따지지 않는다. 이야기들에는 근거가 딱히 없다. 그냥 자기가 맞다고 믿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 시대의 진실을 가르는 방식이 더 합리적이라고 말할 근거가 있나? 진실은 어디서 도출되는 것일까. 천일야화의 진실의 문제. 누가 죄인이고 누가 죄인이 아닌가.
진실이라는 것이 어떤 기준 속에서 구성되는가. 우리는 어떤 것을 기준으로 진실을 믿는다? 뭘 얘기해도 결국 다 다르다고 하는 것은 사유하지 않느 자들의 대표적인 수법. 생각을 미루어 나가면 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나태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다. 진실을 이야기하고 주고받는 방식이 얼마나 다른가 그 기준은 뭘까. 그건 철학적인 질문.
천일야화에는 원망의 매커니즘이 없다. 너 때문에 고생했다는 말이 없다. 나중에 오해가 다 풀린다. 신드바드도 마찬가지. 나중에 선장을 만나서 사연을 교환하면 다 풀린다. 딱히 내가 누구 때문에 고생했다는 기억이 그들을 사로잡지 않는다. 이야기가 그런 방식으로 된다는 것. 그런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는 나는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는가를 되물어 볼 것. 저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는 왜 이상할까. 내 생각의 베이스에는 뭐가 있을까. 이렇게 질문을 해야 한다.

이야기의 기술
그리스는 말의 시대. 그들은 논리를 로고스를 통해 소송하고 토론하는 말이 발달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재판이 굉장히 어설프다. 왕의 권력이라는 것도 강하다면 강한데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다. 왕의 권력이 어떤 정의에 기반한다 어쩌구가 없다. 왕이 시키면 어떻게든 한다. 하지만 왕이 이야기를 듣고 충분하게 설득되면 없었던 일이 된다. 그럼 이 세계의 정의란 뭘까. 여기서 작동하는 정의란 뭘까? 신적정의? 신이 정의를 담보하나?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원칙이란 대체 뭘까? 이런 건 우리가 메타적으로 끄집어내야 하는 문제. 이야기를 읽는 우리는 메타적인 입장에서 이들의 세계 질서를 만들어내는 원리는 뭘까를 생각해야. 그리스는 법적/제우스의 정의. 그리고 오랫동안 교회의 정의였다. 그런데 이슬람은? 이들의 정의란? 이들의 삶에 정의라는 기준은 있을까? 인간의 삶이 정의로워야 한다거나, 인간의 삶은 바른 방식으로 굴러가야 한다거나 하는 보편 도덕이 있을까? 있다면 끄집어내보고, 없다고 해도 무질서는 아니다. 그럼 이들의 행동 기준은 뭘까.
여성들
매혹적. 정숙하지 않다. 동시대 서양과 비교하면 성적으로 억압받았다고 할 건 전혀 없다. 남녀의 사랑과 배신을 그리는 방식. 굉장히 깔끔하다. 남자들이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 사랑은 매우 헌신적. 너무 헌신적으로 사랑하는데 배신 한번에 바로 목을 베는. 그럼 이 사랑의 스토리는 뭘까. 근대의 연애담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 그렇다고 해서 서양 중세 기사담과도 다르다. 여기서 드러나는 남녀관계는 뭘까. 부모자식의 관계는 뭘까. 이런 걸 하나하나씩 우리에게 없는 것을 질문해 볼 수 있다. 그런 것을 적어놨다가 에세이 때 써보도록.
상인들이 이윤을 추구하는 존재이긴 한데 그렇게 그려지지는 않는다는 점도 독특하다. 상인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과 더불어 난관을 헤쳐가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슬람 사회가 상인사회라고 할 때, 왜 강력한 공동체 결속을 필요로 했는가. 어디를 가도 서로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농민사회에서는 씨족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데 정착하고 살아가기에 분쟁이 훨씬 많다. 헤시오도스 서사시를 보면, 농경사회 시작과 동시에 분쟁에 대한 이야기. 그런데 상인은 훨씬 더 잘 베풀고, 사적 소유가 훨씬 없다. 다른 사람의 재산을 보호해주는 것도 드러난다. 상인이라는 계층은 자본주의의 상인과 전혀 다르다. 이슬람은 상인들의 종교인데 왜 그들은 강력한 사상과 공동체를 필요로 했을까. 그런 것을 질문해보기.
518-519쪽. 다시 신방에서 깨어난 신랑. 꿈인가? 현실인가? 읽는 독자들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이 지내왔던 현실이 훨씬 꿈보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인생이라는 게, 현실이라고 현실적인 이야기만, 꿈이라고 꿈같은 이야기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꿈과 현실이 기묘하게 착종되어 있다. 마치 겪는 10년을 꿈처럼 만들어버린다.
리처드 버턴
1885년 리처드 버턴의 서문. 버턴 자신은 자신의 번역에 대한 어떤 자부심을 갖는다.
앙투안 갈랑과 달리 운문을 살린 버전.
아라비안 나이트를 원래 모습 그대로 번역했다는 자부심. 새로 영어 합성어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천일야화를 동양의 보물이라고 일컫는다.
19~20세기 대대적으로 페르시아 미술전이 열렸다. 그떄 화가들은 그 새로운 형상에 쇼크를 받는다. 마티스도 그중 한명. 샤나메 같은 것은 주요한 페르시아 미술의 소재. 양탄자에 샤나메 이야기가 많다. 직물에도 많이 들어가고 천일야화도 많다.
함축이 별로 업는 버전이 갈랑 버전.
버턴 버전은 군더더기 없는 버전.
갈랑 쪽이 더 오리엔탈리즘의 이미지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미화와 낭만화.
떠도는 이야기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큰 차이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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