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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 이븐 칼둔 마지막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12-13 15:40
조회
170
일정


자기가 맡은 도시에 대한 여행기를 써도 괜찮을 것 같다. 여행기는 각자 생각해볼 것.

다음주는 전체 일정 공유하기.

여행을 하면서 생각이 많이 떠오른다. 공간이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그 공간의 스피리추얼리티를 받을 필요가 있다. 로렌스가 미국고전문학연구에서 모든 대지는 자신의 스피릿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스피릿은 인간의 정신성이 아니다. 오히려 氣와 비슷하다. 니체도 이븐 칼둔도 말한다. 철학이 가능한 지역을. 니체는 상징적 의미에서 철학은 온대가 아니라 한대에서 시작된다고(극단적기후) 하지만. 우리 신체를 안온하게 그냥 두지 않는 기후. 이븐 칼둔도 풍토가 미치는 영향을 말한다. 어떤 토지, 어떤 땅의 기운과 연관되느냐가 관념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중국에서도 초나라는 광기, 시 등 문학의 기원. 최고의 문학의 기원은 초나라. 그런데 철학은 북쪽. 제나라 근처. 중국 그 넓은 땅에도 어느 쪽이냐에 따라 문화가 다르다. 예술 같은 것은 소주, 항주. 어느 대지를 걷고 있느냐가 생각에 영향을 준다. 대지에 영이 있다. 걷다보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생각이 나를 찾아오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때 내가 뭘 만나고 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우리가 저녁에는 일정이 일찍 끝난다. 저녁은 일찍 먹고 6시 정도. 7시 이후 금식을 해보자. 특별한 날 빼고. 일주일에 한번정도 놀 때 빼고.

일주일에 5일은 세미나. 매일매일 밥 먹고 1시간씩 같이 읽을 수 있는 분량을 나누어 줄 예정. 책 한권 주문한 거 하나, <무함마드를 따라서> 그리고 몇가지 같이 읽으면 좋겠다 싶은 텍스트. 프레시안에 연재된 것, 유라시아 견문록이라는 글이 있다. 그게 그래도 꽤 나름대로 정보를 생각하고 엮은 것이다. 거기에 이슬람 혁명도 나온다. 몇 꼭지 정도. 이슬람 학자와의 대화도 읽을 예정. 일부 제본 예정. 무깟디마도 일부. 그래서 얇은 책 두권 정도가 될 예정.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읽고 같이 이야기하고. 그러면 계속 자기 주제를 환기하게 된다. 그리고 공간을 갈 때마다 다르게 된다. 한 달 동안 걸으면서 생각을 한다는 것이 뭔지 체험해보기. 그러면 2월달에 와서 생각을 하고 쓰기 좋을 것.


모든 글을 쓸 때 글의 출발점은 문제의식으로부터. 자기 흥미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호기심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호기심은 순수한 지적 호기심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순수한 지적 호기심을 밀고 나가려면 거대한 지적 탐사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무깟디마 같은 것도. 철학적으로 존재론을 뭐에서 출발하는가? 원자론이다. 존재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럼 이건 어디서 온 걸까? 그건 데모크리토스. 그런데 데모크리토트, 7,6세기 정도. 데모크리토스에서 시작되어 원자론 전통은 인도로까지 이어진다. 부처가 무엇이나 공하다고 하는 이유는 우리는 흩어질 예정이기 때문에. 원자의 문제가 정말 강하다. 원자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넓혀가면 된다. 지적 호기심이란 인간을 쉬지 않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런 방식으로 넓은 텍스트를 주파해서 쓰는 것도 좋다. 쉽지는 않지만.

그럴 게 아니라면, 문제는 뭐냐. 내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지금 나의 현재성. 우리는 그렇게 공부를 해야 한다. 이제 시대는 대중지성이 정말 되어야 한다. 지식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담론을 생산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 현재성에 대한 문제. 이건 자기 고민. 그런데 이 자기 고민은 자기 존재에 대한 감각이 고민과 만난다. 살아가는 데 아무런 뭐가 없다. 그럼 여기에 무슨 존재에 대한 고민이 있을까. 모든 문제의식은 존재에 대한 고민, 삶에 대한 고민과 연관되어 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책이 있다. 현실적인 것과 연관해서 읽기 쉬운 책. 이 책의 저자는 영국사람인데 영국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에피소드를 몇개 만든다. 영국 대학생도 패턴 3가지. 자거나, 고개를 처박고 뭘 하거나 아니면 뭘 먹는다고 한다. 자거나 뭘 계속 듣고. 왜 수업시간에 헤드폰을 끼냐고 물으면 시끄러워서 헤드폰을 낀다고 한다 한다. 음악소리는 제일 작게 하고 듣는다고 한다. 고요한 영국 청년들의 무기력. 10대와 20대에 나타나는 우울증적 무기력이 있다. 10대라고 하는 말은 거의 질병이다 라고 하는 말과 동격. 우리나라는 선진국이니 뭐니 하지만 자본주의를 더 일찍 겪은 만큼 병증이 일찍 나타나고 있다. 그 고유한 무기력은 뭔가. 자본주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작동하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얘네들은 정말 더하구나. 소비하는 것에서 얻는 쾌락이 아니고서는 어떤 쾌락도 구성할 수 없는 상태가 무능력으로 나타난다. 소비적 쾌락이 기묘하게 무기력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뭔가를 소비해서 만족을 느끼면 왜 그건 힘이 안되고 무기력으로 전환되는가? 우리의 무기력은 할 게 없다는 무기력이 아니다. 할 게 없다. 우리 부모가 너무 가난해서 할 게 없다는 차원의 문제와는 굉장히 다른 무기력이다. 뭔가를 소비하는 쾌락이 주는 무기력. 이걸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건화도 맨날 무기력을 말하고 있었고, 규창이도 공부가 좋은 것 같은 거 같긴 한데 좋아지진 않는다. 혜원이도 할만하니까 하지만 제일 재밌는 건 아니다. 재밌다고 하는 건 뭔가. 지루하지 않은 게 재밌는 건가? 영국 대학생에게 두 문장을 읽으라고 하면 하기 싫다고 한다 한다. 그리고 또박또박 발음하는 것을 못한다. 지금 애들도 책을 읽어보는 공부가 안 되어있다. 우리는 교실에 함꼐 모여서 책을 읽어보는 수업을 했다. 책을 함께 읽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안 한다. 소리를 통해 함꼐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소리는 혼자 독점하려고 하고. 모든 소리가 다 소음이다.

요즘 이어폰은 노이즈 캔슬러를 탑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걸 듣다보면 좀 이상하다. 우리는 이어폰을 끼고 들어도 밖의 소리가 다 들린다. 그런데 그건 소음을 줄여준다. 그러니까 실제로 소음 차단 기능을 하면 버스의 우웅 하는 소리가 다 차단된다. 처음에 그걸 들으면 음악에 훨씬 더 집중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런데 소음이 차단되는 것과 동시에 음악이 납작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안 쓰기 시작했다. 어떤 소리도 소음과 뒤얽혀 들려오는 소리다. 소음이란 다 열린 곳에서의 소리다. 책을 함께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읽는 건데 그 문화가 사라졌다. 그래서 대학생에게 두 문장을 읽으라고 하는데 그게 안된다. 그런 식의 우리의 신체성에 대한 문제. 내가 뭘 함께 나누는 문제. 이 우울증과 무기력은 뭐의 문제인가. 이건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문제다. 그리고 소시민적 문제. 주저함과 머뭇거림은 뭔가.

<생각 많은 둘째 언니>가 대학 나오며 대자보 쓴 것. 너희는 정말 즐거운가? 도서관에서 취직공부 하고 쌓아놓고 하는 건 정말 즐거운가? 노량진을 지나면서 볼 때마다 그들이 즐겁다고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서울대 아래 내려오면 고시촌이 있다. 신림 고시촌. 거기를 지나가 보면 고시원에 고시를 오래 한 애들부터 2,3년 한 애들까지 바글바글 하다. 거기를 지나가면, 좀비들의 도시 느낌이 든다. 그 고시촌에서 10년을 했는데 패스가 안되는 사람들은 거기서 노래방을 한다. 그 공간을 떠나지 못하는, 좀비가 된다. 지금은 고시/사시가 없어져서 그런데, 거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사회적 이슈가 되어서 특집기사로 다뤄진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강사가 되는 등, 고시 패스를 못했는데 학원 강사가 된다. 고시 패스 하면 그 다음부터는 고시를 내가 몇 년을 준비했다는 것 만큼 원한의 감정에 휩싸인다. 옛날에는 서울대 고시패스 한 사람 목록, 법대생 목록이 정말 잘 팔린다. 법대 졸업앨범은 언제나 팔리자마자 매진. 그게 마담뚜들이 한다. 이대 졸업앨범이랑. 그러니까 걔네들은 검사, 판사 위주로 높은 집안 여자애들과 연결된다. 제일 공부 못하는 애들이 변호사 된다. 그들은 자기가 공부하느라 버린 세월에 대해 뽕을 뽑는다. 우리는 사제에 대한 원한 심리가 아니다. 공부한 원한에 대한 심리다. 자기가 조소하는 삶을 자기가 박차버리지도 못한다. 자기를 계속 조롱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그게 이 시대의 냉소와 무기력.

인간이 혐오와 냉소와 조롱 속에 갇혀서 살아간다는 것은, 왜 살아야 하는 걸까. 이런 걸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이런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삶은 뭐가 있을까. 그렇지 않은 삶을 산다고 할 때 뭐가 두려운가. 결국 돈이다. 돈은 많고 하고 싶은대로 하는 기이한 꿈을 꾸게 되는 문제. 그래서 차라리 사기를 친다. 범죄고 그런 범죄가 점점 지능적이 되는 것. 인간이 무기력해지거나 범죄자가 되거나. 일 조금하고 돈 많이 벌겠다는 건 남 등처먹겠다는 거 아닌가.

이렇게 살지 말자고 공부하는 것. 공부를 안 하면 그 두 삶 말고는 없기 떄문에. 나와 동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는 게 내 업이기도 하다.

내 자식대 애들이 그런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는 게 내문제가 아니면 무슨 문제인가. 너희들은 너희의 기성세대나 동료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우리 안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욕망과 우리의 삶의 구도에서 나 또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있음이 느껴진다.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 혼자 잘 살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도 나와 업을 만들고 있다. 그 사람들의 삶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삶에서 어떤 존재의식을 느끼느냐가 내 존자의 문제. 내 존재를 얼마나 많은 연관성 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게 문제.

글을 쓸 때 아무거나 써도 되는데 그 문제가 나에게 왜 문제가 되고 있는지. 내 출발점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왜 영성이라든가 도라든가 공부 이런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웃지? 도대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어디 있는가? 우리가 말하는 현실이라는 게 다 자본으로 환원되지 현실의 다양함은 또 없다. 우리는 마법은 현실이라고 생각 안 한다. 그리고 또 자본주의에 대해서 거스르는 어떤 삶은 비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늘 현실을 부르짖는데 그 현실이라는 게 너무나 협소하게 자본의 힘으로 환원된다. 그러니까 그런 방식으로 협소화 하면서 너무나 많은 현실을 놓친다. 우리 자신의 리얼리티는 뭘까. 우리는 뭘 잊고 사는가? 어떻게 우리의 자연스러운 기의 흐름을 자본이 뚝뚝 끊어 버리는가. 자본은 기의 흐름과 관계 없다. 자본주의는 영성마저 자본화를 한다. 인간의 기의 에너지, 관계의 에너지를 다 차단한다. 그러면서 선분을 만들어 버린다. 사고방식도 짧게 잘라버린다. 우리의 관계 자체도 선분화 되어 버린다. 시간과 끝을 갖는. 계속해서 흘러가는 게 아니라. 굉장히 단편적이라는 것. 입체적이고 깊이 있고 이렇게 되지 못한다. 다양한 류의 만남 속에서 다양한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이런 다양한 문제의식.


선생님은 선생님의 근대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출발점이어야 한다. 근대적 가치가 나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고 어떤 강박을 만들어내는지를 봐야 한다. 이슬람이란 결국 영적 혁명. 서양의 자본에 의한 혁명이 아니다. 겉으로 표면적으로 보면 서양물질문명에 반하는 것. 나는 물질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생각해보기. 내가 세계에 대해 갖는 욕망은 그렇게 영적인가? 운동권이 가졌던 꿈이든 내가 나이들면서 갖게 된 삶에 대한 표상이든 아니면 내가 실제로 살아오면서 보여줬던 실천이든. 그게 영적이었나? 그게 우리가 비판하는 근대화를 우리 스스로 내면화하고 있다. 결국은 우리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면 자본을 다 부정하고 어디론가 가는 세계는 없다. 자본 안에서 어떻게 자본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는가? 그걸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한때 혁명을 꿈꿨는데 그 혁명은 무엇인가? 내가 꿈꾸는 혁명과 이란의 혁명은 같은 혁명인가? 어떤 혁명도 의의가 중요하지 않다. 모든 혁명은 실패한다. 혁명의 의의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혁명을 추동한 힘이 무엇이냐, 그 혁명이 어떻게 기억되느냐가 중요하다. 한때 어떤 혁명을 꿈꿨는데 그 혁명은 어떻게 실패했는지 생각해보기. 그리고 그때 사람은 뭘 하고 있는지도. 그 혁명의 꿈을 가지고 있는 애들이 다 권력 심장에 들어가 있다. 도대체 나에게 내 젊은 시절에 있었던 혁명이란 무엇인가. 그 가치는 뭐고 그 가치의 망상은 뭐였고. 나의 삶과 연관되어서 그렇지 않은 혁명이란 가능한가? 이렇게 봐야 혁명에 대해 내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우리는 다 우리의 관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관점이 계속 이동하는 과정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자기 문제의식 없이 글을 쓰려고 하면 안된다.


민호. 지난시간의 복제.  이게 왜 궁금한가? 고민할 게 딱 하나다. 너의 그 소시민적 근성. 모래알과도 같은. 내년에 니체를 정말 공부하겠다 그러면 너 자신과 맞서 싸울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니체를 안하느니만 못한다. 이게 좋은 거 같은데 현실은 어떻고 식의 태도를 취하지 말 것. 너의 미션은 하나. 사람들을 배고프지 않게 하는 것. 나머지는 존재에 대해 고민할 것.


역사서설에는 정말 많은 것이 있다. 무깟디마는 아예 제본해서 읽어야 한다. 이 책은 서론. 무깟디마는 7권인데 그중에서도 서론. 이 서론은 뭘 이야기하는가. 각론 들어가기 전에 문명이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문명의 역사. 이 책을 보면, 무깟디마가 독특한 게 뭐냐면, 문명을 구성하는 거대한 파편들, 패치워크처럼 구성하고 있다. 왕권을 구성하는 힘, 그 기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기술, 능력, 이 지역과 저 지역 사이의 관계, 섭생. 문명과 관련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문명을 형성하는 지평에 얼마나 다양한 것들이 놓여있는가를 서술하는 것이 무깟디마. 인간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심급이 없다. 정치 경제로 환원하지 않았다는 것. 인간의 지성과 지식은 어떻게 구성하는가의 문제. 역사를 철학의 지평으로 끌어올렸다. 인간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권력, 신체성, 왕조 등 거의 모든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지평에 대한 서술이 다 있다. 여기에 있는 것을 정리하더라도 많은 것이 보인다. 심지어 글쓰기.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보면, 무슬림 얘기가 많이 나온다. 캘리그래프. 서예. 이건 동양 문명 쪽에 있다.

페르시아 세밀화. 페르시아가 지금의 이란과 그 위의 몇 나라들. 거기가 페르시아어를 쓰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땅이다. 원래 그 스탄 들어가는 나라들이 모두 소련 영이었다. 그런데 소련이 망하고 걔네들이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소련이 지배력을 상실하자 무슬림으로 갔다. 박노자, 소련의 사회주의자라는 게 당에 복무하는, 사회주의자인데 마인드는 자본주의자인 사람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 사회주의자는 불교에 가깝다. 소련이 지배력을 상실하자 그들은 자본주의자가 아니라 무슬림이 되었다. 그쪽 문화 바로 아래가 인도. 인도하고 이슬람하고 또 중국이 문화가 굉장히 유사하다. 그림을 보다가 알게 된다. 예를 들면 캘리그래프. 서예란 글씨 자체를 하나의 예술적 차원으로 이끌어 올린 것.

세밀화는 중국의 산수화와 비슷하다. 칸칸이 나눠서 스토리를 보여주기도 한다.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칸에다 나눠서 스토리를 보여준다. 페르시아적 무늬. 그리고 공간을 나누는 방식은 중국회화와 비슷.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쓰는 것. 동양화는 전부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게 많다. 이건 서양 전통에 없다. 서양은 텍스트와 이미지가 대립한다고 보기 때문에. 이미지는 어떤 사물을 대신 나타내 주는 것. 글씨는 대신 나타내 주는 것이 아니다. 글씨는 언제나 2차원. 이미지는 사물을 대신하기에 3차원이라고 생각. 그들은 그림 전통 속에 둘을 함께 넣지 않는다. 서예 전통이 페르시아와 중국에 있다. 페르시아 서예가 중국으로, 중국의 작품이 페르시아로 많이 넘어갔다.

한문도 굉장히 시각적이다. 물론 그것은 뜻까지도 포함되어 있지만, 이들의 글자는 굉장히 시각적이다. 이런 것도 표현 자체가 다르긴 하지만 그림을 그려넣고 그림에서도 자연물과 인간을 같이 그리고 여기에 그것과 연관된 내용/코란의 구절을 쓴다. 우리도 그림 그릴 때 시를 쓰는데 그런 전통이 함께 있다.

이란의 대표적인 도자기. 페르시아는 식물 모티프가 많다. 같은 이슬람이라도 아랍에서는 식물/동물 문양을 경계한다. 가장 화려하게 식물/동물/짐승들의 문양을 디테일하게 그린 것은 페르시아만의 특징. 아라비아 반도로 가면 세밀화가 잘 없다. 그리고 도자기도 식물 모티프 문양이 전형적인 페르시아 문양. 기형이나 문양이 중국의 그릇과 닮아 있다. 희귀한 기형이라든가 블루. 이런 게 다 페르시아와 닮았다.

13,14세기, 원나라 시대. 중국의 주 하나를 차지하고 있을 만큼 왕성했던 시기. 문화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유사했다.

당시 페르시아 사람의 두상을 보면 불상과 비슷하다. 서역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하는 건 돈황석굴.

그러니까 중국-페르시아는 하나의 대륙이었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교류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너무나 고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연결고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중간에 유사점이 많이 발견된다.


삽화로 제일 많이 그려진 것을 보면 중국이랑 유사하다. 문명은 단 한번도 가만히 있었던 적이 없다. 언제나 뒤섞였다.

샤나메가 제일 많이 그려졌다. 그리고 복장을 보면 서양이 아니라 동양과 비슷. 그리고 암벽묘사를 봐도 동양의 서법과 비슷.


조로아스터교. 30만정도. 하루에 5번씩 불을 가지고 의식을 한다. 아마 피타고라스도 동방에 갔다. 피타고라스도 평생 순백의 옷을 입고 지냈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가 중국에 와서 된 것이 배화교. 그리고 또 인도 쪽으록 ㅏ면 다른 중교가 된다. 파키스탄 쪽에서는 조로아스터교를 파르시라고 하는데, 조로아스터교의 유적도 있다. 전형적인 배화교 사람들의 옷차림.


이란에도 모스크를 가면 모자이크가 많다. 비잔틴의 영향. 소피아 성당을 가면 모자이크를 반드시 확인하고 올 것. 모자이크는 미술사적으로 중요하고 들뢰즈가 중요하게 말한다. 유리조각으로 붙인 오돌도돌한 평면. 서양애들처럼 3차원인 척하는 공간을 만드는 게 아니라 빛이 들어오면 오돌도돌한 조각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빛을 반사하는데 그게 또 전체의 빛을 만든다. 그게 비잔틴 세계의 우주였다. 어떤 하나의 빛이 낱낱이 빛을 쪼여준다.


날개, 불 이런 것은 중력으로부터 날아오르는 성격. 왜 불을 숭배했을까.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인 뒤에 광배가 있는 것처럼, 가장 초월적 속성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불이기 때문에. 정신적 속성을 표현하는 데 물로 하지 않는다. 물은 항상 물질적이다. 그런데 불은 항상 타오른다. 중력을 거스른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얘기한 것도 그렇고, 니체의 생각은 불에 가깝다. 뜨거움. 상승의 느낌이 강하다. 그런데 동양 철학은 상승의 느낌은 아니다.


이란은 다른 이슬람 국가와는 다르게 표현의 자유가 굉장히 보장된 나라. 형상화 하는 것이 다채롭다고 해야 할까. 양탄자도 그렇고 도자기도 그렇고 페르시아 문화의 독특한 것에 속한다. 아라비아 자체가 문화가 다채롭지는 않다. 베두인은 척박하기 때문에(이븐 칼둔). 이슬람에서 모든 철학은 다 페르시아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이란이 엄청나게 위대한 문화였던 것. 가서 보면 자기가 연관해서 쓸 것도 생각해야 하지만 장소성과도 연관해보기.

이런 게 현세적인 것. 현세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도 모든 자연의 형상을 인간화한다. 그게 현세적인 것. 각종 문양이 발달한 그리스. 자연을 추상적 모티프로 만든 것. 그런 데가 현세적인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이집트만 해도 그런 게 없다. 피라미드 자체가 굉장히 추상적. 미술도 자연물이 별로 없다. 새, 들꽃, 풀 이런 자연의 모티프들이 많이 사용된 문명일수록 문화의 기질 자체가 현세적. 그런 특징이 있다. 이라크라든가, 아래 쪽으로 내려가면 좀 다를 것.

<천일야화> 역시. 물론 그건 서양 압장에서 굉장히 넓은 동양 지역에 대한 환상을 때려넣은 것인데, 화려한 문화는 아마 페르시아에서 왔을 것. 그 다음은 인도, 그 다음에는 중국.



지영

영성과 신체성. 일단 자신의 문제로부터 시작해보기. 영성에 왜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 영성에서 바로 출발하지 말기. 일단 섭생에 대해 정리해보기. 무슬림은 어떻게 먹고 살았는가. 이븐 칼둔은 왜 이렇게 섭생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가. 그 얘기만 자세히 얘기하다보면 거기에서 길이 생길 것. 우리가 욕망해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다. 섭생 자체가 욕망을 만든다. 신선들이 섭생을 달리하게 되니까 어떤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는 것. 어떤 것을 욕망해서 먹고 그렇지 않아서 안 먹고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신체성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서 이븐 칼둔을 잘 정리해보기. 서양 사람들은 주로 육식문화. 그 문화가 그들의 관념과 무관하지 않을 것. 그러면 이란은? 지금 우리는 뭘 주로 먹는가? 쌀을 먹는 사람과 고기를 먹는 사람은 다른 것. 뭘 먹느냐의 문제와 그곳의 문화. 이슬람의 섭생화 문화.

영성은 쓰다보면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 얽매이게 될 것.


건화

이슬람의 현세적 영성이라고 했는데, 어떤 상식을 깨주는 지점이 있다고 보는가? 현세에 대한 긍정을 말하려면, 이슬람에 이상주의가 있는지를 건드려야 할 것. 니체식으로 보면, 금욕적 이상주의가 현세에 대한 부정의 귀결. 그런데 이슬람에는 금욕적 이상주의가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해야 할 것. 이들의 사유 구도가 금욕적 이상주의로 향하는지를 따져야 할 것. 이상의 차원과 개체의 차원을 어떻게 볼 것인가. 생성하는 이 현세를 넘어가는 불변하는 세계에 대한 이상이 이들에게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가. 그런 것이 있기는 있는가. 기독교적 신과 이들이 말하는 알라는 같은 것인가. 아니면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긴 하는데 여기에는 이상주의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좀 더 파헤쳐봐야 하지만 핵심은 이상주의가 되어야 한다. 신이 아니라. 이즈쓰 도시히코가 보고자 하는 게 표면, 현상과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 그러니까 이슬람 철학에서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또다른 차원이라는 것이, 기독교 같은 경우도 신이라는 존재를 플라톤의 이데아와 연결시키는 것처럼 이슬람의 신도 그렇게 봐야 하는가. 모든 현세를 정초하는 기원인지. 그럼 당연히 그 기원이 이상이 된다.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방법 중 하나.

아니면 이슬람에서 신과 개체의 문제를 어떻게 중심에 놓고 따라가는가를 봐야 할 것. 이슬람에서는 현상과 그 배후를 어떻게 보는가. 신과 개체 사이의 심연을 어떤 방식으로 해소해야 하는가. 현상과 배후는 아예 다른 것인지. 잠재성과 현실처럼 함께 가는 것인지. 하나의 기준을 세워야 하기 떄문에 철학적으로 두 개의 관계를 정초해보기. 현상과 배후. 현상과 현상 너머. 신과 양태. 그걸 철학적으로 정리한 다음에 무깟디마를 보면 철학 얘기가 나온다. 이슬람의 철학. 이슬람의 철학과 이슬람의 정신과 신에 대한 문제가 쭉 나온다. 그 다음에 그런 것을 엮어서 풍부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들의 현세성 긍정이란 결론으로 나와야 하는 문제. 그럼 이들은? 현세성 긍정은 어떤 이상에 대한 꿈이 없어야 가능. 이들이 내세와 구원에 입각하려면 세상이 벌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그게 없다. 그럼 이들에게 구원이란 무엇인가? 이븐 칼둔+도시히코 <이슬람>


혜림

누가 이걸 통해 뭘 말하려고 하는가는 모른다. 우리는 이븐 칼둔이 아싸비야를 기술하고 있는 방식 속에서 그가 역사를 보는 관점에 어떤 새로움을 읽어낼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항상 메타적 독해를 해야 한다. 이븐 칼둔이 뭘 말하려고 하는지는 이븐 칼둔의 의도를 묻는 것. 이븐 칼둔은 아싸비야를 중시했다. 이전에 아싸비야라는 개념은 있었다. 아싸비야는 언제나 왕권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이븐 칼둔은 아싸비야는 왕권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왕권에 흡수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그렇게 읽어내야 가능한 것. 아싸비야를 가지고 권력을 설명하는 방식이 내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국가 형성 방식과 굉장히 새로운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보는 것. 아싸비야를 통해 내가 뭘 말하는가가 중요하지 이븐 칼둔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아싸비야가 이븐 칼둔이 국가 형성에 있어서 전야민의 부족 특징으로 들고 있는 것. 그런데 이게 국가 형성에 있어서 이걸 설명하는 방식이 굉장히 독특하다. 그런데 그 독특함은 우리가 읽어내야한다. 그런데 내가 읽어봤는데 아싸비야가 굉장히 독특한 게 안 보인다면 다른 걸 써야 한다. 아싸비야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느냐를 쓰는 게 아니라 이슬람 역사를 설명하는 데, 이븐 칼둔이 역사를 쓰는데 아싸비야라는 문제가 어떤 새로운 설명을 제공해 줄 수 있는가를 끄집어 내라는 것. 아싸비야란 이런 특징적인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고.

국가는 어떻게 형성되는가부터 물어야 할 것. 국가권력이란 뭐야. 이런 질문부터 해야 할 것. 아싸비야는 권력욕인가? 그런데 그건 아닌 거 같다면. 그래서 전쟁기계라는 개념도 말할 수 있는 것.

아싸비야의 특징을 알아봐야 소용이 없다. 아싸비야라는 개념이 무엇과 연관해서 의미있는가. 이렇게 봐야 한다. 국가 권력과 연관해서 아싸비야가 의미가 있는 건가? 이건 국가권력을 다르게 보게 해주나? 들뢰즈는 국가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권력욕의 축적으로 생겨난 게 아니라고 한다. 언제나 국가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힘들이 있다. 그런데 그 힘들이 국가를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계속 국가에 반하는 힘으로 국가를 위협하는 힘으로 남기도 한다. 전쟁기계라는 개념을 가지고 들뢰즈가 본 것: 국가는 모든 집단의 목적이 아니다. 그건 하나의 현실화된 결과다. 국가 외부에는 늘 국가를 위협하는 힘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아싸비야도 뭐와 연관해서 이 개념이 중요한지를 봐야한다. 개념의 맥락, 개념의 배치.

문명은 어떻게 성립되고 국가는 어떻게 성립되지? 이것들 속에서 전야민과 도회민의 차이를 봐야한다. 이것들이 어떤 관계를 만들기에 국가가 작동하지? 전체 맥락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의 텍스트에 중요한 개념이 있다. 그럼 그 개념의 특징이 뭔가가 아니라, 그 개념이 어떤 맥락 속에서 끌어들여오고 있는지? 이걸 질문해야 한다. 그럼 이슬람 국가는 지금 우리의 국가와 뭐가 다르지? 이븐 칼둔은 국가의 형성을 어떻게 보는가.


혜원

샤나메에서 선과 악이 중요한 게 아니다. 샤나메는 재밌는 게 그 평화로움을 못 견딘다. 세상에 선과 악이 주어진 게 아니다. 기독교에서 악이라는 건 선이 있기 때문에 선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반대급부이자 선을 증명하는 것. 그런데 샤나메에서는 선을 증명하는 것으로서의 악이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자기가 선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먼저 악이 있어야 한다. 도덕의 계보에서 설명하는 것. 너가 나빠야 내가 선하다. 선을 증명하려면 악을 가져와야 하는 것.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증명하지 못하는 것.

샤나메도 보면 잘 살고 있었는데 잘 사는 것을 못 봐주기 때문에 악이 나타난다. 이건 선이 자기를 위해 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계에는 좋은 것이 계속 있을 수 없다는 것. 이븐 칼둔을 봐도 나온다. 인간의/왕조는 언제나 끝이 있다. 이들은 굉장히 주역적 사고와 비슷한 것도 있다. 동양/페르시아. 그리고 이란에도 불교도의 사상이 많이 들어갔다. 동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고에는 어떤 것에나 끝이 있다는 사고가 있다. 모든 것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고가 있다. 선의 자기존재증명을 위해 필요한 게 악이 아니다. 그렇게 자기 존재를 위해 필요로 하고 나서 없어져야 하는 악이 아니고. 이런 세계에서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는 세계에서는 악을 사라져야 한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악을 언제나 필요로 하는 기독교와 다르다. 이슬람에서는 악이 사라져야 하는 것으로 말하지만 악이 사라지는 건 죽어서야 가능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선이 있으면 그 선을 방해하는 세계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

루스템은 왜 싸우는가? 아킬레우스는 명예를 위해 싸운다. 그런데 루스템은 왕조를 위해 싸운다. 아킬레우스는 절대 집단을 위하지 않는다. 전세가 기울어 가는데도 아킬레우스는 공명심에서 싸우지 않는다. 아킬레우스를 추동하는 건 우정, 그리고 전사로서의 명예. 그런데 루스템을 추동하는 건 집단의식? 아킬레우스에게는 의무가 없다. 그런데 루스템은 샤를 위해 싸운다. 끝까지. 이건 좀 이상한 것. 어떤 집단성이 <샤나메>에도 있다. 선과 악을 바라보는 것이 다를 뿐만 아니라 이들이 뭘 위해 싸우는지도 다르다.

일리아스는 오래된 서사시. 샤나메는 페르시아 제국이 망하고 만들어진 것. 그러니까 시대가 다르다. 일리아스와 일방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페르시아를 기억하는 차원에서의 서사시. 그럼 그떄 존재했던 위대한 전사들은 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의무감으로 싸운다. 그건 신과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들과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을 봐야 할 것.

뭘 봐야 하는가.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완전히 똑같이 비교할 수는 없다. 전쟁의 기록. 그런데 하나는 그 왕조사의 역사와 연관된 전쟁의 기원. 그런데 일리아스는 제국과 연관된 것은 아니다. 태초의 전쟁.

아리만이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다만 악이 싫은 것. 선한 자에 의해 규정된 악과 선이 싫은 악, 이 두가지는 다르다. '쟨 저러지 않을 수 있었는데 저랬어'가 니체의 양떼가 설정한 악. 그런데 샤나메는 악도 굉장히 능동적. 그걸 풀어보면 된다.

역사하고 훨씬 더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샤나메. 그리고 역사란 항상 선을 시기하는 악.

악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는 선과 선을 시기하는 악. 이 두 가지는 똑같을까.

기독교의 세계는 수동적인 선에 의해서 반대급부로 규정되는 악이 있다. 그리고 그때 악이라는 건 선이 만들어놓은 자기가 아닌 타자의 표상.

그런데 샤나메에서의 악은, 대표적으로 아리만이 그런데 밑도 끝도 없다. 그냥 선이 꼴배기 싫은 것. 이건 굉장히 자연발생적인 것. 역사에서의 선악이란 기독교에서의 관념적 선악이 아니라 실질적 힘. 인력/척력처럼 두개의 상반된 힘. 기독교는 언제나 선이 있는 것이고 그 선에 입각해서 악이 있는 것.

일리아스를 비교할 거면 아킬레우스의 전투와 루스템의 전투는 뭘까.



규창

지하드?

이즈쓰 도시히코를 보면 동양이라고 이걸 하나로 묶어서 동양의 철학, 이슬람 철학이 나오는데, 동양 철학에서도 의로움이 많이 나오는데, 동양 철학에서 의로움이 대체 뭐지? 그런데 이슬람에서 정의는 뭐지? 이런 식의 비교가 궁금해질 수도 있다.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쓰는가. 그럼 뭘 봐야할지가 캄캄하다.

너의 실천적 근거는 합리성인가?

나 자신의 합리성을 문제삼으면서, 이슬람을 보면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 있을 것 같다고 출발해야 한다. 그럼 합리적이지 않은 것은 어떤 것?

이들의 세계를 보면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럼 나의 합리성은 뭐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 실천의 근거가 뭔가. 그리고 나의 합리성을 검토해보자. 그런데 그런 식의 고리가 있지 않으면 뭘 왜 봐야하는지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어떤 것을 궁금해 할 때 뭐가 궁금해 지는 것은, 나한테 익숙하지 않은 것이 궁금해진다. 내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만나서는 궁금한 게 안 생긴다.

그럼 우리 자신의 합리성은?

<무깟디마>에서 알라를 찾고 점성술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점성술이 시작된다. 점성술의 근거 얘기가 많이 나온다. 그 다음 무슨 얘기가 뒤에 나오는가. 진짜 잘 아는 사람은 점을 치지 않는다고도 나온다. 점성술은 인간의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요인에 불과하다고 본다. 무시하지는 않지만 어떻게 전체 속에서 볼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그런데 모든 구절이 알라로 시작해서 알라로 끝난다. 그럼 이때 알라란 무엇인가. 이런 것을 툭하면 알라를 찾는다 비합리적이라고 하는 건 아니다. 초월과 현세는 어떤 관련이 있나? 초월과 현세가 공존할 수 있나? 초월을 말하면서도 이상적이지 않을 수 있는 건가?

또 이들은 앚기도 성직자가 통치한다. 우리에게 정교분리가 합리적이다. 그런데 성직자가 정치를 한다는 건 뭘가. 이 이슬람의 특징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걸 볼 때도 우리가 정치/종교/권력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점검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질문을 해야 성직자의 통치에 대한 파악이 가능하다. 그런 질문이 하나도 없이 다짜고짜 성속불분을 말하면 너무 안이한 것. 무깟디마에는 수피즘, 시아파, 수니파 얘기가 많이 나온다.


지은

키아로스타미 영화를 보고 영화적인 분석에 그치지 말 것. 이란의 독특한 문화, 영화에서의 영성 이런 독특한 길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의 생계에 대한 관점.

현세에 대해 말할 때 꼭 철학적인 게 아니라 생계에 대해 길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도 볼 것.


나눠준 것. 이슬람의 캘리그라피. 이건 굉장히 독특한 것. 서예가 출현한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된 힘이 현실로 출현한 것을 의미한다. 동양사람은 글씨는 기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런 게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잘라라~>를 보면 이슬람에서 글쓰기가 특권화 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건 쓰는 게 아니라 정말 손으로 새기는 걸 말하기 때문에.

이븐 알바완이라는 사람이 쓴 시가 멋있다. 이란 사람들은 시를 정말 많이 읽는다. 페르시아어는 읽을 때마다 운율이 달라진다고 한다. 그래서 아침마다 루미의 시를 읽는데 아침마다 시가 다르다고 한다. 그래가지고 그렇게 어디가나 시를 읽고 연설을 한다. 루미의 기념관을 꼭 가볼 것.

글씨를 쓰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이 일체되어 있다. 그리고 글씨를 쓰는 것이 나무판이 낡을 때까지 쓰라고 한다. 중국의 서예가 그랬다. 문인들이 서예를 한다는 게 그 사람의 생각을 계속 훈련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 그래서 계속 먹을 갈아서 글씨연습을 했다. 그건 글씨연습이 아니라 생각의 훈련을 한 것. 어떻게 신체와 정신이 함께 갈 것인가. 이것들은 분리되지 않는다.


역사책을 읽는데 시작법, 글씨 쓰는 법, 돈 버는 법이 나올 거라고 상상이 되는가? 그런데 이 사람은 역사를 서술하기에 앞서 인간의 문명을 구성하는 다양한 영역을 그런 방식으로 쓴다. 이게 들뢰즈라고 한다면 이런 게 바로 패치워크같은 글쓰기로 볼 것. 어떻게 인간을 형성하는데 얼마나 많은 분야의 힘들이 함꼐 그의 신체와 정신에 작동하고 있는가. 이걸 다 보여주고 있다. 역사서설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거대한 문명철학이자 인류학인 것. 그래서 이 책에 거의 모든 게 다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걸 다 참고하도록. 그리고 주제에세이는 가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주제만 잡고 갈 것. 난 이것을 왜 쓰겠다. 뭘 쓰겠다. 요것만 확실하게 잡고 갈 것. 그리고 가서 세미나 하면서 생각이 무르익어질 것.


기술. 베두인들의 기술은 숙련되지 않는다. 들뢰즈는 그렇게 설명한다. 유목민에게 기술이란 더 나은 산업을 위한 목적에 종속하지 않는다. 유목민의 기술이란 만들면 해체해버리는 기술. 만들고 해체하고 돌아다니면서 거기 있는 재료를 가지고 만들 뿐. 그런데 정주민에게 기술은 국가의 기간산업을 만드는 데 복무하게 된다. 들뢰즈는 기술에도 두가지가 있다고 한다. 어떤 선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기술은 국가의 기간산업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기술자가 국가의 노예가 되거나, 유목민이 재료와 접속하는 방식은 다르다. 우리는 재료와 기술이 독점된다. 그 재료와 기술이 결합한 어떤 물건이 국가에서 또 독점된다. 그런데 베두인에게는 기술이 독점되지 않는다. 그들은 숙련공이 되지 않지만 어딜 가서든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자들이 된다. 천개의 고원은 그걸 굉장히 중요하게 말한다. 스위스 치즈 구멍처럼 뭔가를 연결하며 전쟁기계에 무기를 공급해주는 유목민. 국가의 밖에서 국가와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자들.


이윤을 보는 방식도. 나카자와 신이치가 말하는 것. 자본주의화 되지 않는 방식으로 돈을 쓰는 것. 화폐가 없는 세계에서 살 수는 없는데, 그럼 자본에 종속되지 않은 채 소비하지 않는다면? 축적하지 않는 베두인. 모든 것이 축적되면 그건 국가적인 것에 복속하게 되어 있다. 기술도 축적되면 그 축적된 기술을 가지고는 아주 소수적인 곳에만 쓸 수밖에 없다. 그런데 베두인은 브리꼴라주. 어떤 재료와도 접속해서 국가 외부에 있는 자들과 연관된다. 그렇게 기술의 접속 방식이 있다. 이븐 칼둔이 의도해서 이런 기술을 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이븐 칼둔의 서술하면서 국가적인 것에 환원되지 않는 힘이 있고 그게 더 근원적이라는 사실을 안 것. 아싸비야.

중심화 하는 힘이 있는 반면 그 근저에는 중심화 하지 않으려는 힘이 언제나 있다. 이븐 칼둔이 역사 속에서 언제나 그런 힘을 봤다. 이게 소수성. 전쟁기계. 어떻게 탈주하는 힘은 계속 재영토화되는가. 그리고 재영토화 되더라도 다 재영토화 되지 않고 남아 있는 힘은 계속 남아 있고 이게 혁명의 근간.

자본주의적 욕망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이 자본주의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 것과 관계를 하고 있으면 자본주의적 욕망도 변이를 일으킨다. 완전히 탈자본주의적인 영토로 가라는 게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화폐 없는 곳에 가겠나. 그러나 오로지 화폐를 통한 관계만 있으면 내 욕망의 충족을 위해서는 돈이 전제가 된다. 이게 무기력. 그럼 그런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관계와 내가 접속하고 있으면 그 안에서 내가 있는 영토에서의 힘 자체도 다른 방시긍로 변이를 일으키고 언젠가 탈구가 일어난다. 나 자신의 욕망 재생산이 어떻게 사회적 영토의 재생산에 복무하는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 이 영토에서 작동하는 힘을 좀 더 느슨하게 만들면서 다른 것들과의 접속이 나의 또 다른 삶의 면과 접속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것을 본다면 공부는 언제나 외부다. 우리가 하는 공부는 더 자본주의적이 되기 위해서가 아닌 것. 그렇지 않은 공부와 접속한다는 것은, 영토에서 나에게 작동하는 힘이 좀 느슨해지는 것. 그렇게 하다 보면 외부의 관계에서 작동하는 힘을 잃지 않고 있는 이상 견고하게 나 자신을 옭아매는 힘이 오작동을 일으키는 순간이 온다. 그게 탈주.

지금 우리 시대에 뭐가 나를 꼼짝 못하게 하는데 맹자를 읽는데 그게 나를 옭아매는 힘이 헐거워진다 그럼 텍스트를 읽는 힘이 된다. 이슬람이 어떠하다는 것은 학자들이 하는 일. 내가 이슬람이라는 타자를 만나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내 영토의 힘이 어떻게 헐거워지는지를 찾는 것. 그래야 이슬람을 이렇게 읽어낼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우리가 무지하다시피 한 문화를 어떤 실험을 통해 만나는가. 이걸 보여주는 게 시도다. 글을 쓰는 것을 그렇게 시도처럼 해볼 것.


규창

차라투스트라 10년, 붓다 38살, 예수 40일 고행. 그리고 33살 사망. 30대에 모든 걸 다 해버린 예수 그리스도. 특유의 미숙함이 있다. 무함마드는 마흔살에 계시를 받는다. 단테 시대 평균수명은 70. 그러니까 인간의 전환점은 35. 예수는 거기에도 미치지 못했다. 너무 젊었을 때 모든 걸 다 겪었다. 그리고 속성으로 깨닫고 빨리 죽었다. 뭔지 모르게 인생에 대한 경험이 없다. 그리고 붓다도 그렇고 소크라테스도 무함마드도 결혼을 했다. 기독교도는 무함마드가 속되다고 하는데, 우리가 따를 수 있는 말인 것. 무함마드는 신격화 되지 않는다. 무함마드는 상을 만들지 않는다. 무함마드의 위대함은 말씀을 기록했다는 것에 있다. 말씀을 기록하는 자가 중요한 건 세상의 많은 일을 겪은 자라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누군가의 말을 경청할 수 있으려면, 경험이 없어 미숙한 자여서는 안된다. 이슬람 애들이 무함마드에 대해 갖는 존경심이자 기독교에 동조할 수 없는 이유. 예수의 나이와 경험. 그들의 나이가 대체로 30대 중반~40대. 공자도 30대에 립하고 40대에 불혹했다. 35~40 정도가 중요한 시기. 그때가 인간의 뇌가 가장 비약적. 청년 시기는 많은 것을 받아들이지만 해석력이 약하다. 40 언저리에 원숙미가 생긴다. 그러니까 공자도 40에 소문 안 나면 볼 것도 없다고 했다.

예언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 온다. 신의 총애와 상관 없다. 내가 예언을 들을 수 있는 신체, 인간적 가치에서 떠난 존재여야 한다.

무함마드의 삶과 연관해서 흥미로운 지점을 해석하면서 나름대로 평전을 써봐도 좋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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