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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이븐 할둔 강의 3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12-09 07:44
조회
116
(1) 키아로스타미 영화


영화 분석을 하든 말든 영화에서 키워드를 하나 찾아야 한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뭘 다루고 있는가.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 대한 비판으로 '이란의 현실을 다루지 않는다'는 말이 많다. 그럼 현실이란 뭐지? 정치/경제적인 측면? 예를 들어 리얼리즘 영화라고 한다면 인간의 삶을 규정한다고 전제하는 경제적이고 정치적이고 현실과 연관된 역사를 다룰 때라고 한다. 글너데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그런 현실의 지평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영화가 초현실적인 영화는 아니다. 즉 비(非)리얼리즘의 세계는 아닌 것.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공간 속에서 우리 스스로 느끼는 것이 있다. 이 느낌과는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느낄 것을 요구하는 게 타자. 내가 가지고 있는 정조나 내가 가지고 있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타자성.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그렇다고 타자성은 아니다. 그 하나의 세계를 설명하는 어휘가 없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 영화. 그렇다면 그거를 동일자적인 언어로 바꾸지 말고, 그 타자를 만나기 위해 우리에게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가령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듯.

영성은 신체적인 것일까 정신적인 것일까. 영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영성은 반신체성이 아니다. 영성은 정신성이 아님. 이븐 할둔도 천사나 예언에 대해 말하고 그것에 주목한다. 우리는 정신과 신체를 구분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이슬람의 철학도 그렇고 이븐 할둔의 말도 그렇고 신체성을 부정하는 맥락이 없다. 기독교와 가장 다른 면. 신체의 한계를 말하기는 하지만 신체를 버리라고 폄훼하지 않는다. 니체도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면서 기독교에 섭생의 문제가 없다는 것을 문제 삼는다. 섭생의 문제가 바로 신체성의 문제. 불교는 어떤 것을 먹고 어떤 것을 먹지 않고 등 신체성에 대한 사유가 있다. 감각적인 것을 욕망이라고 부정하지 않는다. 다른 감각적 차원을 만들지 않으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

이븐 할둔이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이유. 어떤 것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물질로 환원하지도 않지만 관념론자도 아니다. 이 사람이 베두인에게서 본 탁월함도 그렇고 역사 속에서의 문명 평가도 그렇고. 어떤 것들을 흥청망청 감각 속에 내맡기는 것이 왜 나를 약화시키는가.

욕망이라는 것은 신체와 연관된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신체와 관련된 것은 모두 벌. 금방 사라질 세계에 탐닉하는 것에는 늘 죄악시된다. 물론 가톨릭도 금욕을 한다. 그런데 원래 이반 일리치가 12,13세기 사제들 얘기를 하고 그 스스로 생각하는 것. 그런 사제들의 삶에는 세속적인 욕망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강인함이 있다. 세속적인 욕망이 나쁘다는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남들이 갖는 무리의 욕망을 갖는 것은 가속이 붙는다. 그 욕망을 갖게 되는 순간 얼마나 더 많이 빠르게가 관건이 된다. 배움 역시. 학교에서의 배움(관료화된 배움)을 받아들이게 되면 어떻게 1등을 놓치지 않을 것인가, 어떻게 1등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결과가 10등이든 20등이든 목표가 1등인 점에서는 똑같다. 실제 돈을 얼마나 벌든 실제 '더 많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얼마나 더 빨리 많이. 욕망이 다 이 문제로 환원된다. 무리의 욕망을 가지고 살면서 다른 것을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유가 다른 것을 욕망하겠다고 생각하면 신체성이 그걸 압도하게 된다.

부처는 왜 왕궁에서 수행할 수 없었을까. 왜 수행자들은 고행할까. 왜 가톨릭은 출가를 할까. 기존의 욕망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욕망과는 다른 방식의 구도 속에 들어가야 신체성의 변환이 일어난다. 그냥 내가 무리의 욕망을 가지고서 다른 식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도시인의 삶이란 왜 인간이 유약하게 될 수밖에 없는가. 부드러운 것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에. 이븐 할둔의 이 말은 동양 의학과 통하는 점이 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치과를 많이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딱딱한 것을 많이 씹어 먹었으니까. 지금 현대 음식은 달고 부드러워졌다. 우리는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음식이 감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옛날에는 씹어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먹는 간식이 입에 넣으면 녹는 것은 없었다. 우리가 감각이 굉장히 소프트해졌다.

몸 역시 마찬가지. 바디로션을 우리는 언제부터 발랐나? 90년대까지는 바르지 않았다. 그때 담론이 보드라움을 강조하지 않았다. 점점 더 부드러운 것, 사르르 녹는 것. 식감이나 촉감에 있어서 우리는 굉장히 유약해졌다. 맨들맨들하고 부드러운 것을 요구하게 된 시대. 피부에 대해 갖는 환상 같은 것도 마찬가지. 촉각에 대해 점점 더 유약해지는 환상.

이븐 할둔이 많은 양을 할애한 것은 기후. 기후에 따라 어떻게 인간의 신체와 피부가 달라지는가. 그리고 그건 어떤 섭생과 성정을 성립시키는가. 역사를 서술하는데 중요한 것이 섭생.

수도원이란 다른 욕망의 구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 성욕, 먹는 것을 끊고 기도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 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다른 삶을 사는 것.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란 감각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복음 어디를 봐도 욕망을 나쁘게 말하는 파트는 없다. 이런 점에서 니체가 맞다. 사제가 그리스도교를 안티 그리스도로 만든 것. 그리스도 역시 돈 버는 것이라든가 인간의 적당한 먹는 것에 대해 말하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 다만 탐닉하지 말라고 하는 것.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감각에 탐닉하는 것에 대해 경계한다. 그건 감각적인 것을 나쁘게 보기 때문이 아니다. 감각이 우리의 사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감각적인 지평을 다르게 가져가지 않고서 인간이 사유하면서 다른 삶을 가져가는 가능성은 없다.철학이란 감각적인 것을 다르게 규정하면서 다른 삶을 구성하는 것. 감각에서의 관선은 더 많이/더 좋게 뿐.

루터는 원래 사제가 되려고 했다. 그런데 감각의 억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것을 해방시켜 버렸다. 그래서 종교의 세속화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가톨릭은 어떤 욕망에 대한 포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루터는 결혼도 하고 먹는 것도 많이 먹으면서도 신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자본주의가 가톨릭과 만나기는 어렵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티즘과는 바로 결탁이 가능하다. 이상적인 것을 만들어 놓고서 또 거기에 금욕을 심어넣는 것. 지금 참으면 더 좋은 것을 갖는다는 것이 자본주의. 프로테스탄티즘 역시 모든 세속적인 것을 허용하는 가운데 그것을 억누르면 더 좋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프로테스탄티즘. 욕망을 허락했기 때문에 그걸 억누르는 것은 천국을 갈 수 있는 자격이 더 커지는 것. 한쪽에는 연고를 주면서 한쪽에는 독약을 바른다(니체). 이길 수 없기 떄문에 그걸 억누르면 천국을 갈 수 있다는 모순.

칼뱅파. 극도의 금욕주의. 칼뱅파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불시검문을 했다. 먹지 말라는 것을 먹는가 검문. 그리고 노래에 대해서도 경멸했다. 그런 기독교의 금욕은 사제가 아니라 칼벵파에서 나오는 것. 요만큼의 욕망도 허락하지 않는 칼벵파. 이것이 주로 프로테스탄티즘과 연관. 그리고 이들의 모토가 청빈과 금욕. 가난한 자들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논리는 이렇게 나왔다.

이반 일리치가 12,13세기에 주목한 이유. 그떄 사제들은 가난하라고 하지 않았다. 이웃과 함께 나누라고 했을 뿐. 자선, 구휼이 중요했다. 수도원이 곧 자선단체였다. 그들이 노동한 이유도 그 노동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결이 다른 기독교의 종파.

이븐 할둔이 이야기 하는 것 속에서도 섭생의 문제가 중요. 기독교에서는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섭생의 문제가 사라진다. 수도사의 경우 뭘 먹고 먹지 않는 문제가 있었는데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다 먹어도 좋지만 먹지 말라고 억압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상적인 것도 생겨난다. 성인들이 보여주는 이상적 금욕적 삶은 욕망의 억압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에서 욕망하기다.

베두인들은 거친 것들에 길들여져 있기에 강인하다. 그러나 도시인들에게 길들여지면 점점 부드럽고 편안한 것을 요구하게 된다. 도회인과 전야민을 가르는 것은 어디서 태어났는가가 아니다. 어떤 욕망의 배치에 있는가에 따라서다. 그들은 혈통이 아니라 습관에 따라 분류된다. 그리고 그게 어떻게 다른 배치 속에 놓이면 사라지는가/생기는가의 문제.

역사서술 안에 섭생의 문제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것. 영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영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신체적인 것을 부정하고 이상하게 정신적인 비약으로 가는 것으로 보면 곤란하다. 영성은 다른 욕마으이 구도를 갖는 것. 욕망의 탈주. 예언자들은 삶이 항상 긴장 상태 속에 있다. 긴장 상태 속에 있다는 것?

자본주의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동일한 구도 안에서 더 많이 받지 못하는 스트레스. 그런데 예언자의 긴장이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긴장. 공부는 풀어진 상태에서 가능하지 않다. 내 자신의 에너지가 있어야 다른 에너지를 만났을 때 스파크가 튄다. 우리가 읽는 텍스트는 굉장한 에너지 덩어리. 그런데 우리 자체가 에너지를 갖지 않으면 스파크가 튀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건 두 개의 에너지가 만나야 한다. 예언가가 늘 긴장한 사람이라는 것은 다른 류의 긴장이라는 점. 예언가들은 언제나 소음 속에 있다는 것. 예언자의 귀에는 늘 소음의 형태로 웅성거림이 들린다. 그런 다음에 그게 익숙해지면 분절적인 언어로, 인간의 말을 가지고 있는 천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천사라는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미셸 세르는 천사라는 것 자체가 이미 파동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천사를 그리기 시작할 때부터 인간에게 뭔가를 알려주는 천사를 표현할 때 날개의 진동을 색채 그라데이션으로 표현한다. 천사의 날개를 왜 진동으로 표현할까. 천사 자체가 파동이기 때문에. 미셸 세르같은 과학사가는 지금의 컴퓨터 네트워크 그런 것이 바로 천사 같은 것. 전파의 세계.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핸드폰 역시. 현대의 천사라는 것은 메신저. 옛날의 천사는 수태를 알렸지만.

육성을 거치지 않은 새로운 파동의 방식.

세상은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예언자들에게 계속해서 소음이 들리는 것. 그리고 그 사이에서 분절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영성이라는 것도 예언자의 신체 상태가 다른 것. 예언자들의 긴장은 아주 편안한 긴장. 공자나 붓다의 삶이란 늘어진 일상이 아니다. 굉장히 긴장된 일상인데 그렇다고 스트레스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가와이 하야오 선생의 책. 게으름뱅이의 구에는 새 소리가 들린다. 게으름이라는 것 자체가 세속과 다른 삶의 방식인 것. 그러면 안 들리던 소리가 들리는 것. 무리의 감각 속에 있을 때는 그런 지각이 개발되지 않는다. 일주일만 숲에 있으면 다른 감각이 개발될 것. 감각 자체가 다른 곳이 바로 숲. 도심에서 먹는 것, 도심에서 들리는 것 등이 숲에서의 삶과 도시에서의 삶은 다른 것.

니체도 소리를 들었다. 일종의 계시와도 같은. 계시라는 것은 뭔가를 한번에 보내주는 것이 아닌 것. 우리가 사는 파동에서 같은 방식으로 입자화되는 것이 달라지는 것. 파동이 다르게 오는 것은 생각이 번개처럼 나오는 것. 들뢰즈는 가타리를 만나서 자신은 피뢰침, 가타리는 번개였다고 말한다. 들뢰즈가 가타리가 만났기 때문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개념을 낳는다. 그러지 않았다면 둘은 서로 안에 갇혀 있었을 것. 어떤 파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와 그 피뢰침에 꽂힐 수 있는 에너지인 것.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보면 거기에 영적인 뭔가가 있을 것. 그런데 그 영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흘러가다가 저게 아닐까 싶은 것. 노트에 있는 꽃은 기적이고 마법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말을 했었는데, 아이가 돌아가고 번개가 쳤고 그 결과일 수도 있다는 것. 인간의 인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벗어나는 결말. 올리브 나무 사이로 역시 마찬가지. 영화를 찍는다는 것의 문제는 무엇인가도 중요한 것. 그런데 그 영화에서 같은 장면이 반복되는 것을 볼 것.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 어떤 감독은 테이크를 스무 번, 삼십 번도 한다. 우리 삶도 같은 테이크를 돌리는 것 같다. 그런데 거기에 미세하게 차이가 난다. 똑같은 장면의 연기를 여러번 한다. 그런데 똑같은 장면을 여러번 하는데 거기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미묘하게 뭔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차이라고 하는 것이 그 반복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 그런 차이들이 맨 마지막 장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7세기의 푸가, 론도, 캐논 같은 음악적 형식, 대위법. 일정한 모티프가 반복되면서 미세한 차이가 계속 있게 된다. 바흐의 음악은 처음 들을 때면 지겹다고 생각하는데 계속 들으면 매번 새롭다. 그 영화에 왜 그 음악을 썼는지도 생각해 볼 일. 우리는 그 영화에서 어떤 결말이 났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런데 주인공이 뛰어올 때 음악의 톤이 달라진다. 그 음악의 세계와 거기서 일어나는 일의 세계. 그건 사건이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일어나는 일을 보는 시선이 굉장히 멀다.

그럼 기적이란 무엇인가.

이븐 할둔이 기적을 보는 방식. 기독교에서 기적이란 일단 반자연적인 것. 신의 역능을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것이 바로 기적. 그런데 이븐 할둔이 말하는 기적. 다르게 사는 예언자와 같은 사람이 다르게 살기 때문에 나타나는 어떤 일이라고 말한다. 다르게 사는 것이 기적이 일어나는 근거. 누군가에게 계시가 들리는 근거도 그 예언자가 다르게 살고 있다는 것. 계시를 받아서 다르게 사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는 이미 다르게 살고 있기 떄문이다. 처음에는 소음, 그러다가 분절된 언어. 그 분절된 언어가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중간자적 존재인 천사.

니체가 차라투스트라가 제5의 복음이라고 한 이유. 그는 계시받았다고 생각했을 것. 니체가 이미 다르게 살고 또 다른 욕망의 구도를 갖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다른 삶을 갖추게 되는 것. 예언이든 복음이든 비슷한 것.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다룰 때도 우리가 공부한 것들을 가지고 이슬람의 독특한 지점들을 가지고 키아로스타미를 볼 수는 없을까? 우리가 지금까지 읽은 책들을 다 놓고 각자의 방식으로 이슬람이라는 타자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논문들을 보면 재미가 하나도 없는 이유가 이들이 이걸 뭐라고 느꼈는지를 알 수가 없다.



(2) 호메이니 혁명



호메이니 혁명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뭘 요구했던 것일까. 흔히 우리가 말하는 근대화. 고소들, 높은 생활수준? 이것들이 우리가 사는 기운이 소통하는 방식에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떄문이 아닐까? 자본주의는 기의 길을 끊어놓는다. 우리의 몸이 자연스럽게 어떤 상태가 배고프가 어떤 상태가 배부른지 자연스럽게 자각하는 것이 건강한 일. 그런데 배가 고프지 않은데 뭐가 먹고 싶다는 것. 왜? 다 부인이나 남편이 있는데 부인이나 남편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섹스하고 싶어 한다는 것. 부부끼리 섹스하는 경우에도 다른 사람을 상상하는 경우가 많다. 욕망이 그렇다. 지금 있는 것들 속에서 만족을 느끼는 방식으로는 자본주의는 작동하지 않는다. 지금 먹는 것 속에서 극도의 쾌락을 느끼고 더 맛있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사고방식. 배가 부른데 왜 뭘 더 먹을까? 밥 먹고 나서 디저트 배가 따로 있다는 거짓말. 맛의 노예가 되는 것. 배가 고플 때 배가 고프다는 것을 딱 인지할 수 있는 것.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인간은 그렇게 자주 배고프지 않다. 그러니까 붓다도 한끼 먹었다. 공자도 세끼 먹었다는 기록이 없다. 삼시세끼라는 말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 삼시세끼라는 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시간의 리듬과도 연관될 것. 일하기 전, 일하는 중간, 일하고 나서.

삼시세끼 프로그램. 거기서는 밥 해먹다가 하루가 간다. 맞는 말. 밥먹다가 하루가 간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절대 삼시세끼를 먹지 않았다. 뭘 따고 뭘 잡고 하는 와중에 하루가 간다. 그랬을 리가 없다. 두끼가 아마 가장 보편적이었을 것. 배고플 때 딱 먹는 것. 배가 안 고픈데 뭘 먹고싶다는 것은 주입된 욕망. 자본주의가 우리가 자연스럽게 욕망을 받아들이는 길을 끊어버린 것. 적도쪽으로 가면 인간은 덜 먹게 된다고 한다. <역사서설>에는 인종적 차별이 하나도 없다. 기후에 따라 다르다는 것.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룰 같은 것은 없다. 철저하게 왜 우리가 이런 문명을 구성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할 때 섭생의 문제와 함께 생각한다. 우리가 배운 역사에 섭생이 문명의 주요 요소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확장 문제에서 역사를 다룬다. 인간의 문명과 역사가 섭생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배운 역사에서는 보지 않았다. 그냥 진보사관이 없다고 퉁치지 말 것. 이븐 할둔은 왜 이런 것을 서술하는가? 역사 속에서 이런 것을 서술한다는 것은 뭘 말하는가?

자본주의적인 삶이 정말 싫으면, 자본주의적인 삶이 내 본성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을 정말 안다면 우리는 우리 몸의 구도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이븐 할둔에게서 배우는 점. 풍요로운 삶에 젖어 사는 것. 조미 식품에 젖어 사는 사람은 위장이 더 많은 수분을 필요로 하게 되고 그럼 뇌가 어떻게 되고 등등을 말하는 이븐 할둔. 인간의 삶에 바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섭생이다. 나는 어떤 환경조건 안에서 살고 있는가. 그 안에서 원하는 것 이상을 원하게 되면 사유의 힘으로 가지 않게 된다.

그래서 3,4기후대에서 철학이 왜 발생하는가. 그걸 섭생의 차원에서 보고 있다. 왜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은 일단은 기존의 욕망과는 다른 욕망의 구도를 갖게 되는가. 그들이 보여주는 독특한 금욕성이란 무엇인가. 욕망을 억압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가 어떤 지점에 있어서 필요 이상을 욕망하게 되는가. 필요하지 않은데도 욕망하게 되는 것. 그런 게 다 삶의 잉여. 그게 안되고서는 철학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

영화와 실제와 현실. 영화에서 말로 잘 설명되지 않는 이상한 부분을 가지고 공부한 것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것. 호메이니 혁명 역시. 그들은 정말 다른 것을 원했구나. 다른 것을 원하는 것은 흔히 서방화 된 사회가 원하는 것을 이들은 끝까지 거부했구나 하는 것. 자신들이 못 살아도 좋으니 자신들은 이 힘의 기가 흐르는 길을 자본에 의해 잠식당하지 않겠다는 혁명. 영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혁명을 보는 시선이 다를 것. 정치사적으로 푸는 경우가 많은 혁명. 대중, 샤, 호메이니의 정치성으로만 보고 있는 것. 그런데 푸코는 그 욕망이 정치적인 것으로만 환원되는지를 묻는다. 정치적인 것으로만 환원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 욕망의 길은 자본이 흘러가는 길과 일치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미국이 지금 외교적 차원에서 억지를 부리고 있는데, 이란이 거기에 맞지 않고 있는 것. 그래서 제제를 가하고 있는 것. 그런 방식으로 제제되면 자본이 흘러가지 않고 고립이 된다. 우리가 갈 때도 이란과 미국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생각해볼 것.

그들은 자신들의 현대사를 뭐라고 생각하고 미국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리고 그들은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어떻게? 각자의 주제와 연관된 질문을 만들어 갈 것.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란 뭔가. 그걸 볼 수 있는 차원에서 정리해보기. 우리 세대가 근대를 경험한 방식. 그 근대가 문제시되기 시작한 것이 90년대 말부터. 그떄부터 근대에 대한 담론이 많아졌다. 그리고 근대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인 서양의 제도라는 생각이 생겨났다. 더 합리적이고 우월한 서양의 제도와 자본주의가 낙후되고 비합리적인 봉건적 시스템을 없애고 대체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근대화. 그 근대화가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박정희 찬양도 그런 맥락. 그 신화가 굉장히 견고하다. 그런데 근대가 도대체 무엇인가. 근대가 우리에게 가져온 문제가 무엇인가. 우리에게 근대화란 무엇인가. 그 근대가 한마디로 말해 근대가 이콜 서양화였기 때문에 폭력적인 방식으로 근대화를 밀어냈다는 것. 근대화가 되었다는 것은 동도서기. 서양의 제도를 받아들이고 동양의 정신. 근대화가 우리에게 남긴 문제가 무엇인가를 정리해보기. 그런데 그런 서양화와 동일시되는 폭력적 근대화를 거부한 채로 근대화를 이루어낸 이슬람 혁명. 그럼 이 혁명의 과제는 오래된 샤 정권이라는 봉건성에 저항하는 동시에 미국이라는 서양의 자본에 저항하는 것. 이 두 가지에 저항하는 것으로서 이슬람 혁명이 나타난 것. 이 두 가지와 싸워야 했다는 과정이 근대화를 보여주는 과정으로 중요한 지점. 그런 것을 추동하는 것은 무엇이었나. 그때 나와야 하는 것이 영성 등.




(3) 시아파와 수난


수난은 어디에 있는가. 왜 시아파인가. 기독교와 다른 수난? 왜 수난이 재미있는가. 어떤 지점에서 시아파의 능동성을 볼 수 있는가. 어떤 지점에서 능동적인 것을 봤는지. 유대교와 비교해서는? 문제삼아야 하는 것은 현실 정치에 비판적이라는 점이 아니가, 이맘이라는 존재가 시아파에 왜 필요한가? 이맘이 사라졌다는 것은 어떤 역사 인식인 것일까? 이맘이 사라진 현실이라는 현실인식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구체적으로 던질 것.



(4) 영성과 신심


신심 이전에 신성한 것이 있을까? 신심이라고 하지만 모두 의미하는 바가 다 다르다. 기독교적인 믿기지 않는 세계, 이런 세계를 믿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질문을 던질 수는 없는 것. 이븐 할둔 역시 알라에 대해 말한다. 그런 관습적인 말. 이븐 할둔에게는 그런 세계였던 것. 이 거대한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이븐 할둔에게는 알라였던 것. 믿음이라는 것은 모두 동일한 것일까? 믿음은 다양한 차원이 있다. 역사학과 종교는 양립할 수 없는가? 그럼 역사는 뭐고 종교는 뭘까? 항상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속에는 전제가 있다. 그 전제를 문제삼아야 한다. 역사를 말하면서 어떻게 신을 말하는가? 이런 질문 속에는 역사와 신에 대한 나의 전제가 있다.

종교와 연관해서 쓸 때. 이슬람 세계에서는 신체적인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죄와 벌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있지 않다. 감각적인 것에 대해 말하면서도 감각적인 것을 억누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로지 신체성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 뿐. 죄많은 육신. 신체를 부정할수록 인간의 영적인 차원이 훨씬 더 지고해지는 원래. 그런데 이슬람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신체를 어떻게 보는가. 이슬람은 신체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영성을 말하지만 신체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왜 그렇게 신체를 증오하는가? 똑같은 유일신교라 해도 양립할 수가 없는 종교. 기독교는 정말 동양과 만날 수가 없다. 기독교는 자기들이 천년왕국을 건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생각. 육신을 버리라고 하는 점.

신체성을 그렇게까지 극도로 부정해야 하는 것은 뭘까. 이상주의일텐데. 이슬람에는 천국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다. 왜 천국에 대한 이미지가 그토록 영롱할 수밖에 없는가. 그건 신체적 차원이 극도로 폄훼되기 때문에. 현실이 폄훼되지 않는 세계는 이상을 구축할 필요가 없다. 불교에서도 극락을 말하지만 별게 없다. 이슬람에도 천국 얘기가 강조되지 않고 구원이 간단하게 있다. 신의 구원을 말하긴 하지만 매우 현세적인 종교. 종교가 다 이상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도 굉장히 현세적. 유교와 도교는 말할 것도 없고. 힌두교도 굉장히 현세적이다. 그런 관점에서 접근을 해 볼 것.

그런데 기독교는 현세를 폄하해야만. 믿음도 거기서 도출된다. 현세를 폄하하면 할수록 믿는 것은 현세적이지 않은 것을 믿어야 한다. 이슬람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보면 같이 할 수 없는 것.

기독교도의 역사관도 생각해볼 것. 모든 역사가들은 대개 크리스천. 20세기 이전 역사가들은 무신론자가 없다. 기독교들의 역사관은 천년왕국을 현세에 구축하는 것. 인간 문명의 발전, 저 끝이 천년왕국의 현세적 버전. 천년왕국을 현세에 세운다는 것.



(5) 영성과 신체성


영성에 대한 환상을 거두기. 영성을 다른 곳에서 찾지 말고, 이슬람에서 신체를 어떻게 보는가. 이슬람의 섭생의 문제. 그걸 이븐 할둔에 나오는 것에서 잘 정리해보기. 이슬람 교도가 어떻게 신체를 말하는가. 꾸란 구절 등. 신체를 바라보는 것을 가지고 이 세계에서 신체란 무엇인가. 그 얘기를 하다가 영성이라는 것도 신체성과 무관하지 않은 차원이라는 것을 써 볼 것. 도대체 이슬람 교도에게 신체란 무엇인가. 신체성을 중심으로 영성과 관련되어 써보기.



(6) 현세적 종교 이슬람


현세적 종교 이슬람에 대해서. 현세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니체의 기독교 비판을 가지고 오기. 금욕적 이상주의라는 것. 현세를 폄하하면서 나오는 극단은 금욕적 이상주의. 그런데 이슬람은 그런 식의 이상주의적인 것이 별로 없다. 이상세계. 그런 것들을 다시 지금까지 읽은 텍스트를 정리해보기. 현세성이란 도출해내야 하는 결론. 금욕과 이상주의. 니체의 비판에서 시작되는 이슬람. 니체의 기독교 비판은 그 종교가 내포하고 있는 반현세성 때문. 그런데 이슬람은 기독교와 출발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왜 다른가. 마위야 후위야를 풀어내보기. 이들은 천국과 내세를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리고 이슬람에서 사제가 없다는 것. 이슬람을 통해 보는 도덕의 계보. 이슬람을 가지고 사고구조를 파악해 보기.



(7) 앗사비야


앗사비야만 가지고 써 볼 것. 그 앗사비야가 도대체 뭘까. 현대사까지 아우르는 에세이를 써 볼 것. 우리에게는 연대의식이라는 것이 있을까? 우리에게 연대의식을 대체할만한 것? 애국심? 애사심? 집단에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을 연대의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 그런데 이븐 할둔이 말하는 앗사비야는 독특함. 집단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과는 다른 것. 전쟁을 할 때 개인만 있으면 되지 않는다. 어떤 집단 의식은 개인을 끊임없이 집단과 동일하는 집단의식이 있다. 그럼 개인과 집단을 동일시하지 않는 연대의식이라는 것은 있을까? 우리 몸은 하나의 바디. 이 바디는 일체가 되어서 표현된다. 그런데 우리 몸이 구성하는 것들이 개체성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개체성을 상실하지는 않지만 하나의 바디라고 말한다. 개체가 집단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 공동체를 생각해볼 것. 공동체에 어떤 법칙이 있고 그걸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한다면 모든 개인의 의식을 모두 차단해버리는 집단. 그런데 그런 집단이 아닌 것이 존재한다. 승가공동체나 수도원 공동체 등. 개인의 의식이 집단의 규율로 종속되지 않는다. 개인 의식의 자율성이 있기 때문에. 개인 의식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표현해내는 하나의 집단성이 있다. 이것이 공동체가 지향하는 것.

강자들의 공동체를 생각해볼 수 있다. 공동체도 약자적인 방식으로 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게 아닌 것은 어떤 것일까? 집단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체의 의식. 개체의 의식의 강함을 통해 형성되는 공동체. 스피노자가 꿈꾼 공동체. 연대의식의 또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면 그런 것. 유목민의 경우 일단 자기가 세다. 게릴라 같은 경우도 규칙체계가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다. 나름 작전이 있고 체계가 있다. 알아서 싸우는 것은 게릴라전을 하지 않는다. 게릴라는 분명 군대 안에 있다. 전체 규칙을 읽으면서도 그 규칙의 변칙적 사용. 규칙을 분명 숙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 그런 것 비슷하게 집단 의식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보기.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앗사비야로부터 설명해보기. 앗사비야를 잘 정리해보기.




(8) 샤나메



일리아스도 당연히 생소하다. 아킬레우스는 왜 화내는가. 어떻게 분노가 이 사람을 이끌어갈 수 있지? 그 생소함이 나에게 어떤 방식에서 질문을 만드는가. 영웅은 왜 필요한가? 지금 내가 선악을 뭐라고 생각하는가를 말해야 한다는 것. 이슬람 세계에서의 선악/기독교 세계에서의 선악/일리아스에서의 선악. 샤나메는 어떤 점에서 다르다는 것을 기획할 것.


가장 유명한 게 일리아스. 그 다음이 샤나메. 그리고 바하바라타. 일리아스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무엇인가. 샤나메도. 인간들이 그렇게 많이 나오고 싸우는데 그 과정에서 포인트를 짚어내야 할 것. 그 과정에서 샤나메가 가지고 있는 독특성이 비교가 될 것. 일리아스와 샤나메가 잘 비교될 것. 그 두 세계를 끌어가는 힘들이 무엇인가. 인간들을 추동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리아스에서 행동선택의 기준은 선악이 아니라 명예. 샤나메에서 인물이 선택하는 기준은 뭘까.



현장에 가서 볼 것까지를 잘 넣어둘 것.

우리가 읽은 기본 자료 정리하기. 문제를 잘 만들어놓기.

다음 주 숙제.




(9) 이븐 할둔의 역사


축약본이 아닌 책에는 기후 얘기가 많이 나온다. 문명을 지리적 차원에서 고찰하는 것도 새로운 축에 속하는 것. 역사에 있어서 지리에 주목한 것은 아날학파. 근대 역사학이 시작된 이후로는 언제나 제1역사학은 정치사, 경제사였기 때문. 지리의 문제 같은 것은 별로 취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날학파는 지형 자체가 흘러가는 시간과 인간 삶의 시간을 나눠서 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브로델. 마르크 블로크 같은 사람도 봉건사회를 기술하면서 지리적인 것에 주목했다. 그런데 이븐 할둔은 어떻게 이렇게 나누었는지 잘 모르겠는데 굉장히 꼼꼼하고 과학적으로 기후를 나누어서 그 기후가 어떻게 인간 신체와 뇌에 영향을 미치는지 말하고 있다. 각각 그렇게 해서 나눈 다음에 학문과 건축 이런 것들이 북방지방에서 생겨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런 다음, 예언자에 대해서도 기후와 연관해서 말하고 있다. 예언자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냐면, 예언자가 계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예언자 자체가 모든 부분에서 중도의 것을 취한다는 것. 넘치지 않는다는 것. 이것도 이상한 설명 방식. 예언자가 태어나는 것은 그의 선택은 아니다. 신이 아무데나 그들을 두는 게 아니라, 그걸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 예언이 간다는 것. 신이 선택했다는 것은 아무나가 아니다. 선택 될만한 사람이 선택된다. 그런데 그들은 온대 지방에서 태어나야 하고 거기에서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든 면에서 중도의 것을 취한다. 그리고 검은 사람들은 비하하는 것을 가지고 자연조건으로 설명한다. 기후가 어떻게 인간의 신체와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가. 성격이라고 말했지만 심리 이론.

역사를 인간의 정신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는 것. 인간의 삶은 항상 영향을 주고받는 지리적 조건과 연관. 많은 음식, 부패, 혼합, 수분은 인간 신체에 잉여물질을 발생시키고 그게 몸을 부적절하고 비대하게 만든다. 신체가 비대해지면 피부가 어두워지고 보기 싫게 변한다. 그리고 잉여물질이 뇌로 가면 수분이 뇌를 뒤덮고 우둔하고 조급해진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 뇌가 작동이 잘 안 되는 것은 습기 때문에. 몸에 습기가 많게 되어 있는 것이 있다. 몸 자체가 축축한, 그 안에 습기가 많은 것은 곰팡이가 많이 피는 조건. 이들도 자연을 바라보는 합리적 인식이 있는 가운데 신체를 본다. 습한 것들이 뭘 만들어서 부패한 것을 만든다. 음식을 많이 먹으면 부패한 것을 만들어낸다. 사고력이 부주의하고 우둔하고 조급증이 나타난다는 것. 많이 먹어서 나타난다는 것.

이븐 할둔은 배고픔이 사람의 생각하는 능력을 키운다고 보고 있다. 왜 부처가 고행을 하고 나서 생각하는 능력이 고조되었나. 많이 먹고 생각하는 능력이 고조되었다는 것은 잘 맞지 않는다. 공부도 살짝 배고플 때 잘 된다. 그래서 3교시가 제일 능률이 오른다. 5,6교시는 능률이 전혀 오르지 않는다. 그게 다 몸과 연관이 되는 문제. 철학자들 치고 마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자기 골격에 맞는 만큼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양은 섭생이 주로 육식과 생채소. 육식을 하고 생채소를 먹을 때, 안은 차가운데 겉은 열이 난다. 그런데 동양은 생채소가 아니다. 모든 것을 삶아먹는다. 모두 속이 따뜻하고 밖은 차갑다. 서양사람들은 겨울에도 더워하고 동양 사람들은 안 그런다. 음양 자체의 차이. 이게 사유와도 연관되어 있다. 서양은 양적이고 밖으로 지배적이다. 그런데 동양은 안으로 수렴하는 태도가 강하다.

어쨌든 전야민들은 몸 속에 잉여물질을 쌓아놓지 않는다. 굶주린 것이 배부른 것보다 좋다는 말은, 잉여를 쌓아놓지 않는 몸이라는 뜻. 지방 없는 몸. 우리는 근육 있는 몸을 지향하지 지방 없는 몸을 지향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근육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서양적 마인드. 동양에서는 몸에 기가 흐르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서양 해부도를 보면 근육 중심. 우리는 왜 이렇게 근육에 집착할까. 2000년대 이후. 어떤 사람이 근육이 좋다는 생각도 가져본 적이 없다. 몸에 대한 담론이 급격하게 달라졌다. 몸을 어떤 언어로 표현하느냐도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대하건 마르건 잉여물질을 쌓아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10) 초자연적 지각능력, 계시, 영감, 꿈, 점성술


이들은 이것도 하나의 문명에 속해 있다고 본다. 결국 문명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적 능력. 문명이란 그게 언어화 되어야 하는 것. 언어화되지 않으면 문명이 아니다. 그런데 그게 언어화 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 각종 언어화 될 수 있는 각종 능력들을 포함시키고 있는 이븐 할둔. 이븐 할둔 연구에서 최초의 언어학 같은 것도 있다. 무함마드 알리가 영감을 얻는 것은 긴장을 통해서.

알라가 특정한 개인을 선택해서 계시를 줬는데, 특정한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계시를 받을 수 있는 강함을 주었다는 것. 영감을 얻는다는 것은 계시를 받는다는 것이다. 대개 추운 날 계시를 받는데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받았다는 증거란 진실성. 상황과 성격. 다시 말해 그 사람이 평소에 가지고 있는 인격, 그 사람이 평소에 살았던 상황. 그것에 따라서 그 사람이 계시를 받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신에게서 받은 말이 있다고 하는데 평소의 행실이 신뢰를 얻고 있다면 사람들이 그의 계시를 인정해준다. 이건 매우 합리적인 방식.

공자의 말도 그렇게 합리적인 말은 아닐 수도 있다. 군자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할 때 어디서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을 것. 주역도 다른 사람들은 읽은 적이 없는데, 공자가 주역을 가지고 말할 때 다른 사람들은 벙찔 것. 그건 자연의 이치를 꿰뚫은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 어디 책에도 없는 말이기에 제자들은 다른 것을 더 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게 계시 아닐까?

예수의 말 역시. 당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일상의 규율과 전혀 다른 이야기. 붓다의 말 역시. 그런 사람들의 말을 헛소리가 아닌 존경받는 자의 말로 증명해주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 뿐. 백성들에게 얻는 신뢰, 진실성. 이게 예언자의 말이 광인들의 말과 다른 것. 기적은 본질적으로 진실과 연관되어 있다.



(11) 천사


천사성으로 바뀌는 것은 인간성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천사라는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다른 신체와 정신적 변이다. 그건 얼마만큼인가, 인간성을 벗어버리는 만큼이다. 천사는 정말 중간적 존재. 순수한 지각과 지성이라고 말하지만, 말을 조금만 바꾸면, 기존의 영토화된 지각과 지성을 벗어버리는 만큼이 천사화 되는 것이다.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천사성으로 변이하는 것. 인간의 변이.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 것, 이게 천사. 천사가 단순하게 생각할 개념이 아니다. 천사만 가지고도 여러모로 생각해볼만한 주제. 천사에 관한 논의는 중요한 문제. 총망라되어 있는 책 <천사들의 전설>

인간 있고 천사 있고 신이 있고 이런 구도가 아니다. 알라는 모든 것을 다 부여했다고 나올 뿐. 예언자들은 어떤 힘을 부여받았는가. 인간의 가치에 동화되지 않을 수 있는 힘. 이런 힘이 선천적으로 있는 것. 후천적으로 될 수 있는 여지도 있겠지만, 근기가 있는 것. 특별한 인간에게 그런 기질을 알라가 부여한 것. 어떤 인간은 인간성을 떨쳐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 말은, 알라가 예언자에게 인간성을 떨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런데 이것도 기후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 어디에 태어나느냐, 이것도 '부여받은' 힘. 이것은 기독교의 선민의식과 다른 것. 기독교의 선민의식이란 선택된 민족이라는 것. 다른 민족은 버려졌다는 배타적 신. 그런데 알라는 어떤 용법을 대체하고 있는가. 인간 중에서도 누군가는 고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라가 어떤 인간에게 고귀한 능력을 부여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 우리는 다 인간을 주어로 해서 서술을 한다. 그런데 이들은 인간을 주어로 하지 않는다. 신을 주어로 한다. 그게 다른 점. 지진이 나서 인간이 불행하다. 이게 우리의 어법이다. 그런데 이들은 지진이 나는 것은 알라의 뜻. 그런데 기독교에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하지만, 그걸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한테 내가 선택되는 게 더 중요한 문제. 그게 믿음의 문제. 그 선택을 위해 내 뭔가를 바쳐야 하고 그건 사제를 통해 가능.

그런데 이슬람의 세계에서는 신에게 선택받기 위해서는 내 뭔가를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개념이 희박하다. 기독교는 불행을 받았다고 한다면 다시는 불행을 받지 않는 세계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슬람에서는 모든 것이 알라의 뜻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중요. 그러니까 이들에게 교회가 없다. 사원은 기도하기 위한 장소이지 해석의 장소가 아니다. 교회는 결국 신을 다시 인격화 할 수밖에 없다. 이슬람은 알라를 인격화 하지만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지 않는다. 기독교의 신은 인격화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는 순간 인간의 세계와 신이 결탁하게 된다. 나머지는 다 관심 없게 된다. 이슬람 사람들이 생각하듯 이것도 다 알라의 뜻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진은 내일도 일어날 수 있지만 축구는 4년에 한번. 이 발상은 기독교의 세계에서 불가능. 기독교에서는 다시는 지진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 다른 애들이야 지진을 겪든 말든. 그런데 이슬람은 신을 사람의 모습으로 보지 않는다. 그게 바로 신에 대한 복종. 신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일어나는 것을 다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러니까 진짜 기독교도들은 신을 믿는다고 하지만 모두 인간주의자. 신 앞에서 겸허하지 않은 것. 신을 믿는다면 이슬람이어야 하는 것. 기독교는 인간이 신을 만든 세계. 적어도 이슬람 세계에서는 신 아래 인간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기독교도는 다른 모든 것을 배타적으로 배제해버리는 세계인 것. 14,15세기에 교황의 승인을 얻어서 아메리카에 가서 학살한 것. 이슬람은 최소한 전쟁을 한 것. 이슬람 역사에 학살은 없다. 동양에도 학살의 역사는 없는 것. 유일하게 인류 중 자기들의 우월함을 가지고 다른 존재를 학살한 것은 서양 뿐. 이게 어떻게 가능했는가. 오로지 신부터 인간까지가 모두 자기들의 세계이므로 가능했던 것. 그렇지 않은 인간이나 동물은 모두 죽어도 되는 세계인 것.

인디언 절멸사를 보면 14,15세기 교황의 승인을 얻은 것. 흑인 대학살. 그리고 11세기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명분없이 시작하는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은 이 세계를 모두 기독교화하겠다는, 기독교가 아닌 세계는 죽어야 한다는 전쟁. 동물과 식물 학살. 유럽인 아닌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을 이유없이 학살한 것. 똑같은 절대신인데 기독교는 절대신이 아닌 것. 기독교는 그냥 인간을 믿는 것. 이슬람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슬람은 최소한 신에게 복종할 줄 아는 종교인 것. 계시도 인간에게 신이 다이렉트로 주는 것. 사제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기독교의 모순. 절대신을 상정하면서 인간의 자유의지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놓지 않으려는 종교. 그러면서 죽는 소리를 한다. 맨날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말하면서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 장착한 상태.

계시는 가장 빠른 언어 안에 있다. 들뢰즈가 사유는 속도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과 통할 것. 속도는 빠르다/느리다가 대립하지 않는다. 속도는 언제나 상대적. 니체도 내 책을 빠르게/느리게 읽으라고 음악처럼 표기를 할 때가 있다. 빠르다고 할 때 언어가 빠르게/느리게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사유의 속도를 갖느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던 구절이 갑자기 그 구절이 상대적으로 속도가 다르게, 갑자기 나에게 달려오는 때가 있는 것. 몇번이고 읽은 책을 다시 읽는데 한번도 주목하지 못한 문장이 나에게 달려드는 것. 이것이 속도의 문제. 나를 덮치듯 달려올 때도 있고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이것이 빠르기/느리기. 계시의 언어는 빠르다. 이건 기존의 언어와 다른 뉘앙스와 언어를 갖게 되는 것. 그게 천사의 언어. 계시는 천사적 지각을 획득해서 인간성을 탈피하는 것이다. 인간성을 탈피하는 것이기에 계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본질이 고유한 본질에서 분리된 채로 변이하고 있는 중인 것. 그것이 바로 계시. 계시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언어로 말하게 되는 것. 그 언어는 계시받는 자가 마음으로 깨닫는 것.

예언자는 언어화를 해서 기억해야 한다. 언어로 기억해서 알려주기 위해서는 자기가 온 마음으로 깨달아야 한다. 예언자는 깨달은 자인 것. 기독교에서는 예언자를 이성을 가진 자라고 한다. 이성이 신의 부분. 인간에게는 욕망은 신의 부분이 아니다. 이성만이 신의 부분. 신은 빛. 빛이 인간에게 깃들어 있는 것이 지성. 그런데 인간은 빛에서 등지고 앉아 있다. 그런 사람들은 계시를 받지 못하는 불신자. 그런데 계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에게 있는 신적인 부분, 즉 이성을 가지고 신을 향해 돌아 앉아야 한다. 신을 향해 앉은 자들이 신은 빛을 내리쬐주고 그래서 눈이 먼다. 그런데 이슬람에서는 이성도 넘어가는 어떤 것. 다른 지각과 다른 언어를 갖는 문제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성을 떠나는 문제.



(12) 2장 11번. 지도력과 앗사비야


씨족들이 공통된 계보에 속해 있더라도 각자의 앗사비야가 있다. 부족 안에 씨족이 있다. 씨족들은 각자의 앗사비야가 있다. 그리고 그 씨족의 계보가 공통의 유대보다 훨씬 강한 유대감이 있다. 여기 안에서 가장 앗사비야가 강한 애들이 타 부족을 정복한다. 이건 거의 니체. 더 큰 힘을 가지고 다른 것들을 정복하는 원동력이 앗사비야. 정복의 비밀. 긍지와 위신. 이들의 비밀이란 바로 위신. 앗사비야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은 그 씨족이 가지고 있는, 다른 씨족들을 정복할 만한 자긍심. 그런 사람들이 다른 씨족을 정복하게 된다. 그리고 정복을 통해서만 존재하고 정복은 앗사비야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자연스러운 진화과정 같은 것은 없다. 개체성을 상실하지 않은 집단의식.

앗사비야의 비밀은 고귀함. 앗사비야가 두려울 정도로 강하고 고결할 때. 이것이 앗사비야의 비밀. 누구에게 가르쳐준다고 해서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존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이걸 빼앗을 수도 가르쳐 줄 수도 없는 것.

왜 원시부족이 많은 장식을 하고 있는가. 그건 내가 어떤 땅에 속한다고 말하는 위신의 표현인 것. 그래서 가장 계급이 높은 사람이 가장 많은 것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사람인 것. 그게 뭘 의미하는가, 장식이 상징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가장 위신이 작은 사람이 가장 상징할 많나 것이 없다. 그런 명망도 결국은 도시인들에게 동화되면 사라져 버린다. 4대까지만 가능. 왕권의 징표도 그들에게 자질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 이븐 할둔은 결국 역사 속에서 이스람 제국의 형성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힘은 결국 외부, 영토화가 가장 안 되는 세력이 세상을 리프레쉬한다.

베두인은 가장 왕권과 거리가 멀다.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전쟁 기계 같은 것. 전야민으로 길들여진 사람들은 도시 생활을 원하지 않게 된다. 언제나 국가를 형성하는 세력의 외부에 있는 자들. 여전히 국가화 되지 않고 남아있는 존재가 있다. 이게 전쟁기계. 전쟁기계도 국가화 될 수 있지만 여전히 국가에 복종하지 않는 존재가 있는 것. 그래서 왕권에 거부하는 삶을 산다. 그래서 기질 자체가 왕권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이들이 종교화가 되면서 왕권의 주인이 된다. 그러니까 종교라는 것은 그 거친 인간들을 길들이는 방편이라는 점도 봐야 할 것. 이슬람의 위대함이라는 생각도 있는 것. 하지만 이븐 할둔의 서술이 균질적이지 않기도 하다. 이슬람이 사막 애들을 길들이고 제국을 만들었는데, 그런 것을 거부하는 자들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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