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예술인류학 8주차 후기

작성자
한역
작성일
2019-10-10 18:46
조회
193
공공미술의 효과는 무엇일까요? 공공미술이라고 칭하는 것 중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념 조형물의 형태를 뒤집어놓거나, 예리한 문제의식으로 공공 영역에 개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리처드 세라가 미국 연방 조달청사 앞 광장에 설치했던 ‘기울어진 호’는 그것이 완공된 1981년 당시에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특히 청사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반발이 심했다고 합니다. 흉물스럽다는 견해와 통행하기 불편하다는 견해, 시민들과의 거리감이 조성되고 있다는 이유로 말이죠. 많은 사람들에게 '공공미술'은 특정 장소의 기능을 대표하거나, 근처에 세워진 건물의 일부라는 인식이 견고합니다. 예를 들면 분수대 근처에 설치된 아기천사 동상에서 물이 쏟아진다던지, 우리나라 대법원 앞에 세워진 ‘정의의 여신상’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에 비하면 세라의 작품은 의도가 다소 모호할 만큼 단순하고 이질감이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재밌는 것은 호의 설치 이후, 인근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광장이라는 공간이 근처에 있는 건물과 별도로 환기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진행했던 여론조사에서 오히려 적지 않은 시민들은 설치된 것이 통행에 불편을 야기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세라의 작품은 결국 철거됩니다. 여기서의 공공성은 모두에게 합의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새로운 논란과 함께 공간과 장소에 대한 낯선 고민을 던지면서 작동합니다.

역사적 기념물(메모리얼)의 경우에도 예를 들면 워싱턴 이오지마 기념관 앞에 설치된 동상처럼, 자신의 조국을 위해 싸웠던 군인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애국을 실체화하는 양식의 조형물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충원이나 5.18 민주묘지에도 앞선 양식과 유사한 조형물이 많이 발견됩니다. 독일 하르부르크 지방에 설치되었던 <하르부르크 반파시즘 기념비>(1986∼1993)는 2차 세계대전의 참극에서 스러져간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한 조형물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총탄에 맞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구현하려는 시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검은 정사각형의 육면체에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들의 한쪽에 하르부르크를 방문하는 시민들의 추모글이 적혀지고, 작품의 표면이 채워질수록 기념비는 서서히 낮아지면서 처음 공개된 1986년 이후부터 7년 간 점점 소멸하다가 1993년에는 지상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혹자는 이것을 두고, '반反기념비적 기념비'라고 평가했습니다.

여기서 애도는 무엇일까요? 단지 기억해야할 사람의 모습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한 행위일까요. 세상에 없는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과거의 모습을 박제하고 이를 우러러보는 시선 속에 가둬야할까요. 하르부르크 반파시즘 기념비에서 환기되는 애도에 대한 감각은 기억과 망각을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기념비는 묻습니다. 어떤 것을 기억하는 과정에는 망각이 함께 작동하지 않느냐고. 여기서 애도는 과거의 사건과 현재가 맺는 그때 그때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변이하고 생성하는 시간성이 반영된 행위입니다. 앞선 사례에서 발견되는 공공미술의 효과는 기억의 특권화된 표상이나 아름다운 어떤 것을 공간에 실체화하는 것으로 작동하지 않고, 어떤 공간을 둘러싼 다른 감각, 공간에 담긴 기억을 저마다의 입장에서 재구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줍니다. 이때 예술적인 활동은 본래부터 아름다운 어떤 것이나 예술적 활동을 특권화시켜 숭배하려는 태도와 거리가 멉니다.

예술과 노동의 규정성을 문제 삼는 안토니오 네그리는 예술을 '비물질노동'의 일환으로 보고 있습니다. 네그리에 따르면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우리가 노동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노동, 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부터 이윤을 끌어낸다고 진단합니다. 예술 활동과 생산 활동이 서로 무관한 영역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네그리는 “예술 작품은 항시 자본주의 시대의 모든 대상과 마찬가지로 분리불가능한 두 사물, 즉 상품이자 활동인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여기서 저에게 떠오른 것은 유투브 크리에이터들의 사례입니다. 언뜻 보면 이들은 개인적인 재미를 추구하면서 노는 것 같은데, 자신들의 활동에 인센티브가 부여되고, 이런저런 후원이 제공되면서 노는 것과 노동하는 것의 구별이 모호해지는 경계에 놓여있는 것 같습니다.

네그리는 오늘날 숫자로 추상화된 자본처럼 노동이 ‘노동한다’는 것에 대한 구체성을 상실하듯, 노동과 예술의 주체와 객체가 서로를 참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체제의 외부를 만들지 않고, 모든 것을 자본주의적 질서 안으로 위치시키는 현 시대(‘제국’)에서 네그리는 예술적 표현 욕망은 역설적으로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신체와 운동을 다른 방식으로 생산”하는 예술적 역설에 대한 네그리의 믿음은 ‘다중’의 운동성을 명쾌히 긍정합니다. 그렇지만 통일된 집단의 욕망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중의 예술적 표현 욕망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 제국적 질서 내에 포획되지 않은 채로 다른 것을 시도하는 힘들을 어떻게 분석할지, 다중과 대중의 분할선은 무엇인지, 네그리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채운샘은 네그리의 주장에 담긴 명쾌함과 한계를 지적하면서, 랑시에르를 언급했습니다. 랑시에르는 우리의 감성은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분할을 어떻게 재생산하는지, 또한 기존의 분할선에 갇히지 않는 예술 경험을 어떻게 이미지를 통해 붙들 것인지에 대한 논의에서 네그리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자본의 영역에 속한 미를 해체하고 또 다른 미를 생산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이자, 이것은 결국 자신의 실존양식을 바꾸는 문제와 함께 간다는 문제의식까지 아우르는 맥락에서 말이죠.

<반딧불의 잔존>에서 디디-위베르만은 아감벤, 벤야민, 파졸리니를 인용하면서 이들 사이의 공통된 문제의식을 발견합니다. 아주 단순히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이미지(스펙터클)가 강력한 ‘서치라이트’로 작동하는 현 시대에, 이들은 구원을 바탕으로 한 묵시적인 세계관에 근거하여 시대의 절망을 목격했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일례로 현 시대의 모든 영화들은 자본의 투자와 회수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독립영화든 블록버스터든, 자본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생산물을 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최소한의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고, 전통적 영화상영 및 배급 시스템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관객과 만나기 위한 토대를 만드는 시도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홍상수 감독 같은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말입니다.) 대기업과 갤러리에서 대대적으로 후원해 주는 몇몇 작가들 외에 예술가들은 어떻게 세계와 관계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남습니다.

디디-위베르만은 ‘잔존’이라는 개념을 말합니다. 잔존은 어둠에서 벗어난 상황(구원)의 도래를 가정하지 않습니다. 디디-위베르만은 파괴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만이 구원을 믿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자본주의가 아무리 우리의 실존 양식을 일률적으로 규정하고 있을지라도, 모든 것을 하나의 가치로 환원하지 못하는 것들이 발견된다는 것. 그렇다면 잔존하는 존재의 실존 양식은 어떻게 발견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파괴된 폐허 속에서 미미하게 빛나는 존재를 포착하려는 자의 욕망이 있는 한 발견된다고 디디-위베르만은 말합니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로라 워딩턴은 한밤중에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아프간 지역의 난민들의 모습을 촬영했습니다. 난민들의 모습을 찍는 과정에서 밝은 조명과 같이 촬영에 필요한 안정된 세팅이 동원되지는 못했습니다. 발각되면 즉시라도 목숨을 잃을만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에서, 워딩턴은 자신이 찍고 있는 난민과 함께 공명하지 않으면 촬영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달아나는 난민의 움직임을 담는 과정에서 로라 워딩턴은 차마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이미지를 포착합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춤을 추는 것 같은 흔들리는 잔영의 이미지가 카메라에 담겼던 것입니다. 채운샘은 이것을 두고 ‘느닷없는 뜻밖의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술가는 '최소한의 존재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자들의 이미지'를 어떻게 포착해야 하는가에 대해, 디디-위베르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하기”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하기’는 타인에게 전달되는 와중에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찍는 자와 찍히는 자의 분할은 사라집니다. 잔존하는 ‘반딧불-민중’은 “‘왕국’의 서치라이트에서 도주하며, 불가능한 것을 감행하며,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의 욕망을 긍정하며, 그들의 고유한 미광을 발산하며, 그 미광을 다른 이들에게 보”냅니다. 채운샘은 ‘반딧불-민중’을 들뢰즈가 말했던 ‘미래의 민중’과 비교했습니다. 예술과 정치의 맥락에서 이들은 예술적 안목을 갖추거나, 진영논리 속에서 정치적 안목을 갖춘 자들이 아니라, 절망과 희망의 틈새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삶의 문제와 마주한 소수자들입니다. 다수적인 것이 특정한 계급 집단으로 환원될 수 있는 형체가 있는 자들이라면, 소수자들은 어떤 형체로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실존 양식을 실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번 시간은 공공미술을 비롯해, 예술과 정치에 대한 네그리와 디디-위베르만의 견해를 배웠습니다.
예술 인류학 시즌3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동안 함께 공부하신 분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전체 1

  • 2019-10-10 20:55
    이번 시즌에 읽은 책 중 <반딧불의 잔존>이란 책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 미미하게 빛나는 존재, 잔존의 이미지를 포착하려는 자의 욕망이 있는 한, 사리진 것처럼 보이는 잔존의 빛이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하는 위베르만의 관점이 전 감동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또한, 공공 미술 특강에서 본 <하르부르크 반파시즘 기념비>가 던져주는 질문이 오랜 여운을 남겼습니다. 뭔가를 기억하고 기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기념비하면 항상 박제되고 고정된 상태만 떠올렸었는데, 이것은 현재의 기억과 새롭게 관계맺으며 기억이 재구성되어 가는 과정을 '사라지는 기념비'로 형상화했다는 점이 신선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감각의 분할선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의 느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