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예술인류학 7주차 후기

작성자
박주영
작성일
2019-10-06 14:54
조회
148
7주차에는 이와사부로 코소의 「유체도시를 구축하라」를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책에서 흥미를 느꼈던 주제를 서울 등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적용해보는 것이 과제였는데요. 예술가들이 모여 살며 활동을 해왔던 홍대와 문래동, 성수동 등에서 그들이 오히려 젠트리피케이션을 통해 쫓겨나고 배제되는 문제, 모든 도시를 균질화하고 있는 도시개발 문제, 공간의 대상화 및 낭만화, 신체성과 분리될 수 없는 공간의 문제, 이주노동자들이 배제된 공간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 동안 공부를 하면서 제가 사는 공간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이번 세미나 시간을 통해 제가 얼마나 공간을 대상화하고 낭만화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즉 한옥촌, 벽화마을, 오래된 골목길이 있는 산동네 등 저에게는 낭만화를 불러 일으키는 공간들, 여기에서 저더러 살라고 한다면 아마 ‘No'라고 하겠죠. 왜냐하면 이런 공간에서의 삶은 저에게 너무나 많은 불편을 주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서촌, 북촌, 한옥마을 들에 대해 언급할 때 그 공간에 대해 낭만적으로 접근하며 이 공간의 보존을 너무나 쉽게 얘기합니다. 그 공간속에서의 삶이나 사람들은 배제한 채 박제한 공간, 스펙터클 장치, 관광지로서 여기기 때문이겠죠. 공간과 삶을 분리시키는 이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일단 한옥, 오래된 골목과 계단, 숲 등은 유지하기를 바라면서 나는 깔끔하고 편리한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하는, 이런 마음을 먼저 봐야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안정, 편리함에 대한 욕망은 자본과 결합하여 신도시 등 도시재개발을 통해 도시를 점점 더 균질화하고 타자를 배제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고 있어요.

세미나 발제 중 최근의 서초동 집회가 코소가 얘기하는 ‘사회적 과정의 유토피아’, ‘거리의 형성’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는데, 채운샘은 현재 이뤄지고 있는 집회 및 운동과 80년대 시위에서 무엇이 다른지 봐야한다고 했습니다. 최근의 집회들은 국가의 승인을 받고 경찰의 보호하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파를 떠나 ‘서초동 집회’든 태극기 부대의 ‘광화문 집회’든 유사한 방식임을 말해주고 있죠. 특별히 누군가가 주도하지 않고 산만하게 이루어지는 시위지만, 거리를 점령하는 자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과거 시위는 비밀리에 이뤄졌고 거리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신호가 발생하면 학생들이 모여 거리를 점거하고 공간을 전환시키는 방식으로 행해졌습니다. 물론 군부독재 반대 등 정치에 대한 문제에 집중된 2000년대 이전에 비해 2002년 월드컵 붉은 악마, 2008년 광우병 반대 집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사람들이 모인 점은 다양한 목소리가 나온 것에 대해 의의를 둘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붉은 악마도 2006년부터 KT의 후원을 받게 된 것처럼 자본이 금방 이를 포획한 점 등은 다시 새겨봐야 할 것 같아요. 혁명, 집회, 축제 등 자생적인 행위들도 자본에 의해 금방 재영토화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목소리가 정치 옹호/비판의 이항구도로 환원되는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중심을 거부하고 정치단체와 연결되지 않는 프랑스 노란조끼 시위와 구분이 되는데요. 우리의 시위가 주로 정치인의 옹호와 비판의 구도로 이뤄지고 있는 것, 경찰의 보호아래 안온하고 평화롭게 시위를 하는 것(우리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시위라고 생각하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봐야 합니다. 우리의 시위는 이질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의견이 같은 자들끼리 동질화를 강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우리 사회는 왜 의견의 불일치가 지속되는 상황을 못 견디는 것인가? 다른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배제하는가? 과연 우리에게 이질적인 목소리가 난립하는 광장과 거리는 있는 것인가?

세미나 시간에도 얘기했지만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공간은 매우 균질적입니다. 아파트단지, 빌딩, 쇼핑몰 등. 그런데 이 공간들은 마을이 사라진, 즉 누가 옆에 있는지, 그 동안 누가 살아왔는지 등 이야기가 없는 곳입니다. 제가 학교를 다녔던 80-90년대를 생각해보면, 이웃, 친구네집에 놀러갈 때 미리 약속을 하거나 초대를 받았던 기억은 없습니다. 학교 끝나고 그냥 갔고, “oo야 놀자” 하면서 친구네 집에 불쑥 들어갔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우리가 정주의 기술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즉 마을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기술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저희는 아파트 옆 동에 누가 사는지 궁금하지 않고 이웃과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제 아파트는 단지와 평수가 중요하고, 리모델링과 인테리어만 이루어지는 공간일 뿐입니다. 우리는 구획된 공간에 잘 수납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나는 집을 잘 가꾸고 편안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주의 기술을 잃어버린 채 물건처럼 아파트 공간에 수납된 존재네요. 이웃들은 물론 집, 물건들과 관계를 맺는 기술을 잃어버리고, 이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사들이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 봐야할 것 같습니다.

공간은 신체성과 따로 떨어져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파트, 빌딩의 공간은 우리의 욕망으로 건설된 것이기도 하지만, 이 공간은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향을 줍니다. 한 방에서 여러 명이 사는 것과 각자 독방에서 사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신체성의 생산, 공간의 생산, 시간에 대한 관념 형성은 다 같이 갑니다. 「유체도시를 구축하라」를 통해 뉴욕 센트럴파크의 폭력성에 대해 알 수 있었는데요. 기존 거주민들의 방출, 많은 노동자들의 노동을 통해 조성된 센트럴 파크 뿐만 아니라 저희가 살고 있는 근린공원 등 편의시설 형성이 이뤄졌던 폭력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저희가 누리는 아름다운 것들, 편안한 것들 뒤에 숨겨진 것들. 공원이 만들어지기 전에 그 공간을 점유했던 자들에게 가해진 폭력들. 판자촌을 밀고 형성된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은 물론 자연친화적인 공원들도 사실은 그 공간에 있었던 동물을 추방하고 배제시킨 덕에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펑펑 쓰고 있는 물, 전기들을 생각해보면, 댐 건설을 통해 잠겨버린 마을, 밀양문제로 알게된 송전탑 건설로 피해를 보는 주민들 등 우리는 수많은 폭력을 통해 편안하고 안온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다만 이것들은 가시화되지 않고 숨겨져 있기에 우린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깁니다. 나치만 파시스트고 위생주의자인 것이 아닙니다. 쓰레기장, 교도소 등 혐오시설을 거부하고 안전하고 깔끔한 공간을 원하는 우리들도 위생주의자인 거죠. 우리는 공간을 타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생각하다보니 공간을 떠올릴 때 누구와 무엇을 함께하는 문제는 배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거리는 이에 대한 문제를 빼고 생각할 수 없는데요. ‘누구’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공동체와 거리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축제는 기존 공간을 다른 공간으로 변환시키는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집을 축제하기 위한 공간으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보다는, 축제를 하기 위한 공간을 찾는데 익숙합니다. 예전에는 생일파티를 주로 집에서 했었는데,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의 생일파티를 위한 공간을 찾고 빌립니다. 집에서 책을 보고 공부를 해도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독서실이나 도서관을 가는 등 어떤 행위를 위해 맞는 장소를 가야한다는 마음, 공간의 활용에 대한 무능력도 생각해볼 지점입니다.

그 전에 읽었던 랑시에르와 코소가 보는 예술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는 예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제가 일하고 있는 ‘금융’에 대해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노동이라고 얘기되지만, 예술은 노동과 다른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인 견해입니다. 그렇기에 예술가가 돈을 위해 작품을 만들거나 돈을 따지면 비난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이러한 점이 오히려 예술품의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무엇을 노동이라고 생각하는지 봐야 하는데, 노동은 화폐가치로 교환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지반에서 예술은 화폐가치가 다르게 산정되는 무엇으로 볼 수 있어요. 그런데 화폐가치로 산정되는 노동은 근대에 들어선 개념이죠. 그렇다면 근대 이전에 생각하던 예술과 지금의 예술은 다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근대이전 건축물, 예술품에는 작가의 서명이 거의 없었습니다. 서명을 통해 작품이 예술가에게 귀속되며, 서명을 통해 그 작품이 유일무이해집니다. 어찌보면 예술가라는 존재가 부상하면서 어떤 작업을 예술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예술이 탄생된 것으로 여겨지는 16C 이전에는 길드를 통해 회화, 건축 등이 수행되었습니다. 보티첼리의 경우 매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이는 길드를 통해 여러 장인들과 함께 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반면 미켈란젤로의 경우 공동작업을 싫어해서 대부분 혼자 제작했다고 하는데, 이런 사유로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적은 편입니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미켈란젤로 뿐만 아니라 다빈치, 라파엘로 등 뛰어난 예술가가 출현하는데요. 이때부터 창조(Creativity)가 부각됩니다. 이전에는 신만이 창조할 수 있었고 인간은 신의 창조물을 복사(Copy)했던 존재였어요. 다빈치 등 뛰어난 예술가들을 통해 인간에게 신적개념이 부여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지금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예술도 중세가 지나고 나서 출현되었다는 점,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예술가(Artist)는 19C 낭만주의 시대에 발생한 것입니다.

예술은 일상생활을 탈영토화한 것으로 실용성과 아름다움 사이의 간극을 발생시킵니다. 예전에는 美와 실용성이 괴리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빛깔이 고운 고려청자는 고려시대에 분명 술잔, 술병 등 그릇으로 사용되었고, 사용되면서 특이한 색깔이 표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고려청자는 미술관, 박물관에 전시된 예술품으로만 기능합니다. 현재 우리에게 예술품이란 전시가치 외에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죠. 실용성이 제거되어 감상을 목적으로 하는 물건, 예술품은 근대에 등장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감상하는 다양한 작품들은 전시만을 목적으로만든 것이 아니에요. 집이든 교회에서 사용되는 등 실용성이 배제되지 않았습니다. 예술품이 물건에서 완전 탈영토화되면서 이와 함께 예술도 노동에서, 예술가도 노동자에서 탈영토화됩니다. 요약하면 예술, 노동, 여가는 근대에 동시에 탄생합니다. 화폐적 가치로 보상을 받는 ‘노동’이 있어야 그와 다른 가치를 갖는 예술, 여가도 가능합니다. 사실 과거에는 우리의 활동을 이것은 노동, 이것은 예술, 이것은 여가로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같이 음식을 하는 것도 수다를 떨면서 하다보면 여가처럼 느껴질 수 있고 예쁘게 차려놓으면 그것이 예술처럼 보일수도 있겠죠. 우리는 지금 이들의 분리가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회사에 가서 보낸 시간은 노동, 집에서 보낸 시간은 여가 이런 방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 생활을 떠올리면 과연 회사에서 기계적으로 일만 하는 것인가? PC에서 엑셀작업을 하면서 몽상을 하는 것, 이런 것도 노동인가? 어떤 활동에 대해 이것은 노동, 이것은 휴식 이렇게 구분짓는 것이 가능한지 질문이 드네요.

코소는 기존 영토화된 예술을 비판하며 행동주의 예술을 떠올리는 ‘사회적 과정의 유토피아’를 주장했는데, 사실 이런 개념이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미 1960년대 상품이 될 수 없는 일회적인 퍼포먼스를 표방한 예술이 등장합니다. 1960년대 개념미술가들이 이런 퍼포먼스를 많이 했고, 1980년대는 이런 행동주의 예술이 유행하게 되는데요. 잠깐 미국의 미술에 대해 살펴보면, 미국은 역사가 짧기에 문화가 없다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는데 1,2차 세계대전 등으로 유럽에서 망명한 작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추상의 논리를 만든 그린버그, 로젠버그 등을 통해 추상미술의 메카를 뉴욕으로 만들며, 미국 미술이 곧 현대미술이라는 등치를 성립하게 되었는데요. 추상미술은 기존 미술권력과 자본에 금방 복속되었습니다. 코소는 미술관으로 환원될 수 없는 예술을 지향하며, 미 금융위기 이후 빈 공간에서 펼친 예술을 높게 평가하지만, 채운샘은 행위를 넘어서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랑시에르처럼 예술품의 생산 문제를 넘어 예술적인 것의 생산에 대한 질문, 기존 우리에게 익숙한 분할선을 의심하고 해체하는 지점. 그리고 과연 지금 예술가들은 누구와 소통을 하고 있는지, 더 나아가 우리가 모든 문제를 자본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과연 자본이 원인인지, 아니면 우리의 무능력인지 등 다양한 문제들이 보입니다. 저는 예술에 종사하지 않기에 어쩌면 예술과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쉬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현재 작가들에게 가장 고민이 되는 지점은 전시기회, 작품의 가격 등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금융업에 종사하기에 제가 하는 일에 대해 가치를 느끼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예술가들은 자신의 노동을 특별하게 생각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작품가격 등 화폐가치에 의존할 수도 있습니다. 예술가들이 화폐가치, 전시가치를 넘어 다른 질문을 갖고 활동해야 아닌가 싶어요. 내 작품을 누구와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제도와 자본이 아닌 예품의 소통은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이는 예술가만 가져갈 질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랑시에르가 말한 것처럼 예술가는 물론 관람자인 저희같은 사람들에게도 수 많은 분할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적으로 아름다운 것만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관람자의 분할선은 전시가치를 지향하는 예술가의 분할선과 같이 갑니다. 먼저 저에게 깊게 새겨진 분할선은 무엇인지 잘 봐야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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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07 23:51
    저도 기능으로 분할된 공간에 수납되는 방식이 너무 익숙한 나머지,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할 것인가'란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우리의 욕망과 공간은 분리할 수 없고 공간이 우리의 삶의 양식을 규정짓는다는 점에서 이 질문이 중요하게 다가 왔었습니다.
    두 시즌 동안 함께 공부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