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4학기 2주차(10.30) 공지 / 생각함에서의 품위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10-26 15:39
조회
186
 

 

4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 읽기 시작한 <즐거운 학문>은 정말 아름답고 밝은 기운이 넘치는 복음서 같습니다. 보석 같은 문장들이 곳곳에 박혀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본문 뿐 아니라 서문과 시에도요. 아무튼 좋습니다. 4학기 에세이를 쓰는 동안 이 건강한 책에서 인사이트를 많이 얻으면 좋겠습니다. 오전에는 바뀐 듯 안 바뀐 듯 새로운 조를 뽑았습니다. 마지막 학기를 함께 보낼 도반들과 찐한 만남을 이어가 봅시다. 저희 조 토론에서는 ‘배움의 자세’ 혹은 ‘생각하는 것에서의 품위’에 대해 재미난 이야기를 길게 했습니다. ‘품위 상실’이라는 한 단편에서 시작했죠.

 

“숙고는 그것이 지니는 모든 형식의 품위를 잃어버렸다. (...) 우리는 가장 진지한 문제를 생각할 때도 너무 빨리, 어떤 과정 중에, 길을 가는 도중이거나 모든 종류의 일 한가운데서 생각한다. 우리는 준비도, 조용한 시간도 거의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 예전에는 더 현명해지기 위해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은 누구에게나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 기도하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걸음을 멈추고 생각이 “찾아오면” 몇 시간 동안 한 발로, 혹은 두 발로 길 위에 서 있었다. 이것이 “생각하는 일에 어울리는 품위”였다!”(6절)

 

정말 많은 생각을 일으키는 문장입니다. 저희가 은연중에 저지르는 착각 중 하나는, 생각하는 일은 물리적인 시간이나 장소와 독립되어 있다는 믿음입니다. 어디에 있어도, 뭘 하고 있어도,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식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생각을 잘 하기 위해 환경을 정비하거나 몸을 가다듬고 준비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똑같이 번다하게 지내는 중에 애꿎게 미간만 찌푸리지요. 그런다고 생각이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 주변에 짜증을 뿌릴 뿐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우리 시대의 특징이지요. 데카르트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어쨌든 ‘내가 생각한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장소나 시간, 풍토나 섭생에 상관없이 내가 판단하고 의심한다고 말이죠. 어느 정도 영향 받는다고는 하겠지만 그래도 주어는 ‘나’입니다. 그래서 저는 책도 글도 아무렇게나 틈을 내서 읽고 쓰면 된다고 여겨왔던 것 같습니다.

니체는 이것을 두고 품위의 상실이라고 말합니다. 니체는 고대인들의 예시를 들며, 생각함에 있어서의 품위를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생각에 사로잡히기 위해 준비하고 조용한 시간을 마련하죠. 더 현명해지기 위해서요. 생각이 찾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찾아온다면 몇 시간이고 일상의 흐름을 중지하고 그것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냅니다. 이런 태도의 저변에는 자신이 생각을 좌우하는 주체라는 전제가 없습니다. 생각들은 불현듯 찾아오고, 마치 날씨나 물살처럼 우리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잘해봐야 그것들을 맞이하는 수신기일 뿐이죠. 이렇게 우리 자신을 생각의 주체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여기서의 윤리는 어떻게 좋은 수신기가 될 것인가입니다. 즉 어떻게 미세하게 우릴 스쳐가는 진동들을 민감하게 맞이할 것인가, 어떻게 그것들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주파수를 정돈할 것인가, 내게 낯설고 우둘투둘한 손님들을 위해 얼마만큼이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가. 이것이 생각하는 일에서의 품위입니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 다른 생각과 다른 삶의 태도에 영향을 받고 자신을 변형시킬 줄 안다는 것은 이와 같은 자세 정비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이러한 능력은 자신의 기존 생각 방식과 습관을 꺾거나 약화시키는 일과도 관련됩니다. 동양에서는 이것을 ‘재계(齋戒)’라고 하는데요. 배움을 위해서나 종교적인 의식을 치르기 위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하는 일종의 정화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은 단지 나쁜 것을 없애는 위생적 행위가 아니라, 자신에게 찾아오는 어떤 자극에도 접속할 수 있도록 마음을 가장 고요하고 강렬한 파장으로 유지하는 것이죠. 마치 무예가들이 대련 직전에 취하는 자세나, 서퍼들이 파도 위에서 거듭 바꿔 잡는 무게 중심이나, 궁수들이 시위를 놓기 직전에 고정시킨 눈빛처럼요. 여기서 핵심은 이전의 상식적이고 일상적이고 습관화된 분별체계인 ‘자아’가 작동하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흔들려버리고 찾아오는 미세한 진동을 놓치고 마니까요. 이를 두고 모리스 블랑쇼라는 소설가는, 시를 쓴다는 것은 시가 시인에게 다가가는 사건이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때 시인의 생각을 채우고 있던 것들이 비워지지 않으면, 즉 그의 ‘자아’가 죽지 않으면 다가갔던 시는 자아의 열기 앞에서 녹은 눈처럼 지저분한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린다. 시가 쓰인다는 것은 시가 시인에게 다가갔을 때 그의 안에 있던 ‘누군가’가, 그 때까지 시인이 ‘나’라고 불렀을 누군가가 죽는 것이다.”

하여 저희는 “우리는 길고 위험한 극기 훈련을 거쳐 다른 사람이 된다”는 말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뜨겁고 단단한 자아를 문지르고 패대고 쳐대는 것이고, 열기를 식히고 말랑하고 섬세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고대나 중세 어디를 봐도, 배움을 비전으로 하는 공동체에는 신체적 고행이나 수련 과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묵언, 금식, 기도, 오체투지 등. 난희샘은 절간에서 수련한 경험을 재미나게 들려주셨는데, 그때 밥 짓고 빨래하고 비질하는 경험(책은 한 자도 못 보게 하고!)이 노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불쑥불쑥 일어나는 자기의 정신과 마음의 습관 및 패턴을 죽이고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임을 이해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해 그리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왔으며, 이러한 사정은 지금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 지식을 체화하여 본능적으로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새롭고, 인간의 눈에 희미하며, 전혀 명료하게 인식되지 않은 과제이다. 이 과제는 오로지 우리의 오류만이 우리에게 체화되어 있으며 우리의 모든 의식은 오류와 관계되어 있음을 파악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과제다!”(11절)

 

지식을 체화하여 일종의 본능으로 만들기. 저희가 늘 고민하는 앎과 삶의 일치, 배운 대로 느끼게 되는 사건은 무척이나 어렵고도 중대한 과제입니다. 우리는 배우면 ‘응 알겠군’하며 손쉽게 넘어갑니다. 그러나 그 배운 것이 소화되고 습득되어서 그대로 세상을 감각하게 되는 것은 별개의 일이죠. 여기에는 의식에 대한, 자아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우고자 하는 자는 우선 우리의 의식이 오직 오류에서 짜여진 그럴듯한(따지고 보면 허술한) 서사임을 투철하게 체감해야만 할 것입니다.

 

*학술제가 다가오고 있네요. 저희는 두서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던져보았는데요. 비대면이라는 조건 속에서 이전과 달리 인간관계의 무게를 덜 겪어도 된 우리(특히 학생들)은 어떤 전재가 될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친구나 더 힘이 센 사람과도 지내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자유로운 걸까요? 또한 백신과 마스크, 혹은 각종 의료정보 등으로 실제로 국민 건강은 증진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우리는 니체가 말하는 의미에서 더 건강해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즉, “더 많은 의문부호를 갖게 되고, 특히 이제까지 물어왔던 것보다 앞으로는 더 많이, 더 심오하게” 우리 자신의 삶의 사건들에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었을까요? 직접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의료전문가들에게 몸을 맡겨서 관리를 받을 뿐,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에 대해 더 진지해지지는 못한 것 아닐까요? ‘나 자신의 의사되기’가 이 판데믹과 함께 시도되었을까요? 또 주변의 시선 이야기도 했었죠. 나는 싫지만, 회사나 국가나 상부기관의 방역 명령은 거절할 수 없을 것 같죠. 부조건 반대를 외치는 것도 무조건 수용하는 것 만큼이나 반응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괜히 역적으로 보이는 것도 두렵지요. 여기서는 윤리의 문제도 고민됩니다. 대체 고귀한 방식으로 이 국면을 겪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더 생각해와서 다음 시간에 논의해보아요!

 

공지

-<즐거운 학문> 79절(~143쪽)까지 읽고 이야깃거리(간단하게) 준비해오기

-<안티고네>를 읽고 이야깃거리 준비해오기

-4학기 에세이 : 선택한 소설에서 에세이 작성에 필요한 재료를 모읍니다. 각자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되 토론 때 공유할 거리는 간략하게 준비해오기

 
전체 1

  • 2021-10-29 10:34
    공동체의 신체적 수련과정에 축구가 빠졌네요. 지난주 감독아닌 감독을 하며 드리블하고 패스하며 슛하는 모습에 자아를 잊어버린 네 양기의 춤을 보았습니다. 시가 내게로 오듯 공이 내게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