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차탁마 NY 4학기 2주차 후기

작성자
인영
작성일
2021-11-01 02:31
조회
282
일 곱하기 일. - 한 사람은 항상 오류다. 두 사람과 더불어 진리가 시작된다. 한 사람은 자신을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이미 반박할 수 없다 「프리드리히 니체, 안성찬ㆍ홍사현 옮김, [즐거운 학문], (책세상) 248쪽 260절」

이런 니체의 짧은 금언을 읽으면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한 문장씩 왜? 왜? 라고 곱씹어 보며 질문하는 가운데 문장에 함축된 의미를 풀어보게 되기 때문이죠. 이렇게 니체의 사유가 다듬어진 금언을 접하다 보면 더 어렵기도 하지만 그래서 매력적이기도 합니다. 수학 공식에서 1 곱하기 1은 당연히 1이고, 이 공식 안에서 1은 오류도 없고, 모두 같은 1이죠.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어떤 조건, 어떤 사람과 관계하는 가운데 자신이 드러나기 때문에 자신은 하나의 고정된 진리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관계의 산물이라는 점을 니체는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음, 그렇구나’ 하지만 개인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세계가 가족, 직장 등에 한정돼 있어 일상에서 체험으로는 이전과 다르게 생각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니체로 읽는 문학] 세미나에서 니체의 텍스트와 문학 작품을 함께 읽으면서 ‘왜 우리에게 문학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에 답을 생각해 봅니다. 작가가 창조한 허구의 세계이지만 작품 속 인물들이 겪어나가는 불가해한 사건들을 통해 조원들 각자의 해석들이 부딪치고 모여 자신의 한정된 경험이 흩어지고 다시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도대체 선악이 뭐지? 정의란 뭐지? 인간이란 뭐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개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고 의문이 생긴다는 점에서 그렇죠. 마치 여러 가지 다양한 맛으로 자신과 세계를 음미할 기회라는 점에서 이 마지막 학기 그리스 비극은 이 세미나의 마지막 만찬으로 우리에게 펼쳐져 있는 셈이죠. 왜소한 근대인의 내면을 후벼파는 작품들을 읽으며 왠지 더부룩했던 속을 그리스 비극은 이 세미나를 마무리할 후식으로 정말 멋진 배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감당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자신이 보고 있던 세계를 다르게 볼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한 영양섭취! 이 마지막 만찬을 각자의 몫으로 잘 음미하길 바라며, 2주차 후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안티고네] : 힘과 힘의 충돌

니체는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만의 진실을 확신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가진다고 합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허점이 드러나지만, 인간은 자기 정당성이 진실이라고 믿고 행합니다. 그래서 확신은 상대에 대한 우위를 점유하기 위한 자기 정당성일 뿐이죠. 확신을 확신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책하는 자도 그런 방식으로 자기 힘을 증명하고 우위에 서고 싶어합니다. 각자의 진실이 옳다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 그리스 비극의 세계, [안티고네]를 읽으면서 저의 질문은 ‘서로 옳다고 여기는 가치가 대립할 때 무엇이 정의이고 최선일 수 있을까?’였습니다. 규범화된 법과 그것을 넘어서는 인간의 윤리에 관해 무엇이 옳음인가? 또 법과 윤리에 복종하거나 불복종한다는 것이 서로 다른 덕의 추구일 때,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일까? 습관적으로 정의, 옳음, 최선, 지혜와 같은 관념적인 답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주요 인물들이 결과적으로 죽음에 이른 책임을 심판자의 관점으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강의에서 국가 통치를 위한 규범과 관습을 정의로 명명하는 크레온의 힘과 그것을 거부하고 넘어서는 인간의 윤리를 실행하고자 하는 안티고네의 힘겨루기로 보았을 때, 이 비극이 던지고 있는 질문을 다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크레온은 규범, 질서화하려는 지배 권력 중심의 남성적 힘으로, 안티고네는 그 질서 밖의 세계,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고 부수려는 힘 그리고 생명을 돌보는 여성적 힘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니체적으로 말하면 이 힘이 능동적이고 삶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가느냐, 반응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향하느냐고 볼 수 있고 그 지점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니체는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라고 묻지 않고 어떤 힘이 추동하는 방향이 또 다른 긍정의 힘을 가져오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 관점으로 보고자 합니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은 이 힘겨루기에서 끝까지 갑니다. 결과는 각자의 감당함으로 남습니다. 크레온은 아들 하이몬의 칼을 피했지만 결국 그 칼은 아들의 목숨을 가져갑니다. 아들의 죽음을 소식으로 접한 아내마저 자결하고 홀로 살아남은 크레온은 비탄에 잠깁니다. 예측할 수 없었던 잔혹한 결과를 마주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뒤늦게 깨닫고 정의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불행을 통해 배웠다, 내가 손대는 일마다 잘못되고, 감당할 수 없는 운명이 나를 덮쳤구나라고 말합니다. 크레온이 배운 정의는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의 본의 아니게 가족들이 죽음에 이르게 된 상황을 자신의 죄라고 여기고 다른 이에게 원망을 전가하지 않습니다. 비극의 인물들은 누가 옳은지 그른지 무엇이 정의인지 판단할 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인간이 운명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하는지 보여줍니다. 그리스 시대에 비극이 상연되고 나면 아테네 시민들은 이 비극 속 불가해하고 부조리한 인간의 운명에 대해 논쟁을 했다고 합니다. 수천 년이 지나 읽는 우리에게도 그리스 비극의 잔혹하고 끔찍한 이야기는 삶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기존의 판단을 모두 헤집어 놓습니다.

“독창성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 있는데도, 아직 이름이 붙여있지 않아 불릴 수 없는 것을 보는 것. (...) 이름이 붙여져야 비로소 그 사물이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독창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명명자들이기도 하다「프리드리히 니체, 안성찬ㆍ홍사현 옮김, [즐거운 학문], (책세상) 248쪽 261절」

니체의 말처럼 그리스 비극은 삶의 잔혹성을 통해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삶, 보지 않으려 했던 삶의 이면들을 그 어느 시대보다 독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을 추동하는 힘들이 부딪치고 어떤 힘이 옳다, 그르다 결론 낼 수 없는 것으로써 세계는 존재한다는 것을 비극은 보여줍니다. 한 인물의 고정된 시선으로 이 세계를 판단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게 비극의 세계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정치, 철학을 사유할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그래서 니체의 철학은 이러한 그리스 비극 활용법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지금까지 하나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고 있었구나, 세계는 보편적일 수 없구나.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삶을 보여줌으로써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무엇을 인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필멸의 인간 삶을 저주하지 않고, 닥쳐오는 일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긍정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와 같은 여러 질문과 고민을 가지고 나머지 비극의 세계를 읽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가치 판단으로부터 볼 수 없었던 세계를 다르게 느낄 수 있도록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2.[즐거운 학문] : 자신의 고통을 직면하라, 그런 삶이 건강한 것이다!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 너는 이 삶을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은 모든 경우에 최대의 중량으로 그대의 행위에 얹힐 것이다! 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그대 자신과 그대의 삶을 만들어나가야만 하는가?” 「프리드리히 니체, 안성찬ㆍ홍사현 옮김, [즐거운 학문], (책세상) 315쪽 341절」

강의에서 [즐거운 학문]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으로 위 구절을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복사, 붙여넣기 삶을 원하는지요? 니체의 질문은 그저 복붙하는 삶을 원하라는 아니죠. 저희 세미나 이름이 NY인데요. 무엇의 준말인가 하면 ‘니체, 예스’라고 했던 것 같네요. 니체의 긍정은 답이 아니라 어떤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무거운 질문으로부터 가벼워지기 위한 ‘어떻게’를 생각해 볼 구절들이 [즐거운 학문]에는 담겨있습니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 제2판 서문에서 자신의 책을 회복기에 들어선 환자의 끊임없는 감사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건강에 대한 희망, 축제에 비유하며 즐거움이 넘칩니다. 가장 아팠던 시기에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요. 우리가 자신의 병에 대해 자각했을 때, 무엇이 문제인가 질문을 끝까지 가지고 갈 수 있겠죠. 그러니 병을 앓는다는 것은 건강을 찾아갈 수많은 샛길을 탐색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나의 문제가 사람들도 함께 겪는 문제임을 발견할 때 문제는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이어갈 수 있으며, 그 이해가 자신의 문제로부터 떠나 세상을 맞닥뜨리는 방식을 새롭게 조형할 수 있게 합니다. 니체는 실제 삶에서 자신의 병으로부터 회복기를 끝없이 실험합니다. 교수직을 그만두고, 자신의 몸에 맞는 풍토와 기후를 바꾸기 위해 사는 곳을 떠나고, 섭생을 바꾸고, 가족 관계로부터도 떠나죠. 병의 통증으로 인해 산책을 7~8시간 하면서 짧은 메모를 작성해 자신 글의 문체 형식도 바꾸죠. 그의 고통은 신체뿐만 아니라 시대의 병으로 읽히며, [즐거운 학문]은 기존의 도덕, 인식, 학문, 예술 등에 대해 새롭게 질문을 던집니다. 근대의 가치들이 인간의 삶을 진보시키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들고 있는지. 오히려 그것들이 인간의 삶을 이상주의와 낙관주의로 도피시키고 허무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근대의 가치속에서 병의 징후를 읽고자 합니다. 그래서 근대의 인간이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이 진단을 통해 어떤 건강을 만들어갈 것인지 묻습니다.

니체의 철학은 지금 생을 긍정하면서 수많은 종류의 건강 상태를 만들어가기 위한 현재적 질문 속에 있으므로 대중 철학이라는 말씀을 들으니 새삼 새로웠습니다. 매번 니체의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어렵기도 하고 또 실천하기 힘든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자신의 번뇌에서 출발해 문제를 발견하고 그 문제로부터 떠나 실천할 수 있는 지점들을 계속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니체를 알게 된 것이 행운이고 기쁜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에게 문제는 늘 발생하고 반복되고 있는데, 다른 것으로 보상하려는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놓치고 있으면 어떤 역량도 가질 수 없습니다. 자신을 아프게 하는 통증을 눈앞에 쉬운 진통제로 덮으려고 한다면 말이죠. 고통을 상상하는 고통, 일상의 작은 고통도 앓기를 회피하고 아예 고통이 없는 세계, 현재의 삶의 변환시키지 않고 꿈만 꾸는 세상은 지금의 삶을 원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뒤따를 불확실한 결과를 감당할 수 있어야 생을 원하는 것 아닐까요. 고통을 직면하는 것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점에서 병과 건강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건강이라고 믿고 있던 생각했던 것 속에서 병을 발견하고 병 속에서 건강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것! 이런 사유 속에서 병과 건강은 완전히 다른 명명이 됩니다. 기존의 고통을 느끼는 방식, 무엇을 고통이라고 확신하고 있는지 근본적인 회의를 통해 더 나은 우리가 아니라 심오한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기존의 해석과 관점을 떠나기 위해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필요하며, 우리 자신 스스로 직면하는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니체는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대 자신과 그대의 삶을 만들어나가야만 하는가?’라는 니체의 물음을 순간마다 자신의 행위에 얹어봅시다. 니체는 '커다란 고통이야말로 정신의 최종적인 해방자' 라고 합니다. 고통을 제거하고, 어떤 이상적인 상태를 꿈꾸지 않고, 기존의 안정과 행복이라는 관념을 원하지 않는 생을 살아 봅시다! 삶에 대한 사랑의 방식을 바꿔봅시다! 니체는 '삶이 의무나 저주받은 숙명이나 기만이 아니라 인식하는 자의 실험이 될 수 있다'라고 했으니까요. 위의 질문에 결단을 요청하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아래에 덧붙이며,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우리 모두 파이팅!! (^^)

그냥 있어도 주어진다.” 이것 또한 저 체념이 가르치는 바이다. 그러나 나 너희,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말하련다. 그냥 있어도 빼앗기게 되며 더욱더 많은 것을 너희는 빼앗기게 되리라!. , 너희가 반 푼어치의 의욕을 모두 털어버리고, 나태든 행위든 결심이 서 있다면어느 때고 너희가 원하는 것을 행하라. 그러나 너희는 그에 앞서 원할 줄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 너희가 나의 말을 이해한다면. “이웃을 항상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러나 그에 앞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정동호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84쪽 3부 왜소하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
전체 4

  • 2021-11-01 20:56
    오오, 비극으로 에세이를 준비하시는 인영샘! 마구 쏟아져나오는 니체의 구절들을 보니 어떤 에세이가 만들어질지 기대되네요 ㅎㅎ
    후기를 읽다 보니, 결국 니체는 우리에게 욕망에 있어서의 최상의 형태, 사랑에 있어서의 최상의 유형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원하기에 앞서서 원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 사랑하기에 앞서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니체의 요쳥은 그 방향을 삶 전체, 운명 전부로까지 키우는 작업을 말하고 있는 듯해요.
    니체의 이런 보살적 경지에 새삼 감동하고 갑니다 ㅎㅎ

  • 2021-11-02 21:40
    최고의 후기!!! 긍정이란 결단을 요구한다는 것, 콕콕 저의 양심을 찌르네요.

  • 2021-11-03 20:24
    인영샘
    충실하고 친절한 후기 잘 읽었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 2021-11-03 21:56
    고통을 기준으로 건강과 병을 구분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