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NY 4학기 6주차(11.27)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11-23 17:56
조회
231
 

저희는 <즐거운 학문>을 읽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주 범위에서는 무척 아름다운 구절들이 많이 있었어요. “새해에”, “행동함으로써 내버려 둔다”, “단기적 습관”, “준비하는 사람”, “자신의 성격에 양식을 부여하는 것”, “예술가에게 배워야 할 것”, “매일매일의 역사” 등의 구절들은 가능하다면 외워서 언제든 소환하고 싶은 문장들입니다. 개인 소장의 욕구가 뿜뿜하는 동시에 학인들과 오래오래 이야기하고픈 내용이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예상치 못한 구절에서 시작했습니다. “스토아파와 에피쿠로스파”라는 구절인데요. 무려 세 분이나 선택해오셨고 풍성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에피쿠로스파는 극도로 민감한 자신의 지적 체질에 적합한 상황과 인물, 사건들만을 선별하고, 다른―대부분의―것들은 포기해버린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것들은 그에게 너무 질기고 부담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스토아파는 돌과 벌레, 유리 조각과 전갈을 삼키고도 구역질을 하지 않는 훈련을 쌓는다. 실존의 우연성이 그에게 쏟아 붓는 모든 것을 그의 위가 마침내 아무렇지도 않게 소화해내도록 만들려는 것이다.”(306절)

주섬주섬 들어온 바에 따르면, 자연의 섭리와 필연을 중시하는 스토아주의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중시했습니다. 그렇기에 죽음이나 상실과 같은 극한 조건을 가정하며 그 상황을 관조하고 표상을 점검하는 자기 통제의 훈련이 시행되었지요. 그들은 정치계부터 거리의 회랑까지 모든 곳에서 철학을 했습니다. 반면 자연에서 이탈과 우연을 보는 에피쿠로스주의는 ‘지속적이고 정적인 쾌락의 향유’를 중시했죠. 그를 위해 쾌락을 침해하는 행위, 정념, 억견들을 삼가고 계산하는 기술을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우정을 키워갈 수 있는 정원에서 철학을 했지요. 저희는 이 두 학파의 차이를 두고 ‘소화’라는 키워드로 이야기했습니다. 니체는 모든 것을 소화하는 위장을 비판한 적이 있지요. 취향을 갖지 않고 뭐든 먹고 뭐든 자신에게 허용하는 근대인의 무딤에 대한 지적이었죠. 이것은 자칫 스토아주의에 대한 비판이자 에피쿠로스에 대한 옹호처럼 읽힐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고통에 대한 두 학파의 태도가 좋다 나쁘다 하며 우열을 비교하는 것처럼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뒤에서 니체는 어떤 시대 어떤 조건이냐에 따라 두 길은 각각의 유용성을 가질 수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가령 “운명의 즉흥성에 내맡겨져 있는 사람들” 경우, 폭력적이고 돌발적이고 변화무쌍한 시대에서는 스토아주의가 권할 만합니다. 반면 “운명이 그에게 긴 실을 자아내도록 허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에피쿠로스주의가 권할 만합니다. 우리 시대는 어떤 시대일까요? 그리고 정확히, 운명이 긴 실을 자아내도록 허용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희는 전자는 20세기 초중반의 전쟁과 변혁이 일어나던, 운명 앞에서 무엇도 할 수 없을 긴박하고 잔혹한 시대로, 후자는 그와는 달리 어느 정도 우리 손으로 우리의 생활을 조직할 수 있는 평균성의 시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취향을 위해 무언가를 분리시키고 선별해낼 수 있는 에피쿠로스주의의 길이 필요한 듯합니다. 물론 매끈한 조건 외에 견디지 못하는 유약함을 위해서는 스토아주의의 길도 필요해보이구요.

그리고 이 두 길은 확실히 그리스도교의 길, 더 분명하게는 현재 우리처럼 자기 구원과 극복의 모든 수단과 주체를 사제(제도와 서비스와 전문가와 라이센스)에 맡겨 버린 자본주의의 길과는 무척 다르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고대 철학에서는 방법론의 차이는 있어도 행복에 이르는 수단도 주체도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희는 아이스킬로스의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을 읽었습니다. 두 가지가 기억나네요. 첫 번째는 그리스인들에게 신들이란 어떤 존재일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오레스테스는 제우스에게 부르짖으며 협박에 가까운 호소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대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제물을 바치셨는데도 그러한 아버지의 자식들을 그대가 죽게 내버려두신다면 앞으로 누가 그대에게 정성껏 제물을 바치겠나이까?”(254-256) 이렇게 일갈하고, 제 복수를 도우라는 협박을 당해야 하는 신이라니! 그리스인들에게 신은 공정하고 선한 절대자, 언제나 진리를 가지고 있는 위엄 있는 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 또한 오레스테스의 친구 퓔라테스는 “만인을 적으로 만들지언정 신들을 적으로 만들지는 말게”라고 말하고,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어머니가 “신들의 미움을 샀다”고 말합니다. 이 대사들에서 드러나는 것은 신들이 누군가의 편을 들고 누군가에게 미움이나 호의를 품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협상하고 편을 먹고 서로 척을 질 수 있는 존재로서의 신들. 이 감각이 세계를 더 풍성하게 느끼고 운명에 더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아가멤논 가문의 원한의 수레바퀴였습니다. 오레스테스는 이걸로 끝나지 않음을 아는데도 복수를 감행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복수이지만 어머니를 살해하는 일인, 이중 구속임을 아는데도 말이죠. 극의 결말에서 오레스테스는 자신이 복수에서 얻은 건 “피로 얼룩진 자랑스럽지 못한 승리뿐”임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어머니로부터 나온 ‘원한에 찬 개들’의 환영이 그를 덮칩니다. 저희는 이들에게는 원한과 분노를 ‘끝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의는 복수를 참는 것, 서로 잘해주는 것,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당하고 복종하고 감행하는 것이 정의이지요. 즉 불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다음이 뭐가 오든 갚아주는 것이 선입니다. 그렇기에 권선징악, 즉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은 없습니다. 어떤 정의도 거기서 또 씨앗이 생기지요. 이전에 아가멤논이 딸을 바쳤던 것도, 한 국면을 넘은 줄 알았는데 또 씨앗이 되지요. 비극은, 삶은 닥치는 것이고 거기서 매번 살아가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지

-<즐거운 학문> ~347(~357)까지 읽고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아이스킬로스 <페르시아인들>을 읽고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에세이 초고 전주입니다! 최대한 많이 쭉쭉 써옵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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