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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탁NY 4학기 5주차(11.20) 공지 / 생겨나는 것으로서의 의욕과 필요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11-16 15:25
조회
224
 

 

원인과 결과에 대한 오해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는 그것이 인간(혹은 유기체)의 근본 오류라고 이야기했었습니다. 가장 빈번하고도 벗어나기 어려운 것은 자유 의지에 대한 생각이겠죠. 우리는 “무언가를 행하는 경우, 예를 들어 무언가를 가격하는 경우, 그것을 가격하는 것은 그 자신이며, 그가 그것을 가격한 것은 그가 그것을 의욕했기 때문이라고”(127절)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것은 오해임은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행위이든 생각이든 욕망이든 그것은 ‘나’라고 이름하기 어려운 너무나 많은 요인들(컨디션, 장기들의 조화, 기억, 표상, 날씨, 시선 등) 전부가 어우러져 작용한 합작입니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라는 닦달에 대답할 수 있는 꽁꽁 숨어있는 ‘진짜 내 욕망’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일찍이 스피노자가 말했듯 우리는 욕망한다는 것은 알지만 왜 그렇게 욕망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역으로 추적해서 ‘그것이 좋기 때문에’라고 원인을 상정합니다. 우리 마음에 대해서 이렇게 막무가내인데 바깥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오죽할까요? “원래부터 인간은 어떤 사건을 목격하는 모든 경우에, 원인으로서 작용하는 의지와 인격을 지니고 의욕하는 존재가 그 배경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127절) 행위에는 행위자를, 사건에는 동기를, 고통에는 죄를! 마주하는 현상들에 원인을, 그것도 무척이나 빈약한 경험에 근거한 원인을 부여하는 것은 아주 뿌리 깊은 습관인 것 같습니다.

니체는 의지를 독자적인 것으로 믿지 않기를 당부하며 세 가지 명제를 제시합니다. 1) 의지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쾌와 불쾌의 표상이 있어야 한다. 2) 어떤 자극이 쾌 혹은 불쾌로 느껴지는 것은 우리에게서 대부분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지성의 해석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자극이 쾌로도, 불쾌로도 해석될 수 있다. 3) 지성적 존재에게만 쾌와 불쾌, 의지가 주어져 있다. 욕망은 표상들을 경유하며 자라나고, 좋고 나쁨의 느낌은 의식 바깥 차원의 해석 작업으로 발생합니다. 이 말은 제게 이렇게 해석됩니다. 우리의 욕망과 생각, 즉 우리가 무언가를 원하고 판단하는 방식은 만들어진 것이라고요. 무척 복잡하지만, 전혀 알 수 없는 것만은 아닌, 그래서 우리의 표상들, 우리가 듣고 읽은 담론들, 놓여 있는 물질적 배치들, 형성한 가치들을 묻고 해부하는 일로부터 이해 할 수 있고, 이해하는 만큼 바꿔볼 수 있는 것이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바꾸거나, 혹은 같은 것을 이전과는 다른 근거 위에서 원할 수 있는 것이죠. 니체가 윤리와 함께 비윤리도 거부한다고 말하며 권유했던 것이 이것인 듯합니다. 윤리적 행위를 하는 것도, 비윤리적 행위를 삼가는 것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근거들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르게 배워야만 한다. 아마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후가 될지도 모르지만, 마침내 더 많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 즉 다르게 느끼기 위해.”(아침놀, 103절)

저는 이번 주 강의에서 이반 일리치의 이야기가 무척 기억에 남았습니다. 일리치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언제부터 사람들은 필요(needs)를 가지고 태어났는가?” 교육, 의료, 수송수단, 각종 제도나 서비스 등의 필요는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우리는 언제부터 필요를 ‘결핍’과 동일시하기 시작했을까요? 이에 응답하는 듯한 니체의 구절이 있습니다. “필요―필요는 발명의 원인이라고들 한다. 실제로 필요는 발명된 것의 결과에 불과한 경우가 종종 있다.”(205절) 생각해보면 우리 시대는 너무나 풍요로워졌지만, 그만큼 무언가 없다는 느낌, 갖춰야 한다는 강박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일리치는 이것을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이름했지요. 우리가 ‘마땅히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식이나 재산, 건강, 권리 등은 원래부터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제도나 미풍양속과 더불어 만들어진 것입니다. 필요와 욕망의 발생에서의 제반조건을 이해할 때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하고 사용할지 스스로 결단할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서 일리치가 마이크를 사용을 거부한 것은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일리치는 기술이 단지 나쁘다는 이유로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일리치에게 기준은 시종일관 우리 손발의 능동성, 타자와 관계 맺을 수 있는 역량에 있습니다. 니체의 표현으로는 우리 자신의 힘의 고양에 있죠. 어떤 기술은, 혹은 그 기술을 이용함에서의 어느 수준은 우리의 역량과 기쁨을 증가시킵니다. 그렇지만 어느 임계영역을 넘어서면 그 도구가 우리를 무력하게 하고 반응적으로 행동하게 만듭니다. 마이크라는 도구는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이고 정성을 보내는 역량과 말하는 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사용하고 마음을 전달하는 역량을 감소시킵니다. 일리치는 바로 그러한 근거 위에서 마이크를 거부한 것입니다. 의료나 교육에 대한 문제제기도 그렇지요. 일리치야말로 자신의 윤리를 전과는 다른 근거 위에서 구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좋다 나쁘다의 이분법 속에서 의식적으로 기술과 제도를 바라보고 있던 저로서는 그 모습이 무척 멋지게 보였습니다.

비극에 대한 인상 깊은 토론과 강의는 난희샘의 후기에서 확인해주세요!

 

5주차 공지

-<즐거운 학문> 328절(~297쪽)까지 읽고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아이스퀼로스의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을 읽고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4학기 에세이 3쪽 이상 써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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