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4학기 7주차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0-11-28 23:55
조회
279
에세이를 쓰는 길은 여전히 더디고 막막합니다. 예정대로라면 이제 본론에 진입해야 했지만, 아직 문제의식의 구성이나 질문이 잘 안 됩니다. 몇 주째 반복되는 서론에 좀 지친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끝까지 써나갈 수 있겠죠! 우리 모두 파이팅입니다!

다음 주에도 계속 각자의 문제의식을 더 다듬어 오시고, 본론을 진행하시면 됩니다. 텍스트는 《야만적 별종》은 그대로 가져오시고, 《전복적 스피노자》 2~3장을 읽어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현정쌤께 부탁드릴게요~

스피노자의 놀라운 점은 접속할 수 있는 철학의 범위가 매우 넓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사회가 성립하고 해체되는 역동적 지평을 정서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습니다. 마트롱 같은 스피노자주의자들은 그러한 점으로부터 ‘정치사회는 이성이 아닌 정서의 작품’이라고까지 얘기했죠. 처지는 서민이지만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외치는 후보자를 찍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정치를 정서의 차원으로 접근하면 설명되는 지점들이 생겨납니다. 스피노자의 뛰어남은 사회를 정서의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설명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경제의 역동적인 움직임 또한 정서를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소유는 권리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정서모방에 의해 권리로 인정됩니다.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갖고 싶어하는 욕망도 정서모방의 결과입니다. 주식, 투기 같은 돈벌이 활동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이 가는 것도 우리 사회의 정서모방이 그런 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요즘 20, 30대 청년들이 빚을 내면서 투기하는 것이 유행이라고 하는데요. 빚=불행지수인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들이 속한 그룹에서는 ‘빚’이 더 큰 돈을 위한 또 다른 밑천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유난히 다르지 않다면,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크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죠.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손해를 보고, 재산을 갖추지 못하는 것에서 불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부의 양극화 같은 현상은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지점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더욱더 부의 양극화에 박차를 가하는 욕망을 변형시켜야 할 지점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중이란 집단을 사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대중이 정서적으로 합치하도록, 그들이 좀 더 이성의 인도에 따라 살도록 만들 수 있을까요? 전통 맑스주의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서양 철학자들은 대중을 의식화해야 한다는 계몽적 구도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계몽은 실패했습니다. 인간은 끝내 의식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혁명을 해야 한다면 대중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중의 무엇을 믿고 혁명을 시도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혁명에 참여할 수 있는 역량은 어디서 비롯될까요? 혁명할 수 있는 역량을 따로 찾는 순간, 혁명적 역량을 따로 상정하게 되고, 그러한 역량을 일깨워주는 계몽적 구도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네그리는 스피노자로부터 대중이 혁명을 시도할 수 있는 역량이 존재론적으로 항상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분명 대중은 그 자체로 혁명성을 담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스피노자가 봤듯이, 대중은 스스로 더빗 형제를 찢어 죽이고 왕정으로 돌아갈 정도로 무지합니다. 그러나 대중은 존재적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조건화되지만 동시에 조건화되지 않습니다. 네그리가 스피노자의 삶으로부터 그의 사유가 어떤 식으로 발전했는지에 주목한 것도 이러한 정치론을 네그리 스스로 정리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네그리에 따르면, 부르주아의 삶을 살던 스피노자의 사유는 다소 유토피아적이었습니다. 그런 사유로부터 무지에 휩싸인 대중을 마주하는 정치론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가 위기들을 어떻게 넘어갔는지에 대한 통찰이 빠질 수 없습니다.

네그리는 단순히 스피노자의 논리, 철학적 세계가 어떻다고 정리하는 것보다는 그의 삶으로부터 혁명적 사유를 배운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는 그의 시대로부터 윤리-정치를 관통하는 사유를 발명했습니다. 네그리는 자신의 문제의식 속에서 철저히 유물론적으로 독해했습니다. 비록 그는 속성을 범신론적 사고의 흔적, 여전히 극복되지 못한 부르주아적 개념으로 보지만, 사실 네그리에게는 속성의 역할 같은 것을 애써서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네그리에게는 혁명을 위한 대중의 역량을 존재론적으로부터 구성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에세이는 저희 나름대로 스피노자적으로 위기를 사유하는 기회입니다. 채운쌤이 저희에게 해주신 코멘트의 공통점도 스피노자적으로 사유하는 것이었죠. 좀 엉성하고 튀더라도 저희 나름대로 스피노자를 독해하는 길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금방 또 새로운 만남이 있을 겁니다. 모두 잘 마무리하고 내년에 또 새롭게 스피노자와 만나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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