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4학기 8주차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0-12-03 12:13
조회
309
코로나가 다시 2단계로 격상됐지만, 그래도 저희는 스피노자 마무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에세이를 쓰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왠지 지금 쓰고 있는 내용이 이상한 데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서론에 문제제기도 제대로 안된 것 같고... 토론에서 선생님들이 ‘됐다’고 인증해주시지 않으면 불안감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끙;; 채운쌤과 선생님들의 코멘트 덕에 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써나가야 하는지 도움을 받고 있지만, 코멘트 받는다고 해서 100% 소화되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뒤돌아서면 긴가민가해져서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만 쓰고 있었습니다. 결국 글을 쓰면서 갖게 되는 불안감을 해소하는 건 제 몫인 것 같습니다. 글을 쓰고 고민을 구체화하는 작업은 제몫이니, 누구에게 인증을 받기보다는 스스로 불안감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글을 써야겠죠. 매번 에세이 때마다 나눌 이야깃거리를 들고 간다는 생각을 다시 되새기면서 에세이를 진행해야겠습니다. 해야 하는 얘기, 공부해야 하는 개념이 보다 선명해졌으니 이제 엉덩이 붙이고 쓰는 일만 남았네요.

다음 주에도 에세이는 계속 진행하시면 됩니다. 다만 에세이를 쓰실 때는 우리가 겪는 문제들이 어떤 점에서 정치적인 문제를 함의하고 있는지를 같이 생각하라는 채운쌤의 코멘트가 있었습니다. 가령, 공동체의 원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저 같은 경우에는 정치 원리로서의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것과 맞닿아있습니다. 코멘트를 할 때 각자의 문제가 스피노자가 제기한 어떤 문제와 연결되어있는지 같이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텍스트는 《전복적 스피노자》 2장~3장, 6장을 다시 읽으면서 네그리가 제기한 ‘민주주의’를 정리하시면 됩니다. 간식은 봉선쌤, 후기는 경숙쌤께 부탁드릴게요~

에세이를 쓰면서 ‘역량’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역량의 증대’를 생각하면 ‘이전에 하지 못했던 것을 하게 되었다’, ‘이전에 돌파하지 못했던 문제를 돌파하게 되었다’는 식의 동일한 주체의 성장으로 향하게 됩니다. 하지만 생각을 포함한 모든 행위는 주체가 아닌 관계로부터 비롯된다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동일한 주체를 상정하는 것이 이미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역량의 증대와 감소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채운쌤은 역량의 증대를 주체화의 문제와 연관 지어서 강의하셨습니다. 1960년대 주체화를 고민한 세 명의 철학자로 네그리, 들뢰즈, 푸코를 꼽으셨습니다. 구조주의의 ‘주체는 관계의 산물이다’라는 주장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철학적 문제를 남겼습니다. 특정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주체에게 가해지는 부담입니다. 그러나 특정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특정 집단에 소속될 수도 있습니다. 특정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우리는 ‘안전과 평화’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구조주의의 주장은 사회주의의 혁명과 다른 의미에서 사람들에게 해방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관계의 산물이라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일까요? 주체로부터 해방되긴 했지만, 안전과 평화를 느끼기 위해서는 다시 주체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 주체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었죠.

특히 들뢰즈는 주체를 해체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도주하라”고 얘기했던 그는 《천 개의 고원》에서 “신중하라”고 바뀝니다. 도주는 죽음의 선을 탈 수도, 생명의 선을 탈 수도 있습니다. 들뢰즈는 생명의 선을 타는 도주선의 발명을 위해 배치에 대해 더 깊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네그리, 푸코의 문제의식도 이와 비슷합니다. 주체로부터의 해방은 곧 다른 주체로 구성되는 문제를 포함합니다. 푸코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이렇게 구성되는 동시에 어떻게 이렇게 구성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네그리는 푸코, 들뢰즈의 문제의식과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고 했는데, 채운쌤은 그 부분이 존재론적 지평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조주의가 제기한 주체가 구성되는 지평을 ‘다르게 주체를 구성할 수 있는 발생적 차원’으로 전유한 것이죠.

새삼 제가 네그리의 문제의식을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고리타분하다고 평가하는 데에는 ‘그것은 이제 효과적이지 않다’, ‘틀린 철학이다’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네그리는 어떤 권력(potestas)도 다중의 역량(potentia)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어떤 권력이 부단히 작동하더라도 그것을 해체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맑스주의자인 네그리는 맑스적인 시각에서 혁명적 계급을 끝내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반면에 푸코, 들뢰즈는 가장 사소하고 내밀하다고 할 수 있는 욕망을 바꾸는 것에서 혁명을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철학이 더 정답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겪는 문제를 돌파하는 데 그것이 효과적이라면, 그것이 어떤 철학이든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채운쌤은 역량의 증대를 ‘더 많은 실험을 하는 것’, ‘차이화’라고 해석하셨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다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다른 실천을 시도하는 것이죠. 네그리, 푸코, 들뢰즈는 각각의 문제를 돌파하기 위한 도구로 스피노자를 사용했습니다. 그들의 새로운 논의가 곧 역량의 증대로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저의 문제를 돌파하기 위한 도구로 스피노자를 쓸 수 있는지 이번 에세이에서 시도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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