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세미나

9월 8일 <트러블과 함께하기> 깜짝세미나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1-09-14 23:03
조회
215

어떻게 우리는 덜 치명적이 되고, 더 응답-가능하게 되고, 더 조율되고, 더 놀랄 수 있게 되고, 손상된 지구에서 복수종의 공생, 공-산, 공영혼발생 속에서 잘 살기와 죽기의 예술을 더 잘 실천할 수 있을까? 이를 다시 배우기 위해 우리 시대에 시급한 결정과 변화는 어떠한 보증 없이, 혹은 자기 자신이 아닌-그리고 안전하게 타자도 아닌-자들과의 조화에 대한 기대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도 아니고 타자도 아닌 그것이 언제나 그래왔듯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가이아라고 불리든 천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든, 오만한 홀로바이옴으로 드러난 지구에서 우리는 모두 존재론적으로 더 창의적이 되고 더 현명해져야 한다. (<트러블과 함께하기>, p.167)


좀 늦었지만...기억을 더듬어 9월 8일 <트러블과 함께하기> 2부 후기를 써 봅니다^^(대망의 3부는 민호가 올려줄 거예요~)


2부에서는 <트러블과 함께하기>3~5장을 읽고 책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줌으로 세미나를 진행하는데도 무려 전원 출석! 늦은 시간까지 많은 분들이 남아 계셔서 놀라기도 했고, 그만큼 <트러블과 함께하기>가 제시하는 문제가 흥미롭고도 시의성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트러블과 함께하기> 3장은 1,2부에서 제시한 '실뜨기'의 일환이라 볼 수 있는 각종 예술 프로젝트를 소개합니다. 산호초 코바늘뜨기, 마다가스카르의 여우원숭이 그림책과 교재 만들기, 월드 게임 제작, 디네족의 베짜기가 그것입니다. 이런 예술적 실천이 '트러블과 함께하기'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왜 '함께 되기'에 예술이 필요할까? 이런 예술 프로젝트가 정말 현실적인 것일까? 이런 질문들이 토론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해러웨이는 3장에서 '홀로바이옴'이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홀로바이옴/홀로언트는 단위unit나 존재being를 포기하고, 거기 남는 새로운 패턴과 이름을 갖는 공생관계로서의 존재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다른 것들과 섞이고, 말려 들어가며 공생하고 있는가.


해러웨이가 소개하는 예술 프로젝트는 다양한 분야가 말려든 '공-산 프로젝트'입니다. 이것은 어떤 제도적인 예술적 성취와 관련이 없습니다. 다만 모든 것이 말려들어가 있지요. 코바늘로 산호초를 뜨면서 산호초가 그리는 쌍곡선공간을 인간이 손으로 만들고, 만지고, 여기에 수학 이론과 예술이 섞여들어갑니다. 마다가스카르 사람들과 그곳에만 서식하는 여우원숭이와 연구자들이 국경을 초월해서 말려들어가고요. '네버 얼론'은 게임 제작과 에스키모족의 이야기와 그들의 혼령이 말려들어있는 독특한 게임입니다. 나바호 베짜기는 디네족의 역사와 나바호 츄로-양과 식민주의적 에너지 산업에 저항하는 운동이 말려들어가 있지요. 어느 하나의 분야가 거기서 성공을 이루고, 중심이론이 되고, 다음 시대를 이끄는 제도가 되는, 그런 식의 운동은 적어도 예술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해러웨이는 보여줍니다. 모든 것은 '함께 되기', 우리와 이 지구를 공유하고 체험을 공유하는 '친척들'과 함께 논의하면서 헤쳐나가야 하지요.



(나바호 츄로-양)


해러웨이는 예술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이야기를 쓰기도 합니다. 그것이 5장의 '카밀 이야기'이지요. 카밀 이야기는 5대를 거쳐 '반려종'과 실뜨기를 주고받는 일종의 SF입니다. 읽고 있으면 기분이 묘하죠. 카밀은 기계와 결합해서 더 멀리 보거나 멀리 뛰는 '포스트 휴먼'으로서의 사이보그가 아닙니다. 카밀은 왕나비의 촉수를 턱에 이식하고 반려종과 공생관계를 이루기 위한 아슬아슬한 실뜨기를 하지요. 여기에는 어떤 성공적인 이야기의 결말 같은 것은 없습니다. 카밀은 결국 5대까지만 이어지지요. 말하자면 실뜨기에서 실을 놓친 것입니다. 여기에는 보존해야 할 무엇, 일종의 순수성에 대한 경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카밀이 할 수 있는 것은 반려종 친척들과 함께 하기 위해 패턴을 짜는 것 뿐이고, 그것은 언젠가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종과 "어떠한 보증 없이" "기대 없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토론 때 제기한 '현실성'이나 '필요'에 숨어 있는 성공적이고 안전한 제도와 발전에 대한 기대를 돌아보게 합니다.


'트러블과 함께하기'는 결국 문제를 나와 상관없는, 치워버려야 할 것으로 보면, 같은 문제가 거듭될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책 같습니다. 인간으로 인해 다른 종이 고통받고 있다, 인간이 나쁘다, 라는 말은, 사실 그 고통 받는 그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인간은 그들과의 관계를 떠나 살 수 없고, 성립되지도 않습니다. 다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 종과 '함께' 할까 뿐이겠지요. 기대나 절망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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