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세미나

9월 9일 <트러블과 함께하기> 후기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9-15 15:36
조회
231
<트러블과 함께하기>는 너무나 새롭고 어렵고 얘기하고 싶은 책입니다. 지난주 깜짝 세미나에서 만난 신선한 충격을 더듬더듬 적어보겠습니다.

희망과 절망을 넘어 : 휴먼(human)이 아니라 휴머스(humus, 부식토)가 되기

서문부터가 강렬했다. 꼭 나에게 꼬집어 하는 말 같았다. 해러웨이는 인류세의 공포 앞에서 우리가 흔히 취하곤 하는 두 태도를 말한다. 하나는 기술적 해법 혹은 신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믿음이다. 전기차를 타면, 수소 핵융합이 되면, 영화 <승리호>에 등장하는 나노로봇 따위가 발명되면 문제가 해결되리라. 신의 얼굴을 한 기술 혹은 신 자신이 위기에 처한 자손을 구하러 올 거라는 어처구니없지만 마음만은 편한 낙관이 한편에 있다. 다른 편에는 비관이 있다. 이것은 훨씬 더 무시하기 어렵고 위험한 반응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게임 오버’라는 감각이다. 이 단어가 내게 콕 박혔다. 만약 세대를 나이로 규정할 수 있다면, 밝고 명랑하고 열정적으로 보인다고 해도 우리 세대 안에는 다른 세대에게 없는 체념과 냉소가 있는 것 같다. N포라던가 보수화라던가 빚투라든가 하는 경향이 있다 해도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모두가 집을 사지 못하는 건 아니며 그런 욕망을 갖지 않는 청년도 분명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환경과 생태의 위기 앞에서는 뜻이 같다. 가망이 있을까, 너무 늦었다, 뭘 할 수 있겠나. ‘기후 우울증’이라는 말이 있다. Z세대의 특징이라 불리는 이것은, 태어났는데 이미 방사능이 퍼져있고, 기후는 엉망이고, 영구동토층에서 고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에 의한 우울증이라고 한다. 곳곳에서 인간은 망했다고 하는 말이 조소와 함께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뱉어진다. 우리는 이미 상황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래서 뭔가를 열심히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냉소를 보인다. 나도 그랬다. 한때는 UN의 꼭대기에 가서 지구를 구해보고자는 야심도 품었지만 지금은 분리수거를 하면서도 헷갈린다. 이게 뭔 의미가 있나. 어차피 매립되거나 소각될 것이고 쓰레기는 다른 곳에서 쏱아져 나올텐데.

“우리는 각자의 전문 지식과 경험에 갇혀 너무 많이 알 뿐만 아니라 너무 적게 한다. 그래서 절망이나 희망에 굴복하는데, 어느 쪽도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절망도 희망도 감각에, 알아차리는 일에, 물질적 기호론에, 지구에서 두텁게 공존하며 살아가는 필멸의 존재들에 맞추어져 있지 않다. 희망도 절망도, 이 책의 첫 장의 제목인 ‘반려종과 실뜨기하기’를 우리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도나 헤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13쪽)

생각해보면 희망이든 절망이든, 낙관이든 비관이든 그것은 인간이 주인공인 이야기에서만 취해질 수 있는 반응이다. 인간은 인간만이 주연이고 인간만이 예외로 둥둥 떠 있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내려왔고 방주를 띄워 살아남았다. 인간만이 말을 하고 생각하고 예술을 한다. 그러한 인간의 유산이 지금까지의 학문들(humanities)이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많이 알지만 다른 이야기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상황이 나빠지면 빌거나 자책하는 거다. 자기밖에 모르는 꼬맹이가 자신이 너무 가엾어서 우는 꼴이다. 절망도 희망도 이미 공존하며 살고 죽고 있는 너무도 중요한 타자들에 맞춰져 있지 않다. 그럴 때 인간은 지금이 인간이 만들어낸 위기라고 판단하고 그래서 인간이 해결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이것이 인류세 담론의 틀이다. 앞뒤로 꽉 막힌 사고다. 해러웨이는 이것을 사유의 무능이라고 진단한다. 아이히만에게 내려진 진단과 동일하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비상사태로 보고 냅다 알던 대로, 하던 대로 쏘아붙이는 일이 아니다. 핵심은 비상사태가 긴급성이다. 즉각적인 행동이 요구되지만, 무엇보다도 생각이 요구되는 시간이 긴급성의 현재다. “어떻게 우리는 자기-멋대로이고 자기-충족적인 종말의 신화 없이 이 긴급성의 시대에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가 요청했든 하지 않았든, 재귀적으로, 그 패턴은 우리 손 안에 있다. 내민 손이 보내는 신뢰에 대한 대답. 생각하세요.”(66쪽)

그러나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해러웨이의 글에서 내게 가장 와 닿은 언어유희이자 중요한 슬로건은 우리가 휴먼이 아니라 휴머스, 즉 인간이 아니라 부식토라는 표현이었다. 비슷한 표현으로 포스트휴먼이 아니라 컴포스트(compost, 퇴비)가 되자는 말도 있다. 부식토나 퇴비는 무엇인가? 동물인가 식물인가? 생물인가 무생물인가? 그 모든 것이 섞여 있고 서로가 서로로 되어가고 있는 곳이 퇴비고 부식토다. 이것은 분명 배설물과 사체 더미이지만 그것들이 거름이 되어 다른 생명을 키운다. 그 안에서 우글거리는 박테리아들과 크고 작은 생명들이 계속성을 갖고 뜨겁게 운동한다. 해러웨이는 이것이 복수종들의 삶과 죽음이 의존적으로 뒤엉킨 구체적인 형상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휴먼이라는 경계를 허물 때 만나게 되는 풍경이 이것이다. 이런 시공간을 해러웨이는 쑬루세라고 불렀다. 인류세나 자본세가 결코 담을 수 없었던 퇴비의 존재론에서부터 전에 없던 윤리를 요청하는 시공간.

쑬루세의 이 역동적인 더미 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플레이어일 뿐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이미 이러한 뒤섞이는 방식으로만 살아갈 수 있다. 인간-남성-백인-모험가의 영웅적인 이야기는 순진한 옛이야기다. 그 모험은 그가 짊어지고 있는 배낭의 잡동사니들 없이는 가능하지도 않으며 그 잡동사니 플레이어들이, 아니 잡동사니로 간주되었던 크리터들이 바글거리는 곳으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돌리지 않으면 인간은 고립될 것이다. 특히 이 긴급성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생각하세요라는 요청에 대한 응답은, 이야기를 바꾸기, 지금까지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를 이야기하기, 그래서 지금까지 잘 붙들어온 경계를 허물기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새 이미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공-산에 의해 존재한다. 공-산이 개체의 정체성에 앞선다. “크리터들은 관계맺기 이전에는 생겨나지 않는다.”(109쪽) 미소트리카 파라독사라는 미생물과 마찬가지로 우리들 각각은 “하나가 아니고 다섯이 아니고, 수십만 개도 아니다.”(112쪽) 개체라고 경계 세울 수 없는 너무나 많은 크리터들이 얽히고 서로 침투하고, 관통하고, 먹고, 부분적으로 소화하고, 부분적으로 동화시키는 과정이 무언가를 존재하게 한다. 하나이면서 여럿인, 구멍이 숭숭 나서 서로 안으로 말려들고 있는 공생적 집합체. 해러웨이는 그것을 ‘홀로바이온트’라고 말한다. 이것이 쑬루세의 존재론이다. 우리는 홀로바이온트로 존재한다. 그런 이상 낙관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태도고 비관할 것도 없다. 그건 인간이라는 공상적인 경계를 완고하게 붙들 때만 가능한 판타지다. 그 경계 안팎에서, 그 경계를 가로지르며 우글거리는 크리터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우리는 휴먼이기 이전에 휴머스다. 그렇다면 윤리는, 희망이나 절망이 아니라, 이런 이해로부터 어떻게 공-산을 시작할 것인가다.

실뜨기와 반려종

“어느 누구도 모든 곳에 살지는 못한다. 누구나 어딘가에는 산다. 어떤 것도 모든 것에 연결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무언가와 연결된다.”(58쪽) 내게 이 말은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모든 것과 모두 연결되고 모두를 해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몸을 가지고 사는 존재이기에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와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에서 누가 살고 누가 죽는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는지 고민하지 않고서는 고립되고 말 것이다. 플레이어들은 살기 위해 삶의 패턴을 만들고 그것은 연결들 속에서 트러블이 되어 상대편에게 전해진다. 상대는 거기에 응답해 또 다른 패턴을 넘겨준다. 퇴비 속에 이러한 관계맺기의 방식을 해러웨이는 ‘실뜨기’라고 말했다. 나는 이것이 상징인 줄로만 알고 읽었는데, 세미나를 하고 강의를 듣다 보니 정말로 어릴 때 하던 실뜨기 놀이를 말한다는 것을 알았다. 주기와 받기로 이뤄지며, 내민 패턴에 다른 패턴을 만들어 돌려주고, 그 패턴은 언제나 손으로 풀어야하는 문제이고, 그 응답들은 매번 다르게 제시된다. 보통 그것은 “실을 떨어뜨리고 실패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유효하게 작동하는 무엇을 발견하는 것이다.”(23쪽) 우리는 바이러스로부터 하나의 패턴을, 상당히 복잡한 패턴을 건네받았다. 그것은 아마 우리가 건넸던 패턴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유미 선생님께서 강의시간에 하셨던, 어떤 종도 이제는 인간과 실뜨기를 하지 않으려 한다는 말씀이 깊이 와 닿았다. 실뜨기 놀이에서 나는 함정을 파서 게임을 끝내는 게 이기는 거라 생각해서 시작부터 매섭게 공격을 했다. 고수들은 복잡하게 풀어내 되돌려 주었지만, 웬만한 애들은 꼬이거나 풀어져버리는 실을 놓고 등 돌려 가버렸다. 생각해보면 인간도 다른 종들과의 실뜨기에서 매번 함정만을 되돌려준 건 아니었을까. 살처분, 밀렵 및 밀거래, 박멸 등의 함정들. 이런 처사 앞에서 도도새도, 코뿔소도, 북금곰도 다른 수많은 동물들도 그냥 사라져버렸다. 이제 아무도 인간과는 실뜨기를 하지 않는다. 누구도 응답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침묵의 봄이다. 예전에 읽은 글이 떠올랐다.

“인간이 얼마나 파괴적이었던가는 아무도 정확하게 모르지만, 지난 5만 년 정도의 세월 동안 우리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짐승들이 사라져버렸고, 그것도 놀랄 만큼 엄청난 수의 동물들이 사라졌다.”(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 492쪽)

실뜨기를 잘하는 것은 상대를 제압하는 것,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무능력이다. 실뜨기를 잘한다는 것은 더 많은 상대와 더 많은 방식의 패턴-트러블을 주고받을 수 있음이다. 한쪽이 아니라 양쪽이 유능하게 되는 것이다. 실을 떨어뜨려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이다. 실뜨기의 역량은 나와 상대의 역량이 함께 커질 때 커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원하는 것, 그들이 사는 방식에 예민해지지 않을 수 없다. 내민 손이 보내는 신뢰에 대한 응답은 ‘생각하세요’다. 그러나 이때의 생각은 무구하지 않다. 상호 유능하게 되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좋은 것만 하고 나쁜 것은 삼가는 게 아니다. “공생은 ‘상호 이익이 되는’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다.”(109쪽) 공생은 공진화이고 서로 이전의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는 일이다. 이렇게 함께 다른 뭔가가 되어가는 관계를 해러웨이는 ‘반려종’이라고 부른다. 밀고 당기고 먹고 먹히는 관계, 서로를 만드는 관계,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규정성을 부여하는 관계. 이런 관계성은 미리 규정된 것들끼리의 작용이 아니기에, 상호작용(interaction)이 아니라 내부-작용(intra-action)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가령 인간은 소와 함께 살아감으로써 소의 미생물을 공유하고 그 덕분에 유당을 분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과 개는 많은 미생물과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기호들을 공유한다. 이 함께-되기는 무구하지 않다. 여기에는 엄청난 권력관계, 실패, 전염병, 상실이 있어 왔다. 그리하여 반려관계에 들어서서 서로 유능하게 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빨리 달려, 꽉 물어”, “닥치고 훈련해”가 공진화의 슬로건인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죽여서 먹는 존재들에 대해서까지도.

그래서 우리의, 나의 훈련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손들이 우리에게 내밀어지고 있을까? 비록 카밀과 같이 다른 종들의 유전자를 이식할 수는 없겠지만, 나와 실뜨기를 하고 있는 존재들, 그러나 내가 내 이야기에 묻혀서 연결이 되어 있는 줄도 모르는 존재들을 발견하는 일이 그 훈련의 첫 단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내가 ‘너무 적게 안다’는 사실이 아주 선명하게 실감 난다. 세미나의 열기는 식고 나니, 생물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까지 휴먼의 이야기만을 너무 많이 들어왔다. 나, 청년, 인간, 인류 말고 그것들을 늘 넘나들고 이미 바글거리고 있는 다른 크리터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배우고 싶어졌다. <트러블과 함께하기>는 정말 트러블들, 성가신 존재들, 크리터들을 배우고 싶고 만나고 싶고 그들에게 응답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멀었겠지만, 절망에도 희망에도 빠지지 않는 해러웨이 할머니처럼, 하나의 반려종으로서 유쾌하게 실뜨기하며 살면 좋겠다.
전체 1

  • 2021-09-18 12:32
    민호샘, 친절한 후기 숙독했습니다. 실뜨기로 표현된 관계맺기는 '무구하지 않'고 '세속적'이라는 말이 인상깊었어요. 샘은 '너무 적게 안다'에 꽂혔나요? 저는 그 문장에서 '너무 많이 안다'에 찔끔했죠. 그 때 그 앎이란 나와 면한 타자를 향한 뜨거운 관심이 아니라 나와 대립한 너에 대한 부스스한 앎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나마도 긴급성이 사라진 자기충족적인 앎이었다는 생각 말이죠. 정말로 개념 하나가 인류세의 출구 막힌 사유를 뻥뚫어주는 멋진 시간이었어요. 다종다양한 크리터들과 뭔가가 되어가기! 휴먼이 아니라 후무스! 몸이 뜨거워지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