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세미나

[팬데믹 시대에 읽는 이반 일리치] 두 번째 시간 후기들!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11-22 12:41
조회
225
‘팬데믹 시대에 읽는 이반 일리치’ 세미나가 지난 수요일 2회 세미나를 마쳤습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시간만 남겨두고 있는데요, 지난 시간 우리는 일리치의 《절제의 사회 Tools for Conviviality》를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눴습니다.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그 중에서 저는 도구가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본질적이라는 이반 일리치의 통찰에 관해 나눈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일리치는 “개인은 도구를 스스로 적극적으로 사용하거나, 또는 수동적으로 그것에 의해 사용되는 것을 통해 행동하는 자신을 사회와 관계 맺는다”(54쪽)라고 말합니다. 이때 그가 ‘도구’라고 지칭하는 것은 광범위합니다. 연필도 도구고, 컴퓨터도, 교회나 학교도, 결혼제도도, 특정한 규범이나 가치 같은 것도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마련하지 않은 이 무수한 도구들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 인간의 능동성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바로 그러한 도구들과 우리가 맺는 관계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도구에 특정한 ‘한계’를 부여하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특정한 규범이나 가치에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우와, 그것들을 적절히 이용하여 자신의 삶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경우의 차이를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창조성과 자율성이 산업화된 조작적 도구가 만들어내는 환상에 의해 침식당하고 있다는 점이겠지요. 이는 우리가 자기중심을 갖고 살기 위해서조차 산업사회의 상식적 전제들을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뜻일 듯합니다. 그래서, 제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도구에 대한 도구와 관계하며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일리치의 통찰이었구요. 세미나 중에 나온 다른 많은 이야기들은 다른 세미나원분들의 후기에서 확인하시죠! 


1, 2장에서 인상깊었던 키워드는 '한계' '절제' '통제'였습니다. 지난 세미나때 잠깐 언급했는데요. 저는 몇년 전 저의 신체적·물리적 한계를 통해 저를 재발견하게 되고 그로인해 나라는 개인의 에너지를 통제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타인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관계맺음이 아니라 진솔한 우정(서로를 돌보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함께 더 나은 방향으로 향하는)을 형성하며 살아가는 것이 일리치가 말하는 '절제'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국이 '한계'를 규정하지않고 빠르게 성장한 현대사 때문에 나의 윗세대가 강조하는 무한 발전·성장에 대한 문제의식도 있지만, 현재 기술의 발달로 각종 데이타가 디지털화 되고 간편해지면서 종이 문서, 책 등과 같이 물성을 인식하는 감각이 사회적으로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물성, 물질 감각이 떨어지는 한편 비물질은 점점 많아지고 그로인해 나의 한계, 사회의 한계, 지구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자꾸 놓치는 것은 아닐까요. 세미나때 어떤 분이 품었던 물음처럼 "한계를 어떻게 밝혀야 할지?"도 계속 머릿속에서 맴도네요.

- 신영은 선생님

 

일리치는 현대 사회를 ‘성장열에 감염된 사회’로 진단하고, ‘더 많이 투입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원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조차도 뭔가를 더 많이 투입하거나 더 좋은 것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이를테면 과학과 기술이 만든 문제를 더 많은 과학적 이해와 더 많은 기술로 극복하려 하고, 잘못된 관리의 문제는 관리를 더 증대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죠. 일리치는 이런 과정 속에서 사람들이 똑같은 것을 원하게 되었고, 점점 더 제도와 기술에 의존하게 되면서 스스로를 돌보는 기술을 잃어버리고 제도와 기술의 ‘대상’으로 살아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일리치가 이 글을 쓴 건 오래 전이지만 오늘날의 모습도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코로나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을 생각해도 그렇고요. 일리치는 대안으로 ‘절제의 사회’라는 전망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무엇보다 ‘한계’를 아는 것, ‘충분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세미나에서도 이야기를 나눴지만, ‘한계’를 알기 위해서는 많은 생각과 고민이 필요합니다. 각자 자기 삶과 결부시켜서 세밀하게 짚어보아야 하죠. 하지만 일리치가 이야기하는 절제의 삶을 너무 어렵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자기 삶의 중심이 되는 활동에서 개인의 에너지를 ‘능동적’으로 사용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걸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 오정아 선생님

 

“하나의 사업이 그 규모의 일정 수준을 넘어 성장하면 그것은 먼저 그것을 본래 고안했던 목표를 좌절시키고, 이어 사회 자체를 급격하게 위협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규모를 반드시 밝혀야 하고, 인간생활을 계속 유지하게 하는 인간활동의 한계도 밝혀야 한다.” (11)

신영은쌤게서 이 부분을 인용하시면서, 의미있는 일에 참여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어느 시점에 건강이 악화되어 자기를 계속 무리하게 몰아부쳤다는 성찰을 하게 됐다고 하신다. 우리는 ‘한계’에 대한 사유가 부족한 것 같다. ‘무한한 가능성’의 신화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그런데 이 ‘한계’는 좀 세밀히 들여다봐야 할 말 같다. 한계 설정을 한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 자기 자신을 속단하고 몸을 사리고 나는 여기까지야, 이게 최선이지. 이런 보신주의와 일리치적 의미로 ‘한계를 안다’는 것의 의미는 좀 다른 것 같다. 일리치는 어디선가 ‘한계’를 공학적으로 계산할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의미는 전문가가 각자의 ‘한계’를 설계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하고자 한다. 우리는 산업주의적으로 왜곡된 우리의 상상력은 성장을 무한한 진보, 확장, 무한한 가능성 등으로 번역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자기 자신이 의외로 남을 위한 자기 자신일 경우가 허다하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 왜 나를 고갈시키는가.

“일반인 치료의 가능성은 ‘더욱 좋은건강이라고 하는 우리들이 가담하는 장애에 부딪치고 있다. 그 가담이 우리들에게 치료할 수 있는 질병과 치료할 수 없는 질병의 구별을 못하게 한다. 이는 중대한 구별이다. 왜냐하면 의사는 불치병을 다루자마자 그는 자기 기술을 수단에서 목적으로 전도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환자의 죽음과의 투쟁을 자신이 대신하는 의례를 통해 과학적 위안을 부여하는 돌팔이가 된다. 환자는 치료나 죽음의 과정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주체인 병든 대상이 아니라 의사에 의해 집행의 대상이 된다.” (79)

------비판을 하기는 하지만 그 비판이 증후에 대한 표면적인 관심에 머물러 있는 비판일 때 그 관심은 오히려 체계적인 무질서를 은폐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이러한 징후는 어떤 힘의지들이 충돌한 징후인가를 읽어내야 한다. 실제로 ‘병’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그 병에 대한 치료를 해야 한다는 상식은 전문가들이 그들의 기준에 따라 수많은 증상들을 분류하고 체계화해서 질병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증상들에 이것은 이런 것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자를 일리치는 전문가라고 하는 것 같다. 전문가가 그것에 그렇다고 명명하면 그것을 치료하는 수순도 그가 정한 방법을 따라야 한다. 이것은 마치 이것이 진리야라고 명명하는 형이상학자의 자세를 떠올리게 한다. 진리는 필연적으로 비진리를 동반하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우리가 뭔가를 모른다고 할 때는 그것에 대한 이해력의 부족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모르도록 하는 배치의 장 속에 있다는 푸코의 말. 몰이해의 메커니즘.

“분수령”에 대한 부분도 재미있었다. 상식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흔히 분수령이라는 말을 쓸 때는 그 이전과 그 이후가 더 이상 같지 않는 의미로 쓴다. 이 정도의 단순한 의미는 아닌 듯하다. 일리치에게 분수령은 어떤 전환지점을 이야기하는데 우선 거칠게 표현하자면, 어떤 증상들이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이 시기가 있고 이 시기는 우리의 삶을 조건 짓고 있는 것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지를 작동시켜야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때 해석의지를 작동시킨다는 것이 그 시대를 총체적으로 객관화하는 심판자의 자리에 자기를 둔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의 기대 형태가 이미 산업주의적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그런 자기의 욕망을 객관화한다는 것, 실존적 문제 아닌가. 이것이 쉽지 않다. 다른 시공간을 불러와 지금을 비추는 노력은 거의 생존전략이어야 한다는 이야기. 우리는 타자의 생명의 비용으로 살아간다는 니체의 어느 구절이 생각나고. 아무튼! 자신의 고유의 즐거움, 적절함, 삶을 향유하는 것을 트렌드와 전문가에게 맡기게 되면 통치받기 쉬운 인간으로 전락한다. ‘자원이란 개인 의해 통제되는 개인의 에너지’, 나에게 주어진 에너지를 스스로 통치하는 것, 이것이 푸코가 말하는 자기 통치가 아닐까. 일리치는 자기통치와 도구의 상관관계를 면밀하게 분석한다. 소비자본주의 시대 일리치의 분석은 이래서 의미심장하다. 중요한 질문!! 자기의 쾌락을 스스로 구성할 줄 아는 실험, 즉 수련이 어째서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일 수 있는가?

- 최난희 선생님

 

절제라고 번역된 ‘convivial’이란 단어는 어렵지만 신선한, 계속 생각하게 하는 단어 같다. 퍼뜩 ‘아, 그렇지!’하고 정신이 들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만 같은 단어다. 왜냐하면 conviviality는 우리가 평소에 기준삼곤 하는 합리성이나 도덕성, 효율성, 희소성 등의 척도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conviviality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함께’ ‘생생해지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 즉 우정이라는 관계성과 기쁨이라는 정서가 중요한 척도인 셈이다. 함께이지만 슬퍼지는 것, 즐겁지만 혼자만 즐거운 것은 convivial이 아니다. 그러한 이유로, 곧 ‘함께하는 즐거움’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수단들을 슬기롭게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의 수단, 즉 일리치가 도구-망치나 자전거 같은 손도구부터 자동차나 비행기 같은 동력도구, 나아가 학교나 병원 같은 제도 및 서비스까지-라고 칭하는 수단은 ‘무엇이 우리를 서로 서로 기쁘게 하는가’라는 물음 아래 기쁘게 제한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절도’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가 사용한 의미에서의 절도, 즉 우정의 기초가 되는 절도다. “모든 쾌락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로부터 멀어지게 하거나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쾌락만을 거부하는 미덕”(15쪽)으로서의 절도 말이다.

세미나 중에, 우리는 최첨단 도구를 갖지만 그것에 스타일과 형태를 부여할 자유는 적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즉 그것이 왜 필요하며, 그러한 필요는 어떤 요구들에 기초하고, 그것과 더불어 나는 나 자신 및 세상과 어떻게 교류하게 되는지에 대한 물음은 잘 제기되지 않는 것이다. 그저 ‘개인의 취향’이나 ‘나의 욕망’, ‘당연한 생각’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며 추구될 뿐이다. 하지만 일리치는 우선 그런 감성과 사고도 이 조건하에서 만들어진 ‘특수한 것’이라고 말한다. “바람직한 한계의 성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산업주의적으로 결정된 우리의 기대 형태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52쪽)

세미나 막바지에, 요즘 우리는 무엇이 즐거운 것인지 알기 위해서조차 남들에게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가령 넷플릭스에서 뭘 볼지를 결정할 때 애를 먹는 경우가 그렇다. 막상 선택한다 해도 그것이 볼 만한 것인지 유튜브에서 검색을 하게 되는 것이다. 놀만한 핫플레이스는 어디인지, 요즘 맛집은 어디인지, 어떤 패션이나 단어가 유행인지 등. 우리는 우리의 욕망대로 따른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계속해서 시류를 참조해야하는 무척 불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능동성과 기쁨을 발견/발명할 수 있을까. convivial에 대한 감수성을 어떻게 증대시킬 수 있을까. 세미나에서 그것은 우리 손과 발과 귀를 더 활용하고 더 다양한 방법으로 교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야기를 했다. 여전히 어렵지만, 일리치의 말대로 우선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현재 도구의 일반적 기본구조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위협이 임박해 있고, 효율을 강제하는 것의 영향이 우리 세대 대부분에게 이익보다는 손해를 준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는 오늘날의 여러 제도가 욕구불만을 초래하게 되는 한계를 확인해야 하고, 우리들의 도구가 사회 전체를 파괴하게 되는 또 하나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96쪽)

- 성민호 선생님

 

두 번째 시간에는 일리치의 <절제의 사회> 1, 2장을 읽었는데요, 저는 분수령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우면서 어려웠습니다. 분수령 개념은 도구의 성격 자체를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일리치는 도구가 ‘어느 시점이 지나면 삶의 편의성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삶을 억압’(<일리치 강의>39쪽)한다고 보며 두 가지 분수령을 이야기합니다. 도구가 생산적이게 될 때까지가 첫 번째 분수령이고 도구가 목적으로 바뀌며 반생산적이 되는 지점을 두 번째 분수령입니다.

의료 역사에서는 1913년이 첫 번째 분수령에 해당됩니다. 매독 해결, 수질 개선, 인슐린의 발명, 전염병 예방 등으로 사망률과 발병률이 낮아지며 수명이 연장되었지요.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의료 기술과 담론의 부작용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영국의 사회주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말한 것처럼 ‘의사가 치료자이기를 그만두고 환자의 삶 모두를 통제하는 권력을 갖는 자’(<절제의 사회>21쪽)가 되면서 ‘의사가 확진자에게 최상의 건강을 부여하는 척 가장’(21)하는 (의사가 만드는) 병원병이 전염병처럼 번지게 되었다는 거지요. 일리치는 의사가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새로운 기술을 제공함으로써 그 새로운 기술수단의 파괴성이 숨겨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리치는 실제 ‘사망률과 발병률의 현저한 감소는 공중위생, 농업, 상품판매 그리고 전반적 생활방식의 변화’(20)에 따른 것이며 ‘의사의 개입으로 인한 경우는 드물다’며 사례들을 들어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처음엔 소소샘의 말처럼 분수령을 예전엔 그 도구가 좋았는데 지금은 나빠졌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과거의 의료 기술과 담론은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다거나 그럼에도 일부 의사들과 전문가들이 이를 강요한다고요. 이렇게만 이해하면 아플 때, 결국 더 좋은 최신 기술과 담론, 진짜 전문가를 찾게 되는 결론으로 가게 되는 거죠.

일리치가 말한 분수령은 전후 개념이 아니라, 전환점에서 갈라지는 양방향을 다 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면 단순히 도구의 장점과 단점을 보라는 것인가 싶은데, 전환의 지점인 분수령에 이 시대의 모든 것이 잠재되어 있음을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건화샘이 우리는 외부 동력으로 어떤 장치가 작동한다고 여기지만, 사실 장치가 작동하려면 개인의 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에서 좀 더 힌트를 얻었는데요, 자동차든 비행기든 걷기부터 비용을 마련하기까지 인간의 활동이 도구를 작동시키는 조건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에서, 많은 도구를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는 점이 환기되었습니다.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민호샘의 말처럼 나의 삶의 맥락 속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상적인 조건 속에서 도구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주의 깊게 살피는 태도라는 이야기가 공감되었습니다. 안전하고 편안한 주거지에 대한 저의 지극히 획일적인 상상력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 강지영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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