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차탁마Q 2017년 마지막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12-03 21:11
조회
187
장장 1년을 달린 절차탁마Q가 이제 마지막 에세이만을 남겨뒀습니다. 돌아보니 플라톤, 스피노자, 니체, 푸코는 나름 자기 시대에서 혁명적인 사유를 할 철학자들인데, 전 딱히 그들의 사유에 촉발된 것 같진 않습니다. 하하 그보단 1년 동안 우왕좌왕하면서도 계속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던 건 선생님들 덕분인 것 같네요. ㅎㅎ 곧 내년 규문 프로그램 일정이 올라갈 텐데, 앞으로도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계속 공부해요!

 

이번 시간에는 들뢰즈의 시선을 통해 푸코를 봤습니다. 참고자료로 읽어오라고 했던 “새로운 지도제작자”는 도저히 안 읽혔습니다. 디아그람은 해석된 자료로서의 지도와 다른 것 같고, 그밖에도 들뢰즈는 계속 뭐라뭐라 설명하고 있긴 한데, (+채운쌤도 수업시간에 설명해주시긴 했지만) 결국 뭔지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ㅋㅋ 하지만 들뢰즈가 소개하는 푸코는 아름다웠습니다. 일단 들뢰즈의 문체가 정말 좋았습니다. 다양한 예술가를 가져와서 설명하고, ‘선’, ‘외부’ 등 하나의 단어를 정밀하게 혹은 기존의 이미지와 다른 방식으로 철학을 전개하는 데, 참 나중에 곱씹어보니 그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해야 했을까요. 요즘 글을 쓸 때 겪는 어려움 중 하나가 생각을 하나의 단어로 요약해서 표현하는 건데, 들뢰즈의 글은 온갖 비유와 표현으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철학이란 이미지를 바꾸는 들뢰즈의 말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표현한 만큼 사유가 진전하고, 기존 내 관념을 뒤집어서 구체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수업시간에 “푸코의 초상화”를 읽었는데, 거기서 들뢰즈는 ‘선’과 ‘외부’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선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비균질적인 힘이 부딪힘으로써, 그로인해 공간이 찌그러지면서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 갯벌에서의 밀물과 썰물을 생각해봐도 알 수 있습니다. 바다는 달과 지구의 움직임 속에서 계속 움직입니다. 그 움직임 속에서 선은 계속 위치를 달리합니다. 그러니까 힘들의 관계가 선으로 표현되고, 어떤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채운쌤은 세잔의 그림 역시 이러한 방식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잔은 그림을 그릴 때, 형태를 가진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작동하는 힘을 그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 같은 경우에 그림이란 사물의 형태를 먼저 그리고 그 위에 색을 칠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세잔은 어떤 선차적인 형태를 상정하는 게 아니라 그 힘들을 다양한 색의 조합으로 표현하고 그 결과로 어떤 윤곽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그림이 완성된 것이죠. 그런 점에서 경계나 윤곽, 형태 같은 모든 건 그 자체로 안정된 것이 아니라 힘들의 관계 속에서 진동 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채운쌤은 사유 역시 선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형성된다고 하셨습니다. 생각도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장(場)을 기반으로 형성됩니다. 푸코의 사유와 연결하면, 들뢰즈는 푸코의 사유가 진화한 것이 아니라 위기를 통해 진행되었다고 했습니다. 정확히 푸코의 저작에서 어떤 식으로 사유의 전환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광기의 역사》와 《지식의 고고학》에서 나타나는 푸코의 관심사와 《감시와 처벌》에서 나타나는 푸코의 관심사는 다르다고 합니다. 전자가 지식이나 언표, 담론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권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렇게 정리해도 되나요? ㅋㅋ....) 《감시와 처벌》에서 우리가 목격했듯, 푸코는 신체형과 감옥을 둘러싼 역사를 계보학적으로 접근한 결과 권력이 누구의 소유물이 아닌 권력 관계라는 것을 분석해냅니다. 그러니까 푸코는 그런 ‘위기’들을 겪음으로써 새로운 질문과 함께 새로운 사유를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항시 실험한다는 것입니다. 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하는 것이고, 또 실험이란 항시 현행적인 것, 태어나는 것, 새로운 것,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푸코는 가장 완전한, 아마도 유일한, 20세기 철학자입니다. 19세기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그 세기를 그토록 잘 얘기해줄 수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의미에서 푸코는 사유에 자신의 삶을 투자한 것이다. 권력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 이 모든 것이 삶과 죽음, 광기와 새로운 이성의 문제였지요. 푸코에게 있어서 주관화는 주체로의 이론적 회귀가 아니라 다른 삶의 방식, 새로운 문체의 실질적 탐구였습니다. 그것은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 104~105

 

사유하는 과정이, 글 쓰는 것이 전혀 안온할 수 없다는 걸 이번 들뢰즈의 글 덕분에 계속 곱씹게 됩니다. 사유한 만큼 글이 드러나고, 글을 다르게 쓴다는 건 그만큼 위기를 사유하고 그 과정 속에서 다른 선을 그리는 일이겠죠. 그러니까 성인이 아닌 우리가 현재 자신의 삶에 안주하는 건 그만큼 위기를 지각하지 못한다는 무지함을 보여주는 것이겠죠. 물론 글을 다르게 쓰지 못한다고 해서 그게 곧 죽음은 아니겠지만, 아마 푸코나 들뢰즈에겐 그게 죽음보다 더 큰 문제였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근데 들뢰즈도 말했지만, 아마 그게 심각한 문제, 바뀌지 않으면 죽겠다! 라는 진지함보다는 새로운 문체를 고민하는 것 자체가 이들에겐 즐거운 과정이었던 것 같고, 그런 점에서 공부는 즐겁게 해야 된다는 생각을 또 다시 하게 됩니다. ^^;;

 

채운쌤이 이미 여러 번 얘기하셨지만, 에세이 주제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주체화되는지를 살피는 걸 중심으로 써오심 됩니다. 에세이 발표는 12월 12일 화요일 9시 30분입니다. 따로 간식은 없으니 먹을 것 조금씩만 들고 와주시길 바랍니다. ㅎㅎ 추가될 내용이 있다면 따로 문자로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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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2-04 08:10
    삶과 죽음의 경계지대가 만드는 선....죽음을 삶과 분리해 사유하지도 않고 삶을 그 선까지 끌어올리는 것....마지막 수업은 푸코의 사유를 아름다운 말로 표현한만큼 아름다운 수업이었습니다....이 수업을 마치고 주체화를 잘 마무리하고픈데....이게 아직은 어렵게 다가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