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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탁마 7주차 후기

작성자
봉선
작성일
2017-11-29 07:32
조회
121
 

감시와 처벌 7주차 후기

 

후기를 이제야 올려 죄송--::(꾸벅)

권력의 초보적인 형태를 버리고 권력 효과에 집중해야만 주체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권력은 생산한다고 할 때 그 생산은 주체를 생산합니다. 푸코는 주체를 고정된 역할이나 포지션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정되지 않았다는 말을 한 쪽 귀로 듣고 흘려보냅니다. 우리의 앎에서 주체는 석고상처럼 고정된 것이니까요. 내가 피고용인이여서 당하는 것이다, 나는 자식이여서 부모님에게 잘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 우리 안에 늘 넘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감정은 한 세트로 따라갑니다. 내가 일을 못해서 혼나기보다 갑이 아니라 을이여서 혼나는 것이고, 부모님께 잘하지 못함으로 자신이 왠지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껴지고 화가 나고 짜증이 납니다. 여기까지도 여전히 주체는 고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부모이거나 자식이고, 학생이거나 직업인입니다. 부모로서 앎이나 학생으로서 앎이 우리를 부모이게 하고 학생이게 합니다. 앎이 주체를 구성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한발 나아간 것이 채운 샘이 예를 든 미술관입니다. 권위가 있는 미술관에 전시된 것으로 그림은 걸작이 되고,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 미술관에 입장함으로 미술관과 그림의 앎의 만들어 내는데 동참합니다. 미술관은 현대미술이 어떠하다는 앎을 드러내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관객은 그 앎을 흐르게 하고요. 단지 그 공간에 들어간 것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공간은 이런 앎의 흐름을 만들어 냅니다. 만일 우리가 그 미술관이나 쇼핑몰이나 여행지를 가지 않는다면 그런 앎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과거에 시장은 핫한 장소이지만 지금은 그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적어지면서 옛날 시장, 퇴락한 장소라는 앎을 만들어냅니다. 주체는 앎으로 구성되지만 그 앎은 사회적인 것입니다. 무의식은 사회적이라고 하는 것과 아주아주 유사하죠. 우리가 무엇을 하든 중심적이고 보편적인 근대의 앎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보편성을 가진 개인으로 주체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편성은 균일화된 개인을 만들어 내는 요소입니다.

중심적이고 보편적인 앎은 각각의 주체를 관통합니다. 미술관이 들어섰을 뿐인데 현대 미술에 대한 앎이 나를 관통해서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고 보입니다. 푸코의 텍스트를 접하면서 들었던 의문 중에 하나가 앎은 무엇인가입니다. 후기를 쓰고 나니 조금 알 것 같네요. 앎은 지식이고 지식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란 이미지 또는 상이 있기 때문에 푸코의 앎이 어렵게만 느껴졌고, 우리의 행동. 감정. 생각 등이 모두 앎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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