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인류학 숙제방

파이널 에세이 수정

작성자
지은
작성일
2017-11-24 22:42
조회
112
동화인류학/최종 에세이 수정/171124/지은

 

‘여동생'의 혜택 또한 거부하기!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 늘 오빠가 하는 말 중 하나였다. 대학도 오빠가 가라는 곳으로 갔으니 앞으로의 미래도 오빠가 하라는대로만 하면 모든 것이 좋을 것이라고. 글쎄, 조언 정도라면야 고맙게 듣겠지만 어느순간 걱정이 되고 다그침이 되며 강요가 되어버린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을 해도 “부모님 대신 완장을 찬 것”이라며 쉽사리 포기할 줄 모르는 오빠. 그래, 그럼 우리 한 번 평행선을 달려보자! ‘오빠가 나에게 뭐라고 하는 것이 자유듯, 나도 내 마음대로 하겠다.’ 이렇게 다짐을 하며 지내봐도 어느덧 오빠의 ‘카톡' 소리면  잔뜩 경계태세를 갖추는 나를 보며, 아직 오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본다. 현대의 오누이 관계는 아버지-딸과 유사한듯 보인다. 든든하고 다정한 오빠들과 그 사랑을 독차지 하는 어리고 귀여운 동생이 미디어에 자주 보이는데, 베컴의 세 아들과 막내딸 하퍼, 배우 클로이 모레츠와 그의 든든한 오빠들이 바로 그 예다. 대중들은 이들의 남자친구도 아빠 및 오빠들이 검증하기를 기대하고 그것이 부럽다고들 한다. 여동생은 자신이 애인도 자신이 결정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이번 동화 세미나를 통해 오빠가 여동생을 돌봐주는 것이 ‘당연한' 현대사회의 오누이 관계에서 한 걸음 떨어져, 근대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동화에서 그리는 오누이 관계는 어떤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보고 싶었다. 현대의 오누이와는 어떻게 같고 또 다를까?

 

여동생, 가족의 부산물

동화 <열두 오빠>에서 또한 다수의 오빠와 한 명의 여동생이 등장한다. 한 왕국의 수장인 아빠는 열두 아들을 낳고, 만약 열세 번째 낳는 아이가 딸이라면 그 왕국을 그 딸에게 물려주고 나머지 열 두 명의 왕자들은 모조리 죽여버리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왕비는 열두 왕자의 막내 벤야민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슬퍼한다. 잠깐, 막내 아들의 이름이 벤야민이라고? 벤야민은 성경에 나오는 야곱이라는 인물의 막내아들의 이름이다. 그리고 야곱은 총 열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열두 명이다. 이 ‘12’라는 숫자는 무슨 의미일까? 1년은 12개월로 나뉘어진다. 하루의 시간도 총 24시간, 오전 12시간 오후 12시간으로 나뉜다. 즉 12라는 숫자는 꽉 채워진 것, ‘완성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열두 명이 의미하는 바는, 즉 ‘완성된 무리'라는 것이다. 열두 명의 아들은 아버지의 질서 체계에 종속되어 왕국의 질서와 안녕을 충실하게 유지해나가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왕이 ‘열두 왕자를 죽인다’는 예고에는 그들을 그의 힘 아래 굴복시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확실한 통제 아래에 두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여동생은 열세 번째 아이로서 extra, 즉 부산물이며 오빠들을 제압하기 위한 아버지의 도구일 뿐이다. 오빠들은 엉뚱하게도 아버지에게 맞서는 대신 이 모든 것을 여동생의 잘못으로 돌리며, 여동생에게 피로써 복수하겠다고 다짐하며 왕국을 떠난다. 여동생은 오빠들의 ‘무한 돌봄'의 애정은 커녕 살의를 피해 달아나야 할 판이다.

 

누이동생의 분열증, 오빠들의 편집증

열두 명이 이룬 ‘완성형' 다음에 태어난 열세 번째 자식, ‘부산물'인 공주는 아버지의 질서를 의무를 지지 않는다. 열두 명의 오빠들의 존재를 아는 순간 바로 집 밖으로 나와 “커다란 숲 속", 넓은 세상으로 발을 디딘다. 이 때부터 공주의 욕망은 성, 왕국이라는 영토를 벗어난다. 열두 오빠를 만난 여동생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공주’의 신분과는 맞지 않는 ‘하녀'가 할법한 궂은 일을 마다 않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음식을 익힐 때 쓸 땔감을 찾아오고, 야채로 먹을 수 있는 풀들을 뜯어 오고, 냄비들을 늘 불 옆에 두어" 오빠들이 언제라도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늘 준비해 두는 것이다. 또한 여동생의 성적 욕망은 분열증적으로 흐르는 것을 엿볼 수 있는데, 그녀는 오빠들과 이성관계를 맺으면서 그 욕망이 오빠들 열두 명 모두에게로 향한다. 열두 오빠들의 속옷을 여동생 한 명이 전부 가지고 간다는 것은 오빠들 모두와의 성적 관계를 암시한다. 막내 오빠 벤야민을 보고나서는 바로 “커다란 사랑이 우러나오는 것을 느끼며 서로 얼싸안고 입을 맞추"는 것은 물론 나머지 열한 명의 오빠들과도 똑같이 껴안고 입을 맞춘다.

반면 열두 명의 왕자들은 아버지로부터 도망쳐 왔지만 욕망은 아버지의 질서에 고여 벗어날줄을 모른다. 그들은 만나는 여자아이는 전부 죽여버릴 것이라고 다짐하지만, 어쩐 일인지 십 년동안 살면서 한 번도 여자아이를 만난 적이 없다. 자기들을 찾아온 여동생이 그들이 처음 접한 여자인 것이다. 그들은 숲 속 여기저기 사냥을 다니며 그들의 생존을 위한 먹을 것은 잡아왔지만, 그 과정에서 마주쳤을 다양한 것들과의 ‘접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지내는 “마법에 걸린 작은 집"은 고여있는 그들의 욕망을 상징하는 장소가 된다. 누이동생이 그 작은 집에 들어오고서는 그들의 욕망이 모두 동생에게로 쏠려버린다. 그 집은 오빠들의 ‘죽여버린다'는 선언도 사랑으로 탈바꿈 시켜주는 엄청난 장소인 것이다. 또한 여동생에게 오빠들이 하나같이 ‘꽂히는' 지점은 공주의 “왕족의 옷"과 그녀의 이마 위에 자리한 “황금별"이다. 오빠들의 욕망이 그 두 개의 부분대상으로 흐르는 것이다. 여동생이 입은 왕족의 옷은 그들이 살던 왕국에 대한 향수를,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자리한 하나의 황금별은 국왕을 상징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오빠들의 욕망은 그들이 아버지로부터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버지’와 ‘아버지의 왕국’에 고착되어 있는데, 이는 오빠들의 편집증적 욕망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 각자의 욕망들이 만나는 지점

만남의 기쁨도 잠시, 누이동생은 오빠들의 식탁에 꽃을 놓아주려고 열두 송이의 꽃을 꺾었는데 그 순간 오빠들이 까마귀로 변해 날아가 버렸다. 열두 송이 꽃이 오빠들을 상징한다면, 그 꽃이 뿌리내리는 땅은 누이동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누이동생은 분열증적 욕망의 흐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빠들에게로 흐르던 욕망을 다른 곳으로 흐를 수 있도록 오빠들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욕망을 끊어버리려 한 것이다. 하지만 오빠들에게 이것은 큰 ‘잘못'이었다. 그들의 욕망은 여전히 누이동생에게서 벗어날 줄 모르는 것이다. 7년을 말을 해서도 안되고 웃어서도 안된다는 규칙은 여동생을 붙잡아 두기 위한 오빠들의 ‘벌'이다. 열두 명의 오빠들이 하나같이 ‘까마귀’로만 바뀌는 것도 그들의 욕망이 얼마나 동일한지 보여준다.

 ‘내 오빠들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해내고 말 테야.’ 누이동생의 굳은 결심이다. 어랏, 소녀의 욕망이 어느덧 편집증적으로 바뀐 것일까? 글쎄, 그렇다고 생각하기에 그 7년이라는 세월 동안 공주는 다른 나라의 왕과 결혼도 하고 오빠들 없이도 “몇 년을 행복하게” 산다. 그렇다면 누이동생의 7년 동안의 고행은 무엇을 의미할까? 왕국을 떠나온 공주의 미션은 ‘오빠들을 찾기'였고, 오빠들을 찾은 후 바로 하는 일은 ‘집안일'이었다. 오빠들이 까마귀로 변한 후에 바로 몰입하는 일은 ‘실 잣기'이다. 공주는 그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오빠들을 위해 요리를 하고 집을 깨끗하게 하는 살림살이만을 계속하기에 지겨웠을 것이다. 꽃을 꺾는 행위는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여동생의 무의식이었던 것이다.

 이런 누이동생의 분열증적 욕망과 오빠들의 편집증적 욕망이 만나는 지점은 바로 오빠들이 누이동생에게 끊임없이 제공하는 ‘미션'에 있다. 오빠들을 찾아내기, 오빠들을 위해 요리하고 집안청소하기, 오빠들을 사람으로 되돌리기 위해 말도 하지 않고 웃음도 짓지 않기. 7년이 지난 후 오빠들은 동생에게로 돌아오고, 그들은 “모두 함께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산다. 아마 오빠들은 여동생에게 끊임없이 다른 미션을 제공하며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누이동생의 혜택 또한 버릴 준비가 되어있느냐?!

현대의 오누이관계에서 기대되는 오빠의 여동생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라는 프레임에서 홀딱 깨어날 수 있었던 지점 중 하나는 바로, 오빠들의 욕망이 누이동생의 전 존재가 아닌 그녀의 ‘옷'과 ‘황금별'로 흐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오빠는 부분대상을 욕망하는 욕망-기계일 뿐인 것! 다른 하나는 바로 누이동생의 욕망이 오빠의 편집증적 욕망과 마주하는 지점이다. 분열증적으로 흐르는 여동생의 욕망이 자꾸만 오빠의 욕망과 만나는 것이다. 즉 누이동생 또한 오빠와 함께 하고 싶어한다는 것.

오빠의 관심을 ‘나' 전체에 대한 관심으로 보고 부담스러워 했고, 나는 오빠를 피하고만 싶은 줄 알았다. 그런데 동화를 보며 생각이 든 것은 사실 오빠는 나에게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고, 나 또한 오빠의 영향력 아래에 계속 있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빠의 연락을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워 경계하는 나의 태도는 사실 오빠의 온전한 관심을 기대하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언제까지나 ‘막내동생'으로 자리하고 싶은 나의 욕망에는 관심은 좋지만 간섭은 사양하는 이중적 태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여동생이 누릴 수 있는 각종 ‘혜택’이 있다. 어리광 부리기, 뭐 사달라고 부탁하기 등등. 가족의 내리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싶으면서 나의 삶의 방식에 대해선 여타부타 지적받는 것을 참지 못했다. 진정 오빠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면, ‘여동생'으로서 누리는 혜택들 또한 거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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