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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모인 듯 계모 아닌 계모 같은 너 -수정본

작성자
정은
작성일
2017-12-17 23:01
조회
100
계모인 듯 계모 아닌 계모 같은 너

온라인 맘 카페에 "나는 계모입니다. "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내용인즉  아침마다 아이들 학교 보낼 때 콘프라이크와 핫도그를 먹이고 밥 구경을 못 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계모는 어떤 존재인가? 사전적 의미의 계모는 (이을 계와 어미 모 자로 쓴다) 아버지가 재혼함으로써 생긴 어머니 또는  어머니가 죽은 뒤에 이를 계승하는 어머니로 정의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계모"를 떠올릴 때 사전적 의미보다 그녀가 갖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인다. 위에서 언급한 아침마다 밥 대신 간단식을 차려주는(본인의 의지) 본인을 스스로 계모라 칭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사회가 바라보는 친모와 계모의 모습을 정의 내려 볼 필요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계모는 "나쁘고 악하며 계략을 꾸며 전실 자식을 괴롭히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헨젤과 그레텔의 계모는 조금이라도 먹을 입을 덜기 위해 아이를 버렸고, 신데렐라와 콩쥐 팥쥐의 계모는 ‘자신의 영역에 속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전실의 자식에게 온갖 구박을 한다. 장화홍련의 계모는 ‘자신의 영역이 침범 당했다‘ 여겨 전실 자식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백설 공주의 계모는 자신을 능가하는 딸을 견디지 못해 죽이려 한다.

그렇다면 친모는 어떠한가? 우리가 “친모”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갖는 이미지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숨은 뒤로 하고 아이를 구하려 뛰어드는 정도의 헌신과 끝없는 사랑, 햇살 같은 따뜻함 ,자애로움, 애정과 같은 단어와 동일시한다.

하지만 요즘 종종 보도되는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아동학대 가해자는 따로 있지 않다. 2007년 보고된 기록에 따르면 신고 된 아동학대 사례 가운데 가해자의 83%가 친부모였고 계모(계부)에 의한 사건은 2%에 불과했다고 한다. ( 심지어 우리가 아는 백설 공주 동화의 초판본의 왕비도 계모가 아닌 친모였다. )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우리는 행동의 결과만을 놓고  계모와  친모로 이분법적으로 경계 지어 나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이미지화한 친모성과 계모성 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계모성을 지닌 그들은 어떠한가? 그들 각각의 모습은 다르게 나타나지만 본질은 같다고 본다. 계모성을 지닌 그들의 욕망은 어느쪽으로 접속했는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사회적 장에서 나타나는 "능동적 흐름"으로 보았다.  나는 이 "능동적 흐름"에 집중한다. 그들이 자신의 욕망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에 대한 고찰을 순간순간 멈추어 했다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 나 자신이 욕망하는 기계이고 타인 또한 그러한 존재라는 인정이 전제되었다면 적어도 이런 파국적인 결말은 맺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욕망에만 매몰되어 질주하다 보니 자신도 예기치 못한 상황에 도달해 있지 않았을까?

고정되고 보편화 될 수 없는 욕망이 어딘가에 접속하여 평온함과 만족을 잠시 느낄 때 다시금 분열을 일으키며 탈주할 힘을 얻고 여정에 나서기를 반복한다. 사건은 늘 욕망하며 접속하는 자가 만들어 내고 새로운 길을 열어간다. 계모 또한 자신의 욕망에는 충실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들은 머무르며 집착하는 자였다. 이렇게 머무르고 집착하는 자가 있기에 그 반동으로 탈주하려는 자가 있다. 그 반동의 힘은 계모가 뜻하지 않았겠지만 그녀로 부터 나온다고도 할 수 있다. 계모는 억압하는 자와 동시에 탈주하려는 자에게 힘(동기)을 부여하는 자로 역할 한다. 계모는 엄마-자식 관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고부갈등(장서 갈등), 직장 내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에서도, 독재자가 다스리는 나라에서도 나타 날 수 있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욕망만을 투사하는 관계 모두에게서 계모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본인의 울타리 안에서 굳건한 영토를 이루고 자신만의 일방적 코드로 접속하며 “내 새끼”에 집중하는- 계모성을 지닌 엄마(아빠)를 떠나 결혼을 했지만(탈주) 또 다른 계모(시모)를 만나 다시 한번 탈주를 도모하여 지금은 내 길 위에 서 있다. 이 세계는 계모성이 있기에 사건이 발생하고 혁명도  일어난다.  욕망은 의도적인 방향성 없이 변화무쌍하게 매순간 접속하지만 저 내면 깊숙한 곳에는 저마다의 지향점이 있다고 본다. 나는 앞으로도    한번씩 멈추어 서서 내 욕망의 흐름이 어디를 향하는지 살펴보며  내 여행길을 누릴 것이다.

변함없이 변화하고

변화하면서 변함없는

.

"나는 이웃들의 삶 속에서 존재의 혁명을 일으키고 싶기 때문이다."  박완서
전체 1

  • 2017-12-27 20:02
    계모는 자기 욕망의 능동성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구축했었지만, 그 관계 안에서 안주하려다가 고착되어버린 존재였군요. 읽고 탐구해볼 계모들, 선생님의 주장을 보충하기도 하고 뒤집기도 할 많은 예들을 다시 또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 이번 동화 세미나를 통해 진솔하게 우리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고, 선생님께서 글을 고치셔서 기쁩니다! 수고하셨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