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인류학 숙제방

동화에세이-새버전

작성자
유현정
작성일
2017-12-18 15:24
조회
107
2017.12.8 / 동화인류학-가족 / 유현정

 

엄마가 사라지다

 

엄마 때문에 난 불행해! 내가 불행한 건 모두 엄마 때문이야!

내가 불행하다고 인식하면서 난 원인을 찾아보았고 애착이론 속 애정 결핍이 원인이란 결론을 얻었다. 다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가 사랑해주지 않아 난 이 모양이다. 우울하고 불행하며 날 사랑하지도 남들도 사랑하지도 못한다. 뭔들 제대로 못한다. 시간이 지나 나도 엄마가 되고 엄마도 그럴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하면서 어느 정도 가벼워졌으나 마음 한 구석엔 아직도 남아 있었다. 엄마 때문이라고….

 

동화를 읽으며

그러나 웬일인지 동화 속에서는 엄마 때문에 불행한 주인공들은 없었다. <장화홍련전>과 <백설공주>에서 보면, 너무나 바라던 귀한 자식을 얻어 애지중지 키우다가 친모는 일찍 죽고 대신 계모가 들어와 자식들은 온갖 구박을 당한다. 그럼 애착이론을 뭐지? 엄마의 사랑이 중요하지 않다고?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동화’로 구성해 보았다.

 

엄마의 변신

남매를 가진 부부가 잘 살고 있다. 아들이 귀한 집안이라 또 다른 아들을 바라며 셋째 아이를 낳지만 작고 잘 먹지 않는 딸이다. 비록 딸이지만 막내로 온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행복하게 자란다. 이것저것 재주가 많아 크면서 여기저기 상도 많이 받아와 부부의 자랑이다. 그러던 중 갑자기 엄마가 사라진다. 아버지도 사라진다. 집엔 하루 종일 방바닥에서 가로로 세로로 누워 이책 저책에 파묻혀 있는 첫째인 아들과, 역시 하루 종일 책상에서 학교공부에 파묻혀 있는 둘째인 딸과 이 둘의 괴물 같은 능력을 욕망하며 자신을 부정하는 셋째인 딸이 남았다. 게다가 어느 순간 계모가 등장해 돈과 자기 방식대로의 완벽함을 욕망하며 아이들에게 집안일을 안 한다고 구박한다. 첫째와 둘째는 별로 개의치 않다가 순응하다가 하는데, 셋째는 자신의 힘든 상황을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던 친엄마를 그리워하며 계모의 구박에 더 우울하고 힘들다. 여차 저차 계모를 떠나 세월이 흐르니 그 동안 집에는 늙으신 챙겨야 하는 친엄마와 아버지가 다시 돌아왔다.

이렇게 구성해 보니, 불행의 원인인 엄마라는 실체는 일정(짧은) 기간 동안의 계모였다. 그런데 나는 ‘엄마=내 불행의 원인=계모’라는 등식을 가지고 계모인 엄마를 생각하며 미워하고 원망했고, 한편 친엄마를 생각하며 죄책감을 가졌던 것이다. 갑자기 내가 가지고 있던 ‘하나’의 실체인 엄마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여 당혹스럽다. 처음엔 나를 사랑해주던 친엄마였다가 사라지고 대신 나쁜 계모가 나타나고 다시 챙겨야 하는 노쇠한 친엄마가 돌아왔다. 결국 다 같은 엄마였던 것이다. 엄마는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계속 변이한다.

 

들뢰즈는 말한다.

“들뢰즈는 본질들을 사유하는 실재론자가 아니며, 그 밖의 다른 어떤 초월적 존재들을 사유하는 실재론자도 아니다. 그래서 그의 철학에서는 대상들에게 그것들의 동일성을 주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시간을 관통해 이 동일성을 보존해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해진다. 간단히 말해 이 다른 무엇은 바로 역동적인 과정이다.”(마누엘 데란다)

“물질은 흐름으로만 존재한다. 흐름들은 형식을 부여받으면 분절된다. 이 형식을 코드화라고 할 수 있고 코드화는 일종의 정지작용이다. 코드에 따라 실체가 형성되는데 이 과정이 바로 영토화이다. 코드화와 영토화 과정에는 언제나 탈영토화와 탈코드화 과정이 내포되어 있다. 어떤 코드도, 어떤 영토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 애초에 코드와 영토란 불안정한 상태위에 구축된 ‘준안정적’상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의 변신

그러면 나의 변신은 어떠했을까? 위의 동화 속 셋째가 나이다. 엄마가 보기엔 나도 너무나 다른 실체로 변화했을지도 모른다. 똑부러진 귀염둥이 딸에서, 말없고 툴툴거리는 웬 아이로, 또 놀고먹는 의붓자식으로…내가 느끼기엔 크게 보면 어떤 리듬으로 ‘나’가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내 욕망에 잘 접속하면 확장하고, 접속하지 못하면 축소되는 듯했다. 유아초등기는 확장, 중등이후 학창시절은 축소, 직장생활시기는 확장, 육아시기는 축소, 이후 현재 확장…이렇게 확장과 축소를 반복하며 ‘기관 없는 신체’인 나는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장화홍련전>과 <백설공주>동화 속에서도 찾아보자. 사랑속에서 잘 지내던 아이들의 시기는 친엄마의 죽음으로 끝이 나고 아이들은 계모의 구박 속에서 집을 떠나 죽음의 위협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무의식을 상징하는 연못과 잠 속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접속해 깨어나 새 삶을 얻는다. 욕망과 잘 접속하여 계속 확장하며 변이한다! 이것이 현재 이후 나의 남은 과제이다.

 

다시 들뢰즈는 말한다

“기관 없는 신체는 욕망이면서 비욕망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약동하는 생, 생성으로서의 존재, 흐르는 기, 그런 점에서 욕망이다. 하지만 동시에 비욕망이라는 것은 그 욕망이 쾌락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들뢰즈는 쾌락을 욕망과 연결시키기를 거부한다. 무엇을 위해 욕망하느냐고 묻지 말라. 그런 질문을 바꾸지 않는 한 우리는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결여’를 확인할 뿐이다. 기쁨은 쾌락에서 오는 게 아니라 욕망 자체에서 온다. 욕망에 내재하는 기쁨이 존재한다. 그 기쁨은 어떠한 결핍도, 어떠한 불가능성도 내포하지 않으며, 쾌락으로 측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쾌락의 강렬함들을 분배하고 이것들이 불안이나 치욕이나 죄책감으로 인해 침해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바로 이 기쁨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닌 이것이었다! 내 지난날의 우울과 불행의 원인은. 난 항상 현실에 결여된 것들을 욕망하였다. 욕망 자체에 기쁨이 존재하는 것을 모르고, 결과는 결핍과 불가능성의 확인이었다. 난 항상 현실 속의 내가 아닌 현실 밖의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기관없는 신체

그렇다! 불행을 준 엄마, 불행했던 나로 실체화 했던 것이 사라졌다. 신기하다. 하나의 실체가 없이 계속 변화한다. 나는 그 변화 속 한 부분을 변하지 않는 실체로 크게 왜곡해서 잡고 괴로워하며 원망했던 것이다. 무한한 변화 속 순간, 찰나에 지나지 않는 한 조각을 붙들고…. 그러한 무수한 변화속에서 이제는 현재의 ‘나’와 ‘엄마’로 만날 뿐이다. 늘 새롭다.
전체 1

  • 2017-12-27 19:55
    선생님! 결국 글을 고치셨군요. 그것도 우리가 읽었던 동화처럼 삶을 각색하시다니! 마지막 발표 시간에 말씀하셨던 것 이상으로 분석과 정성이 들어가 있어서 좋습니다.
    욕망하는 기계. 작아졌다 커졌다 하는 존재감에 대해 해석하신 부분도 좋았어요.
    선생님! 수고하셨어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