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3.22 절차탁마 Q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3-18 20:55
조회
235
170322 절차탁마 Q 공지

플라톤의 텍스트에서 우리는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가 무엇인지 어떤 논리로 그 사유를 전개하는지 보는 동시에 그가 말하지 않는 것과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을 파악해야 합니다. 거기가 바로 플라톤이 있는 지점일 테니까요. 우리에게는 플라톤이 개인의 이익을 공동체의 이익과 등치시키는 것을 보면 거부감이 들고 이런 이야기를 별다른 설명 없이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플라톤은 그게 당연하기에 설명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개인의 이익이 곧 공동체의 이익인 것이 당연한 곳이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인 것입니다. 그 철학의 지반을 플라톤이 말하지 않는 지점에서 찾을 수 있고, 또 그로 인해 우리는 어떤 전제 위에서 사고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철학에서 살펴야 할 것은 그 전제들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를 조건하는 전제를 의심하고 깨고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플라톤은 왜 이데아를 말했을까요? 그의 사유에서 우리는 뭘 배울 수 있을까요? 플라톤이라는 안경을 쓰고 볼 때 뭐가 보이고 뭐가 안 보일지?
플라톤은 개인과 공동체의 이익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개체의 이익이 가장 완전할 때는 전체의 이익이 가장 완전할 때인 거죠. 플라톤이 보기에 우주는 데미우르고스라는 장인이 만든, 완벽한 질서가 돌아가는 자연이고 철학은 그 하나의 질서와 법칙을 아는 것입니다. 자연의 질서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으므로, 그 일관된 질서를 알면 타락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생각한 소피스트와는 다른 자연관을 가지고 있던 플라톤은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플라톤은 동양의 유교와 비견되는데요, 그는 마치 전국시대의 맹자처럼 도가 땅에 떨어졌고 그것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제우스의 질서라고 하는 노모스의 회복입니다. 노모스는 당연한 도리,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여겨지는 도리입니다. 그 관습으로 공동체는 유지되어 왔다고 플라톤은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유재산을 기반으로 도시가 발달하고 전쟁이 끊이지 않게 되자 약속, 맹세, 명예와 같은 관습적으로 중히 여겨졌던 것들보다 이익이 우선시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가치들’이 충돌하고 공동체가 와해되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그런 아테네를 보고 폴리스의 질서가 변질되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와해의 선두에는 소피스트들이 있었고요. 당시에는 더 이상 노모스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이익을 추구하고 강자의 이익이 곧 정의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인간의 본성’, 퓌지스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는 집단이 바로 소피스트들입니다. 플라톤은 이들에게 반론을 든 것이고요. 플라톤도 본성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본성은 이미 타락해서 ‘회복’해야 하는 본성인 것이죠. 그리고 그걸 위한 조건은 정체를 바로잡는 것.
이번에 읽은 부분은 플라톤이 사유재산과 가족에 대해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는 수호자들은 사유재산을 가질 수 없고 또 처자식을 공유하면서 사심이 생길 여지를 차단시킵니다. 그리고 통치는 자신을 위한 것이 폴리스를 위한 것임을 아는 자가 맡습니다. 사적인 것에 치우치지 않은 자, 철인이 통치를 맡을 때 가장 이상적인 국가가 만들어지는 거죠. 가장 이익이 되는 상태는 폴리스의 이익이라는 것을 플라톤은 계속해서 강조하는데요, 그만큼 그가 사는 시대는 폴리스 정신이 많이 와해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사심을 내려놓고 폴리스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연결하는 데 필요한 것은 단지 인식하는 것일까요? 두 이익이 연결된다고 인식한다면 통치자는 기꺼이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처자식도 공유한다고 플라톤은 그렇게 말하는데, 정말 인식하면 되는 문제일까요? 플라톤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는 인간이 인식한다면 그것과 닮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교육을 중시하고 시가(詩歌)도 올바른 것을 담은 내용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고요. 그럼 플라톤이 닮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그건 바로 사물의 본(本), 패러다임, 사물 ‘자체’입니다. 플라톤은 정의로움을 해하는 사람들은 정의로움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행하는 것은 다르지만 그들간의 공통된 것, ‘그 자체’. 우리는 이 본질주의가 어쩐지 거북하지만 채운쌤은 우리가 다 다르게 생긴 개들을 ‘개’라고 인식하고 고양이들을 ‘고양이’라고 인식하면 (통약이라고도 하지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플라톤주의자라고 합니다. 나도 모르게 끼고 있었던 플라톤 안경^^;;
플라톤에게는 인식이 곧 도덕이고 그러므로 실제 정치는 올바름 자체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과 닮으려는 노력이 늘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철학자는 영원히 있는 것과 관계하며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사랑하는 자이고요. 지혜를 사랑하여 지혜 자체를 인식하는 철학자. 철학자가 곧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는 플라톤의 발상은 이런 전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은 7권 읽습니다. 플라톤의 아바타(?)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교육을 어떤 맥락에서 강조하는지, 이데아를 설명하는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유념하면서 읽어옵니다~

간식은 미영쌤, 호정쌤.
발제는 호정쌤, 봉선쌤, 건화, 정수쌤, 소영쌤, 규창.

다음 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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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19 19:05
    우리는 이데아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지만, 각각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것에 '참여'한다고 했죠. 그리고 이때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이데아가 나온다고 한 거죠. 우리는 현상세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데, 마치 천국에 있는 듯한 그 이데아의 세계란 뭔지~ 7권에 그 유명한 동굴 비유가 나오는데, 이걸 화두로 자세히 따라가야 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