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3.15일 5주차 후기

작성자
임길례
작성일
2017-03-17 19:00
조회
219
규문 절차탁마Q 1학기 / 2017.3.15. 플라톤 <국가> 5주차 후기 / 길례

 

1.질문에 들어가는 방식

 

플라톤은 왜 ‘이데아’를 이야기 할 수밖에 없을까? 이데아는 책 속에서 어떤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지. 또 어떤 사유를 만들어내는지.

플라톤의 안경을 쓰고 보면 무엇이 잘 보이고, 무엇이 잘 안 보이는지.

플라톤은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보고 있는지 내 삶과 직결되는 부분이 어디인지.

텍스트를 읽고 자기가 갇혀 있는 지점을 찾아보고 여기서부터 질문을 도출하기.

플라톤은 인식을 통해서 세상을 다 알 수 있다고 말하는데 가능할까?

우리의 전제가 플라톤에 전제를 만났을 때 어느 지점에서 균열이 생기는지. 그 지점에서 질문이 시작된다.

 

2.인간 본성의 회복

 

최고의 배움인 ‘선’이란 머라고 규정 하는가? 자기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능동적인 힘이라 할까? 니체의 사유를 보자면 ‘선’은 유동적이지만, 플라톤의 ‘선’에 출발은 지금 시대가 기존의 질서가 무너져서 죄악으로 타락되었다. ‘선’은 여기서 출발한다. 이것은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철학을 하지 않으면 욕망을 부추기는 많은 요소들이 우리를 타락한 사회로 이끈다고 한다. 이 시대 소피스트들은 철학적 개념을 두고 서로 경쟁하던 시대었다. 플라톤도 그중 한사람으로 자기의 철학적 개념을 정리해 나아간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와 그 법칙을 앎을 통해 알아가는 것이다. 인간에 ‘본성’은 이미 그 속에 자연의 질서와 법칙들이 내재 되어 있다.

플라톤 이전 영웅시대에는 인간의 본성은 義을 중요시 하였다. 플라톤의 주장은 지금 시대에는 이익(利)이 우선시되는 시대라고 한다. 그래서 세상은 타락했고.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 자연의 질서를 회복을 해야 한다.

우주의 질서와 본성이 부합할 때 개인과 공동체도 일치하게 된다. 개인의 ‘혼’을 잘 돌봄으로 공동체의 ‘혼’도 부합한다는 것이다. 폴리스는 자연의 질서와 ‘본성’이 부합하므로 사회가 좋아진다. 플라톤은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것은, 개인의 사유재산 증식과. 가족이기주가 견고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식(우주의 질서)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개인의 이익만이 인간에 본성으로 알게된다고 한다.

 

3. 철학을 한다는 것은

 

철학자는 모든 지혜를 욕구하는 사람으로 앎 자체를 알고자 한다. 플라톤은 존재는 불변한다는 것. ~있다(계속 있는 것) 이것은 지성을 통해 알아가는 ‘이데아’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인식이란 뭔가? 감각적 현상들 자체만 보는게 아니라. 그 모든 현상을 관통하는 어떤 내적인 질서,법칙들을 공통(통약)으로 인식하는 것이라 한다.

~있다(영원히 있는 것 이게 ‘이데아’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성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다. 지식이란 뭐냐 이런 것을 인식하는 존재에 대한 앎이다. 존재가 뭐냐 ‘이데아’이다. 그 존재에 대한 앎이 지식인거고, 그것은 밝은 상태라고 말하며 밝은을 인식에 비유한다. 이 존재의 앎에 응답하지 못하는 사람은 현상적인 것 이외는 아무것도 볼 줄 모르는 인식능력의 결여자다. 플라톤은 인식능력의 결여 자들은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이다. 인식능력의 결여자는 올바름 것, 그 자체 같은 것은 알아가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 현상만 쫓아가는 무지 상태라는 것. 대부분 우리들은 무지와 인식의 중간에 있다.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다가도 현상적이고 감각적인 것에 금방 휩쓸려 버리는 중간에서 왔다 갔다 하는 독사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

우리는 개는 개고 고양이는 고양이다. 즉 통약되어있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도 있다. 구체적인 것으로 관통하는 통약된 관념들이 이미 우리에게 인식되어 있다. ‘정의’도 다양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뭔가 질서화 된 정의가 ‘정의’ 그 자체이다. ‘본’도 공통적인 것들에서 본의 각각의 현상들을 통약 가능한 어떤 것을 추출해 낸 것이 ‘이데아’이고 곧 ‘본’이다. ~있다 라는 존재는 변치 않는 것이다. 반대로 가시적인 것은 빨갛게 보이기도 하고 노랗게 보이기도 하는 것,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은 존재가 아니다. 존재는 오로지 지성을 통해 인식이 가능하다. 정의 자체, 개 자체가 어디 보이는가? 우리는 구체적인 개들을 보는 것이지 개 자체를 볼 수는 없다. 즉 정의 자체 개 자체는 인식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철학을 하려는 사람은 독사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인식할 수 있도록 지혜를 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4.철학자란 진리를 추구하는자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것’ 이것을 파악할 수 있는 이들이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들이다. 어떤 현상에 끌려 다니지 않고, 한결같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한다. ‘참으로 있는 것’에 접근하여 그 자체와 교합으로 지성과 진리를 낳아. 앎에 이르게 되어 진실하게 사는 것이 철학자란 것. 이러한 성향을 갖춘 철학적자의 교육이 필요하다. 시가와 체육 교육만으로 부족한 뭔가가 있는데. 그게 바로 ‘좋음 이데아’를 교육하는 것이라 한다.

이런 교육을 통하여 진리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도록 양육된 자가 철학적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 플라톤은 인간 덕목을 구성하는 올바름.지혜.용기.절제 이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인식 시키려 하였다. 동양에서도 인.의.예.지.신을 통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철학적 본성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철학자의 본성을 공통체의 문제로 가져와 개인들이 현상(감각세계)에만 마음이 쏠리는 대중들을 통약된 공동체적 ‘본성’으로 이끌어 줘야 한다.

즉 천리와 관계 맺으며, 지성을 ‘앎’으로 알아가게 하는 삶. 플라톤은 철학자는 ‘신’의 본성에 가깝게 살지만 신은 아니다. 그러나 그 자체에 이르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연마하는 사람이다.

 

 
전체 3

  • 2017-03-17 21:54
    철학은 현상들에 대한 앎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생각이 그럴듯 하게 여겨지는 한편 굉장히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7권을 읽으며 플라톤의 전제와 좀 더 충돌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2017-03-18 12:56
    견해에만 머물지 않고 그 자체를 알려고 노력하는 것... 플라톤의 본질주의를 독단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개나 고양이 자체를 생각한다는 자체로 우리는 플라톤주의자라는 게 깨는 거 같아요 0ㅁ0

  • 2017-03-19 18:57
    쉽게 풀리지 않는 질문인데, 이데아를 인식한다는 게 뭘까요? 플라톤은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다고 본 것 같지 않은데,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데아에 최대한 근접하게 인식하는 것이 되겠네요. 근데 결코 인식할 수 없고, 근접하게밖에 인식할 수 없다면 플라톤은 왜 이데아를 얘기한 것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