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주역과 글쓰기 에세이 후기

작성자
은남
작성일
2020-07-17 23:56
조회
158
주역과 글쓰기 팀도 ‘수뢰둔’부터 ‘화천대유’까지 12개 괘를 가지고 에세이를 썼습니다만, 괘를 가지고 자기 문제를 풀어헤친 '에세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많이 부족했습니다.  각자 주어진 괘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괘에 대한 샘의 해석을 우선 옮겨 봅니다.

무슨 괘든 象의 이미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상의 이미지를 통해 유추해낸 단사나 상전을 음미하여 괘를 어떤 상황에서 볼 것인지를 고민해야 내 인생에서 경험한 것과 연관해서 볼 수 있습니다. 수뢰둔괘는 무슨 일이 이루어지기 전의 꽉 믹힌 혼돈의 상태입니다. 막힌 시기인데도 또다른 시작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크게 형통할 수 있는 것이지요. 퇴직을 하고 다른 일을 시작하든, 새로운 리듬을 시작하든 시작은 어렵고 답답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괘를 보면 무엇을 시작하려 할 때 내가 무엇을 조심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보입니다.

산수몽괘에서 몽은 어리석은데 왜 ‘亨’ 이라고 했을까요. 원형이정에서 ‘亨’은 무성한 여름의 이치를 상징합니다. 정이천은 배움 속에서 ‘이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형통한 거라 했습니다. 몽괘는 사람의 잠재성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이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잠재성을 깨워 주는 방식이 사람에 따라 ‘發’이거나, 인정사정 없이 ‘擊’해야 하는 경우가 있을 뿐입니다. 발몽이니 격몽이니 하는 것에는 일깨워주면 무지몽매함을 벗겨낼 수 있다는 인간의 잠재성을 믿는 거라 했지요. 이때 ‘몽’은 무지몽매의 ‘몽’으로 지식이 없음이 아니라 인간의 무지를 말합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질곡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하였죠. 무지함을 벗겨주는 스승은 덕을 일깨워주는 사람입니다. 덕을 일깨워주는 사람인 스승은 진리와 관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몽괘에서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관계를 사유해야 하고, 뭘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천수송괘는 무조건 싸움을 회피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싸우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싸움은 왜 일어나는지, 싸움이 불가피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싸움은 송괘 단사에서 보이듯 ‘有孚’ 즉 자기 믿음에서 나온다고 했죠. 자기 믿음이란 자기 옳음인데, 자기만 옳다고 하여 송사를 끝까지 하면 凶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송사를 끝까지 다투는 것이 흉할까, 이런 갈등상황에서 ‘대인’은 무엇일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대인은 양쪽으로 편을 갈라놓고 누가 옳으니 하는 심판자가 아니라 불교의 포살자자 같은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지수사괘는 오합지졸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아이들을 어떻게 따르게 할 것인가의 현실적인 문제에서 보면 ‘律’로 한다는 것이 엄격한 관리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리더의 貞이나 中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으면 리더는 엄격한 규율의 관리자가 될 뿐입니다.

수천수괘에서 ‘기다림이 역량이 되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관건입니다. 정이천이 기다림을 기름(養)이라는 자양분을 섭취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음식을 먹음으로써 자기 몸을 키우듯이 정신을 키우는 과정이 기다림이라는 거지요. 몸의 차원에서 ‘養’이라면 정신의 차원에서는 ‘恒心’이라 하겠습니다. 기다림은 항심으로 성장할 때인거죠. 성장할 때 항심하면서 간다는 것이 견뎌내고 참는 문제가 아니라 꾸준히 기름을 받는 과정이라 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기름을 줄 수 있는 때가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것입니다. 수괘도 공부의 단계로 풀이해도 좋겠다고 했습니다.

천화동인괘에서는 사람과 함께 할 때 무엇을 함께 해야 하는가가 핵심입니다. 정이천은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은 마음을 함께 하는 것(同心)이라 했습니다. 사람과 마음을 함께 할 때는 감정적인 호응이 아니라 뜻을 함께 하는 것(同志) 입니다.  가장 오래할 수 있고 죽을때까지 해야 하는 게 아마도 공부일겁니다. 공부에 뜻을 두고 함께 할 때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럴 때 함께 속에는  감정적인 것을 넘어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을테구요.

천택리괘는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履虎尾)는 표현이 나옵니다. 리괘는 禮를 행하는 것이라 했으며, 禮는 실천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밟아 나가는 것입니다. 한 걸음 걷기가, 인간이 도리를 지키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이야기가 천택리괘입니다.

저는 지천태와 천지비괘를 가지고 썼습니다. 천지가 아니라 지천이어야 하늘과 땅이 사귀어 통하여 편안하게 되고, 제자리에 있어 보이는 천지는 오히려 막혔다는 괘상에서 고민이 시작되었지만, 내가 어느 지점에서 막혔는지 솔직하게 보지 못했다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공부를 왜 하는지, 나에게 공부는 뭐였는지, 공부를 통해서 나눈다는 것은 무엇인지, 공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부터 다시 해보려 합니다.  보다시피 에세이가 끝났지만 끝난 것이 아니라 다른 시작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돌아와 내내 고민하고 완전히 처음으로 돌아간 기분이었습니다.  고민해보라는 지점에서 다시 하는 것이지요.  저도 천지비괘를 가지고 이리저리 써보고 있는 중입니다.  주역팀 에세이 다시 쓰기는 각자 계속 진행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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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19 08:39
    안 풀렸던 것들이 에세이 시간 때 많이 풀렸습니다. 특히 본괘와 지괘의 관계를 더 실감할 수 있었어요. 제가 맡은 동인괘의 지괘가 장수, 엄격한 통솔의 규율을 말하는 사괘라는 것도 앗! 하면서 오더라고요. ㅎㅎ 여차저차 다시 에세이를 쓰는 분들은 서로 화이팅합시다! 아직 우린 2학기 더 남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