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8.2 주역과 글쓰기 공지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0-07-29 21:31
조회
139
200802 주역과 글쓰기 공지

주역과 글쓰기 3학기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겸(謙)괘와 예(豫)괘를 읽었는데요,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겸괘의 공평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겸괘는 <주역>의 64괘 중 가장 바람직한 태도를 보여주는 괘입니다. 산이면서 홀로 우뚝 서 있지 않고 땅에 감싸여 있는 모습이지요. 높으면서도 자기를 뽐내거나 오만하지 않은 그 모습을 따서 ‘겸(謙)’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 겸괘의 성질은 공평함입니다. 상전을 보면, 군자가 겸의 형상을 보고 “많은 데에서 취하여 적은 데에 더해 주어 물건을 저울질하여 베풂을 공평하게 한다”라고 나오지요.

그런데 이때 겸괘의 공평함은 단지 ‘모두에게 똑같이’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똑같이’ 분배하는 기계적 평등을 선호하지만, 사실 그 평등이 정말 좋아서가 아니라 그래야 뒷말이 없기 때문이지요. <주역>을 보면 우리가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이치가 사실 마땅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더는 생각하기 싫기 때문에 고수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군자가 저울질할 때의 칭(稱)은 상황에 따른 분배를 의미합니다. 모든 것의 각자의 상황에 따른 분배. 그것이 군자가 겸의 형상을 보고 떠올린 것입니다.

상황에 따른 공평함이란 뭘까요? 정이천은 겸(謙)하려면 이치에 통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군자는 뜻이 겸손함에 있으니, 이치에 통달하기 때문에 천명을 즐거워하여 다투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이치에 통달한다면 어떤 날은 좀 더 즐겁고, 어떤 날은 덜 즐겁지 않겠죠. 매일매일 여일하게 흘러갈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보다 좀 더 즐거운 게 있으면 거기에 정서가 고착되고, 나에게 이 즐거운 일이 계속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그 외의 것들은 덜 즐겁고 나쁜 것이 되지요. 그런데 군자는 그 경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무엇이든 품을 수 있는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됩니다.

겸(謙)의 산은 고원의 형태라고도 합니다. 산인데 험준하고 혼자서만 우뚝 솟은 산이 아니라 그 위에 평평한 땅이 있어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것이죠. 채운샘은 지구의 형상을 떠올려 보라고 하셨고요. 지구는 그 자체로 땅이고, 그 가운데 산도 있고 모든 것을 품고 있지요. 또 항상 운동하고 있습니다. 높은 지대는 내려가고 낮은 지대는 융기하면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지요. 그 항상된 운동성 안에서 공평함을 본다면, ‘모두에게 똑같이’와 같은 것은 불가능한데다 공평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겸괘와 함께 읽은 것은 예괘입니다. 예괘는 음악의 괘입니다. 양효가 아래에서 이제 막 위로 올라와 구사효에 자리 잡은 모양이지요. 전을 보면 “양이 처음에 땅 속에 잠기고 갇혀 있다가 동하여 땅을 나옴에 미쳐” 나는 소리라고 나옵니다. 그것이 무척 조화롭고 기쁜 모양이기에 예(豫)라고 한다고 말하지요. 채운샘은 이 기쁨을 새로운 세계가 이제 막 출현하는 국면의 기쁨이라 할 수 있다 하셨습니다.

이 기쁨과 즐거움의 주제는 탐닉하지 않는 것입니다. 끝까지 즐기면 아무리 좋은 상황이라도 흉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효사들을 보면 기쁜 상황인데도 어쩐지 조심스럽습니다. 돌과 같은 절개를 지켜 하루를 넘기도록 즐기지 말라고 한다든가, 너무 우러러 보며 숭상하듯 즐기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들이 주 내용이지요. 채운샘은 강의에서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조건 속에서도 즐거울 수 있다고 하셨지요. 어떤 것이 있어야 하는 상태에서 기쁘다면 그것은 곧 예속이게 된다고 말이죠. 또 내가 기쁜 조건을 만들기 위해 기쁘지 않은 순간들을 감수하려 합니다. 이게 탐닉의 폐해겠지요.

또 예괘의 목적은 모두가 기쁘고 즐거워 모래알처럼 흥청대는 것이 아닙니다. 예괘를 하나로 묶는 구사효를 보면, “비녀로 머리카락을 모으듯 벗을 모으다”라고 나옵니다. 예괘의 상에서 유추되는 음악 또한 사람들을 모으고 제사를 지내는 음악을 뜻하지요. 결국 예괘에서 말하는 기쁨이란 사람들과 함께 공통의 일을 도모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쁨은 나를 기쁘게 했‘던’ 것에 탐닉하고 고착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겸괘와 예괘의 공통점은 이치에 통달한 사람만이 즐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치란 무엇일까요? 그건 모든 것이 항상 변화한다는 역(易)의 원리에 통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재현과 반복을 비교합니다. 재현은 원본이 있고 그것이 계속 변화한다고 생각하는 태도이지요. 그리고 반복은 계속 차이만이 회귀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때 모든 것의 원본으로서의 ‘나’를 고집하느냐 아니면 모든 차이나는 세계를 긍정하느냐가 윤리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는다고 할 때, 그냥 ‘모든 것은 없다, 허무하다’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향해 돌아앉아’ 그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나아갈 것인가.

 

다음 시간은 隨와 蠱읽고, 산풍고괘에 대한 공통과제를 써 옵니다.
앞으로 8주간 시몽동 강의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시몽동의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 1장까지 읽어 오시면(혹은 강의를 들으시고 읽으시면?^^) 됩니다.
간식은 정옥샘

 

일요일에 만나요/
전체 3

  • 2020-07-30 16:20
    부多益寡 稱物平施 부다익과 칭물평시 많은 것을 덜어 부족한 것에 보태고. 만물을 저울질하여 고르게 베푼다. 겸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겸양(겸손한 태도로 남에게 양보하거나 사양함) 과는 다르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겸손은 많은 것을 더는, 비움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의 비움은 쓰레기통을 비우는 것과 같이, 양적으로 가득 찬 것을 비우는 것에는 사유의 한계가 있습니다. 비우는 것은 내 사유의 길을 도주하여, 이전과는 다른 사유를 생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니체가 이야기한 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전의 했던 일을 매번 잊어버리는, 매 순간 첫 번째로 긍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면 할수록 더 어려운 일입니다. 한 괘를 10번씩 쓰는 숙제에서 첫 번째와 같이 성심을 다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두 번째 쓸 때는 1번 썼다는 것을 잊어버려야 하고, 세 번째로 쓸 때는 2번을 썼다는 것을 잊어버려 하고, 마지막 10번째를 쓸 때는 9번을 썼다는 것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이를 들뢰즈는 n승의 역량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간겸에 군자는 끝이 있다고 하였는데, 끝은 일의 완성이 아닌, 매 순간 잊어버리고, 매 순간 항상성을 가지고 끝까지 행동하는 것이 마음에 남습니다.

  • 2020-08-01 17:04
    지산겸괘에서 겸손할 수 있는 바탕으로 ' 稱物平施 '를 말하고 있습니다. 물을 저울질한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 가장 맞는 것을 헤아림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고르게 베푼다는 것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본성상의 문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공평함이란 각각의 본성을 헤아려서 그 본성에 맞게 베풀어줌을 고르게 함이 되는지요?

  • 2020-08-01 17:27
    글 수정이 안 돼서 다시 위 글의 '각각의 본성을 헤아려서 그 본성에 맞게 베풀어줌을 고르게 함'에서 본성을 다시 풀어써봅니다. ㅠㅠ 위 글의 본성은 '개체가 놓인 위치, 욕망, 기질'을 생각하고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