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9.6 주역과 글쓰기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0-09-02 01:10
조회
136
200906 주역과 글쓰기 공지

이번에 읽은 괘는 천뢰무망(天雷无妄)과 산천대축(山天大畜)입니다. ‘경거망동 하지 않는다’, ‘크게 쌓는다’...괘 이름만 보면 무척 좋아 보이는 한 쌍이죠. 하지만 <주역>에는 좋은 괘도 나쁜 괘도 없습니다. 무엇이든 점을 치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죠. 가령 한껏 속도를 내면서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사람에게 천뢰무망괘가 나온다면 그 속도를 늦추고 뭔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괘로 읽힙니다. 그럼 그 사업 하던 사람 입장에서 천뢰무망은 그리 달가운 괘가 아니겠죠(물론 지혜로운 사람은 점괘를 알아듣고 멈추겠지만요). 반면 별 목적 없이 즐기며 일을 하는 사람에게 천뢰무망괘가 나온다면 뜻밖의 이익이 있게 된다는 괘입니다. 그럴 때는 좋은 괘일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주역의 점괘는 결국 점을 치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이걸 잊으면 괘를 보면서 자꾸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좋고 나쁨을 판단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천뢰무망 :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아무튼 무망(无妄)이라고 하니, 신중하고 조심하면서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괘가 천뢰무망(天雷无妄)입니다. 그런데 효사를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무망의 재앙(无妄之災)’과 ‘무망의 병(无妄之疾)’을 말하는 육삼과 구오효입니다. 무망(无妄)이란 좀 더 해석을 하자면 사심(私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심 없이 일에 임하고 행하기 때문에 완전 좋을 것은 없더라도 나쁜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은데, 무려 효사 두 개나 재앙과 병을 말하네요? 도대체 이 효사들은 다 뭘까요?
무망괘의 교훈(?)은 아무리 조심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채운샘은 역대 성인들의 기구한 삶에 대해 이야기 해 주셨는데요. 가령 예수님은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설파하며 선한 삶을 살았지만 결국 제자와 민중은 그를 배신하고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또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세상을 등지고 살지 않았죠. 제자들과 공동체를 일구고 지지고 볶는 삶을 살았습니다. 무망의 재앙, 무망의 병은 우리가 요 모양 요 꼴로 태어난 이상 인간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무수한 일들을 뜻합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무망(无妄)입니다. 경거망동하지 않고, 마음의 동요에 이끌려 다니지 말고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이 괘의 메시지이지요. 따라서 무망은 무위(無爲)의 괘, 조장(助長)하지 않는 괘이기도 합니다. 일이 좀 나빠질 것 같으니까 얼른 다른 걸 해보려고 경거망동 하는 것 자체가 재앙이고 고칠 길 없는 병이라는 것. 반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와도 그것을 병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기쁜 일(勿藥有喜)이라고 합니다. 이때 기쁨이란 뜻밖의 이득 같은 게 아닌, 내 역량의 고양을 느끼는 것과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산천대축(山天大畜) : 크게 쌓이면 세상을 위해
대축괘 이전에 풍천소축(風天小畜)괘가 있었습니다. 이 괘는 음효가 하나였기 때문에 뭔가 쌓이긴 했지만 혼자서 다섯 양을 감당하기도 벅찬 상태였지요. 그래서 괘사는 밀운불우(密雲不雨)였습니다. 구름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일이 채 성사되지는 못하는 상태의 괘가 소축괘였지요. 반면 산천대축은 음효가 두 개입니다. 소축괘보다는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좀 생겼지요. 게다가 괘상을 보면 모든 것을 품는 산과 강건한 하늘의 조합입니다. 기세만 보면 아주 풍요롭고 또 드높아 보이지요. 산이 하늘 위에 있으니, 구름을 뚫고 우뚝 솟을 정도로 높은 산의 이미지를 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쌓였다는 걸까요? 그건 바로 재물이 아니라 덕(德)입니다. 덕이란 내면의 덕을 말합니다. 이것이 조금도 아니고 많이 쌓였을 때, 대축괘는 그것을 혼자 독식하지 말고 세상을 위해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괘사에서는 ‘집에서 먹지 말 것[不家食]을 당부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위해 쌓인 것을 쓴다는 건 구체적으로 뭘까요? <공자가어>에서는 가식(家食)을 봉록으로 해석한다고 합니다. 벼슬길에 나아가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소소한 일로 여겨질 정도로 많이 쌓였다면, 군자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교육입니다. 단전에서는 불가식(不家食)을 현자를 기르는 일[養賢]이라고 풀이하지요. 제도를 만들고 백성들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상을 줘도 도둑질하지 않도록” 백성을 이끄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괘가 대축괘입니다.
이런 대축괘는 돈이나 재물을 바라는 사람이 뽑으면 그닥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해석할 괘입니다. 쌓는 것은 어디까지나 덕, 내면의 덕이니까요. 덕은 쌓이면 나눠야 합니다. 이런 괘는 공동체를 만들거나 비영리목적의 뭔가를 하려는 사람에게는 좋은 괘일 수 있겠지요. 이래서 점괘는 점을 치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질베르 시몽동 : 모든 것은 운동한다
그런데 괘라든가 음양이라든가, 이런 기호들은 지금 우리에게 다 무엇일까요? <주역>의 해석들을 보면 대개 군자와 성인, 치국지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아무래도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와닿지 않는 해석들이죠.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21세기의 방식으로 <주역>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건 <주역>을 읽어낼 수 있는 현대적인 철학 용어라 할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시몽동을 펴든 것입니다...^^;;
시몽동은 개체를 일종의 과포화 용액처럼 봅니다. 과포화 용액은 어느 임계점을 지나면 결정이 됩니다. 용액에서 고체로,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이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실험실 풍경을 시몽동은 그대로 철학의 차원으로 가져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입니다. 첫째 어떤 물질도 역동적인 자기조직화를 한다는 것. 즉 뭔가가 만들어지는 것은 순전히 자기 의지로만 뭔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외부 조건에 휘둘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모든 것이 운동하는 가운데, 내외의 운동성이 공명할 때 개체화가 이루어집니다. 두 번째, 이 운동의 차원에서 보면 생명이라는 것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 전체는 서로 의존하는 가운데 존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 전체의 생성을 설명할 수 있을 뿐, 생명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물체와 단지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비생명을 구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주역>의 언어로 말하자면, 에너지 차원의 음양이 입자공명으로 팔괘의 형상을 갖추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괘는 하나의 개체이며 또 다른 괘로 변화하는 운동 속에 있는 것이고요. 운동성의 차원에서 보면 하나의 괘는 그 자체로 무수하게 많은 것들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채운샘은 만약 운동을 이해하는 사람이 괘를 보면 각 효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냐고 하셨습니다. 64괘는 움직이며 서로 공명하고 변하고 그러면서도 항상된 자연의 기호인 것이죠.

 
다음 시간에는 산뢰이(山雷頤), 택풍대과(澤風大過) 읽고 각자 공통과제 써 옵니다.
<시몽동, 개체화 이론의 이해>는 40~72쪽 읽어옵니다.

 

후기는 은남샘
간식은 혜원

 

일요일에 만나요//
전체 1

  • 2020-09-03 11:17
    자유는 무엇인가를 할 자유보다 하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무망은 하지 않을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군자도 아프고, 슬프고, 괴롭다. 삶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군자가 선을 행함에 있어서 결과를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그 자체가 기쁨이고 선물이다. 그러니 일이 오는 것을 그저 담담히 받아 들이고 일에 대해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결과를 바라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고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