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주역과 글쓰기 3학기 4주차 후기

작성자
정옥
작성일
2020-08-29 15:05
조회
153
8,23 주역과 글쓰기 3학기 4회차 수업 후기

 

코로나가 다시 극성을 부리면서 모두를 긴장시키고 있는 요즘입니다. 우리 규문에서도 드디어 zoom을 활용한 세미나를 하고, 지방에서 오시는 선생님들이 출석을 못하기도 하고, 더러 휴강도 하면서 이 위기를 넘기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주역팀은 종일건건하는 군자의 미덕을 조금이라도 닮아보자고(?) 건건하게 수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ㅎ 물론 10인 미만이라는 물리적 조건이 되기도 하구요. 암튼 함께 조심하면서 이 변화의 국면을 잘 넘어갔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모두 무탈하시기를요.

 

박괘, 씨 하나를 남기는 때

이번 주는 산지박괘와 지뢰복괘를 공부했습니다. 64괘 중 23, 24번째 괘이지요. 산지박괘는 지금껏 공부한 괘 중 가장 흉이 많이 나오는 괘인 것 같습니다. 초효부터 오효까지가 모두 음인 괘로 침상 다리가 깍여 나가는 과정이고 결국엔 사람의 허벅지까지 깍여 나가는 흉한 상황이 연속되고 있어서지요. 주역의 괘들을 해석하며 그나마 감을 감은 것은 100% 흉한 상황이 연속되는 일은 없고, 그것이 어떤 상황인지, 어떤 국면에 접어들었는지를 해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지요. 그레서인지 샘들의 공통과제에서는 대부분 박괘를 갈무리하는 괘로 해석해 오셨어요. 근데, 샘은 딱 잘라 ‘박괘는 부서지고 잃어버리고 깨어지는 괘’ 라고 하셨죠. 점을 쳐 박괘가 나오면 하던 일이 어김없이 깨어짐을 예고하는 것이라고요.

이때 중요한 것은 그 국면을 맞이하는 자의 태도입니다. 군자는 군자처럼 소인은 소인처럼 그 괘를 해석한다는 것이죠. 소인과 군자를 가르는 핵심은 ‘고착된 사고’입니다. 소인은 그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찾고 자신이 해를 입지 않을 방법을 모색하겠지요. 반대로 군자는 그 상황에서 천지의 운동, 즉 전체를 먼저 고려하여, 그 국면이 나아갈 수 없는 때임을 알고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새로운 삶의 태도로 돌아선다는 것입니다. 다 같이 전체성을 겪고 있는 중임을 아는 것이죠.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기도 하고요. 소인의 태도를 우리 몸의 병으로 생각하면 접근이 쉽습니다. 암이 습관병이라는 것은 이제 통용되는 상식인 것 같습니다. 샘도 암을 예로 들어주셨는데, 암세포는 자기 자신으로 동일화 하는 것밖에 활동력을 구성하지 못하는 세포라고 하지요. 자기 자신 밖에 알지 못하기에모든 걸 자기처럼 만들어버리는 세포. 사유가 이와 같다면 그건 파시즘입니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동일한 사고를 할 수밖에 없고, 유연한 대처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교육의 정도와는 무관합니다 (cf, 전광훈에게서 하느님을 보았다는 모 여변호사) 이질적인 것과의 변용이 어려운 것을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이, 어떻게 ‘기쁨이 되는 비젼을 가질것인가의 여부입니다. 기쁨은 언제나 긍정합니다. 자신을 긍정하고, 세상일의 흥망성쇠를 긍정하고, 변화되는 국면을 긍정하기에 자신의 이해득실을 떠나 진정 쾌락을 구성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상구효에서 말하는 ‘석과’입니다. 석과는 나무가 모든 잎을 다 떨구고 마지막 남긴 씨과일입니다. 전 시골에서 한겨울 까치밥이라고 남겨 놓은 새빨간 홍씨들을 늘 보았었는데요, 앙상한 가지에 얼어서 색이 더 새빨개진 홍씨는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었죠. 석과는 많은 생각을 불러오는데요, 우선은 한겨울 음이 가득한 안에 양이 숨어 있다는 사실, 그건 어떤 것도 못할 만큼 절망적인 때는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수선하여 동적인 활동을 못한다면 그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효에서도 여러 번 해석이 나왔었지만 이럴 땐 자신에게 필요한 한가지만을 틀어쥐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잎을 다 떨구는 결단이 필요하지요. 주역팀에는 이쯤에서 늘 불려 나오는 마담 둘이 있지만 여기선 익명인 걸로 하겠습니다. 아마 두 마담들이 뜨끔했을텐데, 이것뿐이겠습니까? 실은 매 괘에 다 해당하는 것이 있습니다. 잎을 떨구고 하나를 남기는 지혜, 그게 늘 공부거리입니다. 각설하고, 이 절망의 때를 지나는 태도는 국면이 바뀌는 순간 부끄럽지 않은 태도로 사는 것입니다. 씨 하나를 품지 않는다면 국면이 바뀌어도 소용이 없을테니까요. 수업에서도 나온 <맹자 진심장>의 한 구절로 박괘 마무리를 할까 합니다.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자기 본래의 성을 알 수 있다. 자기 본래의 성을 알게 되면 을 알 수 있다. 그 마음의 훌륭한 측면들을 잘 보존하고, 자기 본래의 을 잘 기르게 되면 그것이 곧 하늘을 섬기는 길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일찍 죽을 수도 있고 오래 살 수도 있는 것이니, 그러한 문제로 내 마음을 흐트려서는 아니 된다. 오직 내 몸을 끊임없이 닦음으로써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곧 천명을 내 삶 속에서 확립하는 것이다.(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心, 所以事天也. 死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 (<맹자> 진심상 7장)

 

원칙을 잃지 않는 운동성, 復卦

 

복괘는 박괘와 반대로 양이 다시 아래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상구효를 빼고 모두 음인 괘입니다. 절기로 보면 동지(음력 11월)로 밤이 가장 길고 겨울의 중간을 향해 가는 괘인데, 그 안에 양이 싹트고 있습니다. 동지를 지난 다음은 낮이 길어지는 일만 남은 것이기에 음 안에 암장되어 있는 양을 보는 혜안이 필요하지요. 숨겨진 운동성을 보라는 것인데, 그 대표적 예가 순음인 중지곤괘의 10월을 양월(陽月)로 부르는 것입니다. 정이천은 주를 달기를 순음이지만 그 안에 양이 없는 것이 아니기에 이를 잊어버릴까봐 양월이라 부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조들의 노파심이 느껴집니다.

복괘의 복은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흔들리지 않는 원칙, 자기 결단, 자기 강제의 의미입니다. 저는 돌아오고 회복한다는 의미의 복괘가 좋은 괘로 여겨졌는데, 복괘도 점으로 보면 그리 좋은 괘는 아니라고 합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해석이 되는데. 박괘처럼 군자에게는 살아가는 자신의 태도를 알려주는 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강의에서 어떤 국면이 삶을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이 남았는데요, 조건이 나의 삶의 태도까지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처해진 조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자신의 결단으로 가능한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이 때의 태도이겠지요.

그래도 복은 형통하다고 괘사에서 말합니다. 형통하기 위한 조건이 있는데, 그건 운동성과 벗입니다. 자기를 강제할 수 있는 힘, 이것이 운동성으로 표현된 것 같은데, 그 힘을 지키고 있으면 허물이 없어(出入無疾) 벗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막힌 때인지라 벗이 더 필요하고, 벗과 함께라면 나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요.

복괘는 하나의 양효인 초구효가 중요합니다. 초구효는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는 것입니다.(不遠復) 마음의 사사로움 일어날 때, 잘라버리는 것(動之端)이 중요합니다. 정이천은 주에서 유학의 최고 모범생을 안회의 예를 들며 “안회는 하나라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바가 없었고, 알면 단번에 고치지 않음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죠.(未嘗不遽改) 아는 즉시 고치는 것 그게 멀리가지 않는 것이고, 계사전에서 공자님도 이를 復行이라고 했습니다. 과실이 이미 드러나기 전에 고치면 허물이 없겠지만 우리 같은 소인들은 늘 행위까지 나아가게 되죠. 그래도 바로 알아차리고 돌아오면 허물이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만 되어도 참 좋겠지만, 아직 많은 復이 남아 있습니다. 육이의 休復은 仁으로 돌아옴입니다. 휴복의 인은 극기 복례로, 자기 잘못을 알고 자기 스스로를 강제할 수 있는 힘, 자기 결단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이천 주에서 仁의 해석이 독특합니다. 仁하다는 것은 천하의 공이고 선의 근본이(天下之公 善之本) 라고 풀고 있습니다. 仁이 개인적인 성격이 아니라, 본성적 차원 만물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죠. 샘은 이게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라고 해석하셨는데, 유학에서 불선하다는 것은 바로 사사로움, 이걸 가장 경계하고 있지요.

육삼은 빈복(賓復) 즉 자주 돌이킬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마담들 또 소환되었는데, 우선 빈복의 간격이라도 넓혀보는 것으로. 근데 이런 자세가 바로 결단력이 없는 것입니다. 빈복하게 되는 이유는 安固하지 못해서지죠. 안고는 강고한 항상성으로 언제나 늘 그럴 수 있는 힘, 즉 원칙을 지키겠다는 힘을 말합니다. 습관에 지지 않고 원칙을 지키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 또한 공부길이겠지요. 그래서 復은 反復其道, 도를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서 도가 끊임없이 작동하도록 하는 것, 그 원칙을 지키며 살면 형통하다고 복괘는 알려줍니다. 최소한, 아니 절대 돌아올 수 없는 미복(迷復)은 되지 않아야 한다로 복괘를 정리했습니다.

 

 

 
전체 2

  • 2020-08-29 16:47
    강의 중 휴복의 인(仁)부분이 정확하게 이해가 안 되었는데 정옥님 후기 읽으면서 좀 정리가 되네요. 사사로움 없이 마음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가 가장 어려운것 같습니다. 사심없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기대 실망하는 사사로움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요. 진짜 남탓 할 것 없이 내 마음하나 제대로 지키는 것만 좀 제대로 해얄듯 합니다.
    그나저나 사회적거리두기, 언택트 시기의 가장 큰 피해자로서 주역강의라도 있어 어쩔 수 없이(?) 공부라도 하면서 보내고 있습니다. 휴강 결사반대!

  • 2020-08-29 18:05
    복은' 반복기도'라는 말이 마음에 울리네요^^ 그 도를 반복한다는 것은 돌아옴일까요? 아니면 회복함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