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2학기 8주차(6.20)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0-06-17 19:41
조회
133
 

<도덕의 계보>를 공부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면 이것이 도덕에 대한 순수한 연구서 혹은 선악에 대한 단순한 비판서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것은 조금만 읽어봐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선과 악’ 이전에 있었던 고귀한 인간들의 ‘좋음과 나쁨’이라는 가치 기준, 원한의 메커니즘과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의 기원, 국가라는 폭력적 힘과 그리스도교의 천재적 장난 등 <도덕의 계보>에는 우리 상식 속 도덕의 영역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이 등장합니다. 채운샘은 이 텍스트가 서양 문명사에 대한 진단이자 전면적 대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00년 이상 서양을 지배한 그리스도교적 심리구조와의 싸움. 이 싸움은 동시에 니체 자신의 역사성과의 대결이기도 합니다. 니체는 노예, 약자, 허영심, 금욕, 양심의 가책 등에 대해 신랄하고 철저하고 집요하게 비판을 이어왔습니다. 그러고 보면, 독일정신으로 표현되는 이상주의(동시에 허무주의)와의 싸움은 <반시대적 고찰>에서부터 말년(1890년의 붕괴)의 <안티크리스트>까지 계속됩니다. 왜 그래야 했을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왜 니체는 끝내 붕괴에 이를 때까지 그런 싸움을 계속해야 했을까요?

“내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이란 무엇일까? 내가 홀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 나를 질식시키고 초췌하게 만드는 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나쁜 공기다!”(375쪽) 니체는 누구보다도 더 치밀하게 자기 시대의 ‘나쁜 공기’를 감지하고 그것에 참을 수 없음을 느꼈고 거기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니체는 자기 자신이 자신이 그러한 공기 속에서 호흡한 자, 즉 ‘시대의 아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절절히 직시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니체가 비판한 모든 모습, 싸우고자 했던 모든 약함, 노예성, 허영심, 이상주의와 같은 반응적인 힘들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한 모습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더 신랄하게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끝까지 놓지 않고 파고들어갔다는 것. 그것이 니체의 강함이자 용기입니다.

니체는 기독교와 싸웁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무엇과 싸울까요? 교리? 신도들? 사제들? 모두 맞지만 그것들 자체는 아닙니다. 니체가 싸우고 있는 것은 기독교를 통해 생산되는 심리적 메커니즘, 거기서 만들어지는 삶에 대한 태도와 싸웁니다. 니체는 모든 국가와 문화의 본질은 길들임으로 봅니다. 따라서 신민과 국가 간에는 보호-보상 이라는 채권채무 관계가 형성됩니다. 보통 그것은 국방에 대한 세금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가시적이고 이주나 죽음이라는 사건과 함께 끝이 나는 관계입니다. 기독교는 이 채권채무 관계를 단순히 이어받지 않고 그것을 영원하고 비가시적인 것으로 내면화시켰습니다. 초월신과 인간의 관계는 국가와 신민 사이의 관계와 달리 떠나거나 죽어도 갚을 수 없는 채권채무관계입니다. 거기에는 심연이 있습니다. 인간은 존재함 자체가 죄인이며 인간 앞에는 자신들의 죄 때문에 희생당한 신의 아들이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무류적인 존재인 신과 불완전하고 악하며 죄로 물든 존재인 인간이라는 구도. 이렇게 설정된 구도 속에서 인간은 불완전한 자신에 가책을 갖게 됩니다. 인간은 초월적 존재의 ‘완전한 상’에 비추어 끊임없이 자신을 비하하고 잘못을 고해하고 점검하는 존재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럴 때, 그렇게 절대적 기준으로 작동하는 진실에 비추어 자신을 바라볼 때, 개인들은 가장 효율적으로 통치되는 주체가 됩니다. 죄의식의 메커니즘은 가장 강력한 통치 메커니즘이기도 합니다.

푸코는 그렇게 주체의 품행(행위, 생각, 감수성)을 인도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통치성을 ‘사목권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 메커니즘은 꼴은 달라졌지만 동일한 형식으로 자본주의 내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산에서의 유용성, 시장에서의 가치, 미래의 보상을 초월항으로 두고서 사물과 사람에 대한 관계를 구성하는 우리 자신의 합리성이 그것입니다. 그리하여 돈을 위해, 이득을 위해, 혹은 그것이 전제되어 있는 행복이라는 이미지를 위해 근면 성실하게 노동하고 자기 자신의 자원을 분배하는 우리의 ‘자연스러움’이 그것입니다. 대가, 보상, 성장이라는 초월항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현행적 실존을 불완전한 것으로 설정하고 열심히 자기의 삶을 바치는 것 속에는 기독교의 가책 메커니즘이 변형되어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니체는 자신의 시대를 진단하면서 이러한 기독교적 심리 메커니즘이 승리하는 국면을 경험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약자적 메커니즘과 노예근성을 회피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밑바닥까지 들어가 그것들과의 싸움을 그만두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 공지입니다.

<도덕의 계보> 제3논문(~540쪽)을 읽고 ‘도대체 무기력한 자는 왜 그토록 열심히 살아가는가?’하는 질문을 품고서 요약해옵니다. 또 에세이 자유주제를 정해와 봅니다.

간식은 저와 내영샘이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뜬금없지만 훈훈하고 화목한 강의 모습을 첨부합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