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2학기 9주차 공지(6.27)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6-25 20:19
조회
117
공지부터 빠르게 하고 가겠습니다. 이번 주에는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를 다시 보고 정리하면서 에세이 주제를 정해오시면 됩니다. 이번 에세이의 과제는 자기 자신의 도덕을 파헤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강하게 지니고 있는 ‘해야 함’이 무엇인지, 거기에는 어떠한 가책과 원한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글을 써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정의감이 어떻게 지상에 나타났는가라는 문제를 설명해야 하고, ‘범죄자는 형벌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는 달리 행위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는 내용을 담지해야만 했던 사상은 극히 뒤늦게 달성된 인간의 판단과 추리의 교묘한 형식이다. 이 형식을 처음부터 있었던 것으로 잘못 여기는 사람은 고대 인류에 관한 심리학에 거친 손길로 폭행하는 것이 된다. 인류 역사의 오랜 기간을 통해 악행의 주모자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유로, 즉 오직 죄를 지은 자만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 형벌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 - 오히려 형벌은, 오늘날 역시 부모가 아이들에게 벌을 주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피해에 대해 가해자에게 표출하는 분노에서 가해졌던 것이다.”(니체, 《도덕의 계보》, 책세상, 403쪽)

《도덕의 계보》 2논문에는 ‘공정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니체가 문제 삼는 것은 현대적 정신들이 숭배하는 과학적 공정성이나 기계적 평등주의가 사실은 복수심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니체는 이들이 마치 “정의란 근본적으로 단지 피해 감정이 발전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417쪽) 생각한다는 점을 문제 삼고 있는데, 저는 우리 자신도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공정하다’고 말하나요? 혹은 언제 부당함을 느끼나요? 우리는 남들이 겪지 않은 일을 나만 겪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 또 나는 갖지 못하는 것을 남들이 가질 때 부당함을 느낍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런 공정성에 대한 감각에 반응적 정서, 스스로의 힘을 부정하는 부정적 의지가 스며있음을 니체는 지적합니다.

채운샘은 ‘개미와 베짱이’의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개미는 일을 하고 베짱이는 놉니다. 개미가 일을 하는 것은 그의 존재 방식입니다. 베짱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이 경우에 우리가 생각하는 공정성은, 자기 자신이 일한 만큼 받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한 개미는 그 보상을 받아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게으른 베짱이는 굶어죽는 것. 자기 자신만큼 노력하지 않은 자가 자신과 같은 보상을 받는 것, 우리는 이것을 부당함이라고 말합니다. ‘불신지옥’을 외치는 광신도나 고위공직자 자녀의 부정입학 혐의에 대해 ‘나의 노력이 부정당한 것 같다’며 분개하는 대학생들, ‘기회의 평등’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 이러한 의미의 ‘공정함’은 자기 행위와 실존을 긍정적으로 구성해가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타자를 무력화하는 방식의 힘의 사용에 의해 가치화됩니다.

‘나는 놀 수도 있었는데 참았으니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개미는 자기 힘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킵니다. 이것은 자기 힘의 고양 속에서, 스스로를 더 강하게 하고 긍정적이게 하는 방식으로 행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 및 보상과의 편협하고 의존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의 행위를 구축하는 방식인 것이죠. 이처럼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온 ‘아름다운’ 가치들의 배후에는 자기 자신을 무력화하는 힘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쩌면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인식의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음이 아닐까요. 우리가 이번 에세이를 쓰며 맞서 싸워야 할 것이 바로 이런 어리석음이라는 생각입니다.

간식은 저와 나영샘이 맡았습니다~ 토요일에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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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26 12:47
    개미에게 있어 문제는 그가 놀지 못한다거나 너무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한 일, 자신의 행위, 자신에게 그러한 방식으로 표출된 힘, 존재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없다는 것이군요. 할 수도 있던 것을 하지 않고 참았다는 사고 방식 속에 들어 있는 기만과 저속함. 니체는 그것을 '건강'의 관점에서 병리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