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4주차 후기

작성자
이정수
작성일
2020-05-31 22:49
조회
99
마트롱은 우리의 정념적 삶이 어떤 토대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밝히고 이해해야 우리가 환상, 미신, 가상, 정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마트롱도 그렇지만, 왜 인류의 많은 스승들은 그렇게까지 자신의 이성적 능력을 밀고나가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을까? 굳이 그렇게까지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정념의 자가-조절력(마음의 회복력)에 따라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더’ 이해하려고 하는 욕망을 작동시키지 않고 ‘이 정도까지만 알면 되겠지’, ‘그렇게 어려운 건 몰라도 괜찮아’ 하고 타협하고 말지만, 그들은 이해하려는 노력의 ‘끝까지’ 간다. 그들은 자신의 실존을 ‘절대’ 긍정하며, ‘개체이자 신’으로서의 삶, ‘종심소욕불유구’의 삶, ‘색즉시공공즉시색’의 삶, 능동적 자유의 삶을 욕망했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은 완벽하게 자유로운 삶, 완벽하게 능동적인 삶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들의 ‘절대적 차원’을 ‘맛’이라도 보려는 우리의 출발점은 ‘개체와 전체를 다르게 이해해보려는’ 소박한 욕망이다.

 

‘이성’이 중요한 것은 정념이 무력하거나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정념만으로는 넘어가지 못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정념은 극복의 대상이나 제거의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 삶의 실존 조건인 정념을 어떻게 이성과 일치시켜 갈 것인가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1차적으로 형성되는 정념이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 갖게 되는 욕망과 모순되지 않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정념과 분리된 이성은 무력하다. 코나투스의 발현으로서의 정념이 어떻게 이성적 인식을 토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중요한 점은 감정과 이성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능동과 수동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이다. “우리 자아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시작점으로 삼아야 할 단순하고 평범한 특성들(무엇보다 이성)은 모든 사람에게 있다.”(마트롱, 311쪽)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이유로, 이성을 무시하고 있다. “정서적 삶은 자연 상태에서조차 정념적 삶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다양한 정도로 이성을 지니고 있으며, 아무리 미미하게 발달되어 있을지라도 이성 역시 우리 안에 적어도 몇몇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다.”(320쪽) 자연 상태에서도 인간은 싸움으로만 점철되는 삶을 살아가지는 못한다. 인간은 그러한 삶이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무의식적 차원에서 안다. 서로 싸우는 중에도 한편에서는 갈등을 완화시키는 메커니즘이 저절로 작동한다. 그들은 전쟁도 하고 교역도 한다. 정념에 사로잡힌 “봉건적 인간의 진정한 극복을 실현하는 자는 ‘부르주아’가 아닌 스피노자주의 철학자이다.”(319쪽) 우리는 수동(겪음)을 출발점으로 해서 능동으로의 이행을 사유해야 한다. 이성이 발휘되면 곧바로 능동적 감정이 생겨난다.

 

“영혼이 물체의 특성과 자기 신체의 특성을 참되게 인식하는 만큼, 신체도 자신에게 합치하는 운동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진정한 본성에 따라 왜곡 없이 활동한다.”(321쪽) 하지만 이성이 추상적인 수준에 머무는 한, 이성은 독특한 본질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으며 실존의 전체 모습도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이성을 통해 우선 신체와 영혼의 특성을 알고, 그것을 조금 더 사용하면 2종 인식에 이른다. 2종 인식은 ‘역지사지’라 할 수 있는데, 우리가 다른 사람과 공통적인 것 속에서 이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지만 2종 인식은 공통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적합한 표상을 갖는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지각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한편으로 인간 본성 일반에 대한 참된 관념으로, 다른 한편으로 특수하지만 부적합한 표상들로.”(322쪽) 이 경우 이성적 욕망은 목적론적으로 바뀌어 모범이나 모델을 요청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성을 규범적으로 쓰는 데 머물면서, 당위적•금욕적 인간이 되어 자신의 가치판단을 ‘이상’과 비교하게 된다. 우리는 왜 현실과 이상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당연시 하는가? 우리는 어떤 부적합한 관념 속에서 이상을 계속 도입하게 되는가? 우리는 왜 사건이 벌어지는 현실로부터 역량을 실험하기보다는 어떤 상태를 고수하면서, ‘바꾸는 것’을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상을 끌어들이지 않고 완벽하게 현행적 역량을 구성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는 삶이 아닐까?

 

“이성과 정념은 동일한 지반에서 마주친다. 이미 정념적 소외는 우리가 선이라고 혹은 악이라고 간주하는 특정 사물들에 우리 욕망을 고착시켰다.”(328쪽) 이성과 정념은 선후가 아니다. 정념의 토대 속에서 인식이 자라나고 인식의 토대 속에서 정념이 자라난다. “우리의 인과적 능력은 유한하며 그것을 능가하는 외적인 힘에 가로막힐 소지는 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정념이 대개 이성의 요구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334쪽) 그렇다면 이성이 정념에 의해 무력화되지 않는 조건은 무엇일까? “참된 인식에서 생겨난 욕망이 홀로 우리를 이끌어 가기에는 아직 너무 약할 경우, 이 욕망은 우리를 그와 같은 방향으로 유도하는 정념적 욕망에 의해 보강되어야 하며, 또한 여기서 조달된 원조가 적수인 반대쪽의 정념적 욕망들을 패퇴시킬 만큼은 강력해야 한다.”(343쪽) 우리는 이성에 의해 형성되는 욕망과 정념에 의한 욕망의 상호작용, 조화, 일치를 통해 정념에 의한 이성의 무력화를 막을 수 있다. “이성은 매우 높은 발달 수준에 도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미 획득된 인식들에 대해 반성하면서 자신이 애초부터 정념의 진리였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347쪽)

 

이성의 인도하에 자기 존재를 보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산다는 것은 최후까지 삶의 고유한 목적으로 남는다. 이성과 함께든 이성 없이든, 우리가 우리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결코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성 없이 우리는 우리 존재에 대해 가상만을 갖지만, 이성과 함께라면 가상이 일소된다는 것뿐이다.”(358쪽) ‘목적론 비판’은 목적을 갖는 것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삶의 외부적인 것을 가지고 삶의 현행성을 규정하려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코나투스는 단지 우리 자아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 자아 전체이다. 우리 존재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은 우리가 보존하고자 노력하는 존재와 결코 다르지 않다. 이 노력이 곧 우리의 현행적 본질이기 때문이다.”(359쪽) 존재가 욕망이고 코나투스다. 욕망은 존재의 ‘일부’가 아니다. “내 존재를 유지하는 경향을 띤다는 것은, 나의 존재에서, 그리고 나의 전() 존재에서 연역되는 것을 산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어떠한 변용이 일어나든, 이는 늘 참이다. 내가 특정한 양상으로 변용되는 한에서 내 존재를 보존하려고 노력한다는 것, 이는 변용에 여전히 외적일 어떤 존재를 위해 내가 이 양상을 활용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는 내가 바로--양상-으로-변용된다고-고려되는-한에서-나의-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것을 행하고자 노력한다는 것이다.”(359쪽) 적합 또는 부적합은 매 순간 현행적으로 결정된다. “이성이 우리를 실제로 지도할 경우, 우세해지는 것은 바로 이성의 자기에 대한 욕망들이며, 이성은 오로지 최대치로 현실화되기만을 욕망할 뿐이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기 때문에, 이성의 삶 자체인 인식은 이성적 인간에게는 그 자체 목적이지 수단은 아니다.”(361쪽)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외부에 있지 않으며, 앎의 욕망은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현행적으로 발생한다. 계산적 효용주의는 인식을 수단으로 삼는 반면, 지성주의는 인식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깨달음이란 자신을 전체 지평과 일치시키는 것, 모든 목적이 현행적으로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왜 우리에게 정치가 필요한가? “예속은 공통특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속은 설령 공통적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실정적인 특성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속이란 단지 우리 모두가 우리 본질을 끝까지 현실화하지 못함을 의미할 뿐이다.”(382쪽) 예속이란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 무능력으로, 예속 상태에서는 어떠한 공통관념도 이뤄낼 수 없다. 무지한 자들이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자들이다. 따라서 ‘무지한 자들의 공동체’란 있을 수 없다. “정치적 매개, 오직 정치적 매개만이 이성적 삶의 토대에서 현실적 전개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며, 이성의 요구들이 일상적 삶에 구현될 수 있게 한다.”(405쪽)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조건이 우리에게 부적합한 관념을 발생시킨다면, 우리는 부적합한 표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삶의 조건, 관계성을 바꿔야 한다. 정치 공동체에서는 부적합한 관념의 교정 기회가 있다. 정치적 삶 또는 공동체적 삶은 자유로운 삶을 위한 토대, 매개로 작용한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정치를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따라서 정치는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실험이다. 함께 모여 사는 가운데 정념과 이성이 일치되도록 하면서 각자가 자기 해방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는 공동체를 만드는 실험. 어떤 경우에도 깨달음은 각자의 몫이지만, 공동체는 개인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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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01 09:40
    알고자 하는 욕망은 어떤 것을 먹고 싶어하는 욕망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실제로 알고자 하는 욕망에 따르는 것보다 다른 욕망들에 압도되는 순간들이 많은 것 같아요. 허허. 그리고 정치는 우리와 무관한 영역에서 '어떤 사람들'만이 중차대한 문제를 결정하는 활동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앎을 교정할 수 있는,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나온 또 다른 표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개체의 활동, 전체와의 합치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게 됩니다. 스피노자 공부 안 했으면 어쩔 뻔 했을까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