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 S 8주차 후기

작성자
현정
작성일
2020-06-27 23:17
조회
144
드디어 우리가 함께 마트롱을 다 읽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뒷풀이 아니 특별히 마트롱을 다 읽은 책거리를 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지성을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발휘하여 스피노자를 이해하고 설명해낸 마트롱, 그에 대한 진심어린 감사함을 공유했습니다. 사실 여러 책을 읽고 있지만 우리에게 다른 책과 달리 감응이 좀 더 남달랐던 것은 치밀한 내용만큼이나 압도적인 분량 때문이기도 했지요. 개인적으로 이런 대작 이후의 그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집니다. 경이롭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엄밀한 그의 저서를 읽고 토론을 하며 사유를 전개해 나갔던 이 공부의 과정이, 올해 1월 7일에 타계한 그를 우리의 방식대로 추모한 시간이 된 것 같고, 누군가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방법으로 참 좋은 길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마트롱은 부처님을 잘 몰랐겠지요? 천년에 한 명씩 나오는 진정한 철학자로 예수 그리스도와 스피노자를 거론했는데요. 제 마음 같아서는 부처님을 언급했을 텐데 말입니다.^^ 제 눈에는 거의 싱크율 100%에 근접해 보이는 스피노자와 붓다, 요즘 모든 철학을 불교로 횡단하시면서 매우 행복해 보이시는 샘은^^ 나가르주나의 二諦論(眞諦와 俗諦)의 두 가지 진리의 차원을 예로 들어서 신과 양태, 원인으로부터의 인식과 2종지와 3종지의 관계 등을 설명해주셨는데요, 제가 막연하게 느끼던 것들이 명료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사성제보다도 먼저 설하셨다는 부처님의 첫 설법이 왜 ‘이제론’이었을까 궁리해보다가 스피노자가 신으로부터 시작한 것과 같은 맥락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차원과 그것의 근원이 되는 차원 즉 양태와 신의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너무나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에겐 항상 마주치는 유한한 양태로서의 실존이 있지요. 우리가 형성하는 관념과 정서가 비롯되는 신체변용의 장, 그것은 우리의 외적 조건으로서 그렇게 드러나는 속제의 차원입니다. 말하자면 진제의 차원이 지금 여기의 조건에서 발현되는 속제는 진제를 원인으로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세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제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무아·연기의 세계, 모든 것이 모든 것으로 인해 존재하는 상호의존성과 상호연관성의 세계입니다. 모든 것이 합성된 것으로서 임시적으로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속제의 세계란 이러한 진제의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속제의 세계가 전부라고 믿습니다. 번뇌는 사실 여기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관념과 정념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이성의 역량을 발휘해서 ‘정념의 이성화’를 이루더라도 이 차원에서는 여전히 이성은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우리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합니다. 즉 느끼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간극 없이 합일하기 위해서는 진제의 차원을 깊이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고 그럴 때만 우리는 ‘이성의 정서화’에 이르며, 그럴 때만 비로소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건들이 부정되지 않고 모든 현상들이 있는 그대로 긍정될 수 있습니다. 제게도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하게 새겨지면서 신으로부터 출발한 스피노자의 사유가 더 이해가 되었습니다. 원인으로부터의 인식이 수반되지 않는 한 속제의 차원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사건들은 그 자체로 긍정될 수 없습니다. 진제의 차원 모든 것이 조건과 더불어서 나타나고 소멸한다는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갖게 되는 인식은 자신을 좀 더 확장하거나 타자와의 공감을 늘려갈 수는 있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분별이 남아있기에 번뇌가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진제의 차원(공·무아·연기조건)에 대한 통찰 즉 스피노자의 신의 차원, 원인에 대한 이해를 거친 후에야 우리는 자비 그리고 지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원인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 ‘우리가 신 안에 있으며,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 없다’는 정리가 더 실재적으로 다가옵니다.

샘은 마음의 문제를 이토록 분석적으로 다룬 스피노자야말로 서양 최고의 정념론의 연구자가 아닐까 하셨는데요. 이번에 마트롱을 읽으며 정념과 이성에 대한 이해가 더욱 풍부해진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정념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막상 정념의 문제를 등한시하거나 뭉뚱거려서 생각하는 데 그칩니다. 이성은 애초부터 정념의 진리이고, 이성과 정념은 동일한 지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념과 이성의 차원이 마치 대립되는 것처럼 반비례 관계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인식과 정념이 일치하지 않는 한 세계와 자기에 대한 이해에는 괴리가 생기고 우리는 자신의 정념이나 욕망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념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정념을 이성과 같은 방향으로 향하게 길들일 수는 있습니다. 즉 정서의 이성화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런 한에서는 여전히 이성은 추상적인 차원에 머뭅니다. 이성이 여전히 추상적인 한 계속해서 또 다른 정념이라는 새로운 장애들을 만납니다. 마트롱은 단순히 정서를 이해하는 데서 그치면 안되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이성 자체가 다른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이성을 정서화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추상적인 차원의 이해가 아니라 자신의 독특한 개체성 속에서 발현되는 이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그럭저럭 사는 데 그치지 않고 지복이나 깨달음을 현행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에 대한 인식 즉 진제 차원의 이해를 통한 ‘이성의 정서화’는 부처님이나 스피노자에게 공히 인식과 윤리적 차원의 중요한 개념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전부터 3종인식이나 깨달음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뭐랄까 현행적으로 느껴진다고 할까요. 이번에 샘의 설명을 들으며 ‘이성의 정서화’, 왜 우리가 ‘정서의 이성화’에 그쳐서는 안되는지, 2종인식에 머물러서는 안되는지가 실감나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막연하게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느꼈던 것이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샘은 왜 마트롱이 불가능해 보이고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도 이상적인 국가에 대해서 말하는지 그 이유를 고민해보셨다고 하면서 理想이나 移行에 대해 새로운 용법을 설명하셨는데요, 이 부분은 깨달음이나 3종인식과도 연관지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상이라는 말을 유토피아, 여기에는 없고 저기 어딘가에 있는 도달해야 할 무엇으로 상정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현존에는 없는 것이며 항상 결여의 상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가 도달할 수 있을 그러나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를 어떤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자유 국가, 완전한 이상적 민주주의가 있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곧 그것이 실현불가능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들뢰즈가 이상을 이념으로 사용한 것처럼 이상적인 것은 잠재적인 것 즉 언제나 현행화되는 것과 같이 작동을 합니다. 이상이라고 하는 것은 과정 속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비전, 그것을 사유하는 자들의 실험을 통해 드러나는 시도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정치가 되었든 개체적 실존이 되었든 모든 이상은 그 조건 속에서 실험하는 자들의 역량만큼 발현되는 한에서 이상과 시도는 잠재태와 현실태와 같이 언제나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상적 민주주의를 사유하는 자는 현실정치 속에서 끊임없이 이상적 정치를 실험할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하나의 끊임없는 이행으로서 존재합니다. 우리가 과정을 버리고 결과에 이를 수 없는 것처럼 이행은 하나의 상태를 버리고 다른 상태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행 자체에 이미 최고의 것이 실험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트롱은 이상을 지금 여기의 현실적인 실험 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하나의 이행으로 이해합니다. 어딘가에 도달해야 하는 완성태가 아니라 이상 자체가 매번 현행적으로 극한으로서 생산되고 있다고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부처다’, ‘이미 우리는 구원되어 있다’, ‘3종지가 우리 안에 내재해 있다’는 것도 깨달음, 부처, 3종지가 어딘가에 도달해야 할 지점으로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거나 번뇌에서 깨달음으로, 중생에서 부처로, 2종지에서 3종지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신을 표현하고 있는 양태로서 신의 역량을 분유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미 신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면, 이미 부처가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깨달을 수도 부처가 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부처가 될 때까지, 3종지를 획득할 때까지, 깨달음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는 늘 결여 속에서 결핍을 느끼며 현재를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기에 외부에서 초월항을 도입하지 않고서도 부처가 될 수도 3종지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내재해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것을 인식하는 게 가능할까요? 없는 것을 갖게 되는 것도,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도, 어딘가에 이르러 획득하는 것도 아니라 이미 우리는 깨달은 존재이고, 이미 우리는 부처이고, 이미 우리는 구원되어 있다는 말이 정말로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이제야 스피노자와 부처님이 제시한 신의 차원 그리고 진제의 차원 즉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며, 그저 조건에 따라 끝없는 형상으로 변화하고 드러날 뿐인 세계, 무수한 인과연쇄에 따라서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원래 그러한 것으로서의 사건이나 사물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명료해집니다. 왜 스피노자와 부처님의 세계에서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로 완전하고 충만한지가 이해됩니다. 왜 깨달음을 얻어도 3종지에 이르러도 우리는 아무데에도 도달하지 않고 그냥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우리 자신인데 우리 자신이 되진 않았습니다. 전에 마트롱이 “‘우리인 관념’과 ‘우리가 가진 관념’ 간의 차이는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다”고 말하는 대담(with 보브, 모로)을 읽다가 이해가 잘 안되었던 것이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 그러나 가진 줄도 모르고 있었던 자기와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이 될 것인가’라는 니체의 질문처럼 계속 사유해봐야 할 중요한 지점입니다.

마트롱은 “정념에서 해방되려면 정념을 과학적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부적합한 관념을 형성하는 이유, 관념을 실재라고 믿게 되는 이유, 정서가 발생하는 메커니즘 등을 논리적 연쇄 과정을 통해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 자신에 대해 그리고 세계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왜 그토록 스피노자가 인식이 중요하다고 말하는지, 왜 들뢰즈가 삶이 인식의 수단이라고 말하는지, 부처님이 왜 그렇토록 의심하고 질문하고 숙고하고, 자신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의미를 좀 더 이해하게 됩니다. 나를 그리고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고서는 누군가와 무언가를 함께 이루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왜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

인간의 정념의 문제, 정념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발생하고, 우리는 정념을 어떻게 사유하게 되며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정념으로부터 예속되지 않는 길은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지와 같은 인간 정념의 문제는 결국 마음의 문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마음의 장을 형성하는 문제와 연관됩니다. 마트롱도 말하듯이 ‘최선의 정치적 조건형성’의 문제, 우리의 신체성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정념의 역량은 이성의 역량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정념의 토대 속에서 이성이 작동하고 인식의 토대 속에서 정념은 더 강화되거나 약화됩니다. 3종지, 깨달음은 자기의 독특한 실존을 통해 표현될 수 있어야 됩니다. 인식 즉 윤리, 지혜 즉 보리심, 언제나 모든 지혜는 몸을 통해 체화된 것이어야 합니다. 진리에 이르게 되는 과정, 이해를 체화시키고 지혜를 자기 식으로 체화하는 과정이 바로 수행입니다. 명상이든 산책이든 글쓰기든, 그렇게 매순간의 발심과 시도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전체 2

  • 2020-06-28 08:20
    마트롱을 읽으면서 마음에 대해 점점 더 궁금해지더라고요. 채운쌤이 불교와 특히 자주 크로스해서 얘기해주신 것도 둘 다 마음을 핵심적으로 다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음을 다루는 게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조금씩 이해하면서, 여전히 저는 마음에 대해 별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년 공부해야 할 방향이 어렴풋하게나마 잡힌 것 같기도 하고요. 올해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이전에 해보지 못한 많은 경험들을 해봅니다.

  • 2020-06-29 06:01
    마트롱을 꼼꼼히 읽었다는 것만해도 기쁘네요. '정념의 이성화', '이성의 정념화'는 우리가 이성과 정념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아주 유용한 용어인 것 같습니다. 저는 치우친 정념을 이성화 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합리적이어서 도달해야하거나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되었던 이성을 정념화 한다는 것을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공부하면서도 스스로 생각하지 못했지요. 하지만 마트롱은 자신의 책 마지막 4부에서 이성의 정념화로 추상화된 이성이 아닌 이성의 현실화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다시 우리로 하여금 정념의 중요성을 사유하도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