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7월 1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0-06-26 13:10
조회
74
에세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7월 15일 발표까지 3주 남았군요. 다음 주는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도록 최대한 이야기를 정리해오시면 됩니다. 주제는 말씀드렸던 대로 정치와 정념입니다. 채운쌤은 구체적으로 어떤 장에서, 어떤 정념이 어떤 행위를 동반하는지를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쉽지 않은 주제지만 지금까지 저희가 《한비자》, 《도덕경》 읽은 것까지 합쳐서 생각하다 보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아요. 모두들 파이팅입니다! 간식은 윤순쌤께 부탁드릴게요~

 

에티카를 공부하면서 풀리지 않은 것들이 많았는데, 마트롱 덕분에 많은 것들이 풀립니다. 5부의 핵심내용인 3종 인식은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었는데요. 3종 인식은 2종 인식과 어떻게 다른 건지, 왜 3종 인식을 얘기할 때조차 ‘신에 대한 사랑’, ‘신의 지적 사랑’으로 나뉘는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죠. 어차피 윤리적으로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는 3종 인식에 도달하고자 하는 노력이 아니라 1종의 상상적 인식으로부터 2종의 이성적 인식으로의 이행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3종 인식은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이상적 사유능력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마트롱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직관지’를 ‘한 눈에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이해되는 인식’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트롱이 “이성이 무적이 되는 문턱”을 얘기할 때도 2종 인식을 많이 하다 보면 어느 순간 3종 인식을 획득하게 될 것이고, 3종 인식에 한 번 들어서게 되면 모든 것을 적합하게 이해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3종 인식을 더 이상 수동적 정념에 예속되어 힘들 필요도 없는 도달 가능한 경지 같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죠. 분명 스피노자는 3종 인식을 ‘직관지’라고 얘기하긴 했지만, 이때의 직관지의 핵심은 ‘속도’가 아닙니다. 베르그손은 ‘조건으로부터 사유하는 것을 직관’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모든 것을 신의 본질의 표현으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직관지, 지성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3종 인식은 어떤 정태적인 상태로 외부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우리는 신체 변용을 통해 살아가고, 관념과 정서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때 발생하는 관념들은 모두 그 자체로 신의 본질의 표현입니다. 3종 인식은 나를 포함한 우주의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신의 본질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 때 발휘됩니다. 따라서 3종 인식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부적합한 관념도 신의 본질의 표현이라는 것을 아는 인식역량의 발휘입니다.

필연의 지평으로부터 사유하려면 이해의 지평을 넓혀야 합니다. 상상적 인식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가 갑자기 모든 것을 필연성에 따라 사유하는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채운쌤은 3종 인식에 따라 살게 되기까지의 단계를 ‘정서의 이성화’와 ‘이성의 정서화’ 두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우리를 예속하는 정념들이 어떤 원리에 따라 발생하는지 이해함으로써 정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리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정서의 일반론’에 그치기 쉽습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해한 대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이해하는 것이 그 자체로 지복(至福)이 되는, 실존양식이 달라지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성의 정서화’입니다. 마트롱은 3종 인식을 설명할 때 “인식하는 기쁨”이란 표현을 썼는데, 그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곧 자신의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피노자가 얘기하는 윤리학은 ‘철학자로 살아가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3종 인식이 세계의 필연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을 자신의 본질로 할 때 발휘된다면, 그건 곧 세계를 필연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철학자의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트롱은 3종 인식이 언제 일어난다고 명확하게 짚어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철학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3종 인식은 그렇게 고원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것이 기적적인 은총과는 전혀 무관하며, 이성의 지난한 노동의 성과라는 점이다. 지적 조명이 일어나려면, 우리는 이미 많은 적합한 관념들을 상호 연역해 두고 있어야 하며, 또한 우리의 이미지들의 장이 상당 정도 논리적으로 조직되어 있어야 한다.”(782) 여기서 ‘많은 적합한 관념’이 단순히 수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미 이성적 인식이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옴을 많이 체험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욕망이 매우 우세한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마트롱은 “개인의 완벽하고 결정적인 해방과 제한 없는 공동체”를 동시적인 것으로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얼핏 또 다른 초월적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이성에 따라 산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적어도 기록된 문헌에서는). 하지만 마트롱은 그 다음에 “이 두 극한으로의 이행이야말로 스피노자주의의 가장 심오한 동기들을 소급적으로 밝혀 주지 않는가?”(846)라고 말합니다. 채운쌤은 여기서의 극한이란 도달해야 될 목표가 아니라 실천 속에서 계속 갱신되는 출발점이라고 하셨죠. 그러니까 깨닫기 위해 활동하는 사람은 이미 그 깨달음을 실천하는 것이고, ‘제한 없는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미 제한 없는 공동체를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때 자신이 어떤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지는 본인만이 알 수 있겠죠. 왜냐하면 극한으로 이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역량을 바라봄으로써 기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어느 단계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구도의 길에 기꺼이 참여하는 현행적 실천뿐입니다.

채운쌤의 얘기를 듣다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개체를 역량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의 윤리를 얘기한 부분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역량의 관점에서 사물과 존재자들을 바라보는 위계도 있다. 여기서 문제는 역량 – 절대적으로 고려된 역량 – 의 정도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 존재자가 궁극적으로 ‘도약’하고 있는지, 다시 말해서 그 정도가 어떠하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끝에까지 이르고 이로써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끝에까지’라는 말은 여전히 어떤 한계를 정의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한계, 경계가 가리키는 것은 사물을 하나의 법칙 아래 묶어두는 어떤 것도, 사물을 끝마치거나 분리하는 어떤 것도 아니다 거꾸로 그것은 사물이 자신을 펼치고 자신의 모든 역량을 펼쳐가기 시작하는 출발점이다.”(《차이와 반복》, 103쪽)

정수쌤은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남는 개념이 ‘능동’이라고 하셨는데요. 개체의 현행적 실천만이 전부인 것인지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왜 세계를 다르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윤리를 생각할 수 없는지, 왜 우리는 머리 아픈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지 조금씩 이해되고 있습니다. 마트롱 같은 책을 읽는 덕분에 어려운 공부를 그래도 기쁨을 느끼며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렵지만 드물고 고귀한 이 길이 그렇게 고통스럽게만 느껴지지는 않네요. ㅎㅎ



책상 두 개를 일부러 치우지 않았는데, 빈자리가 자꾸 눈에 밟힙니다... 이 고귀한 여정에 함께하실 분들을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체 1

  • 2020-06-29 06:28
    규창샘의 후기를 읽으며, 우리가 매 순간 그것이 무엇이든 기쁘게 행할 때만이 마트롱이 말하는 '개인의 완벽하고 결정적인 해방' 을 맛보며 철학자로 살아가고 있는징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서 저는 지금은 슬픈데 장래의 기쁨을 위하여 참아가며 무엇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자각과 기쁘고 슬픈 것에 집착하는 대신 그 순간 일어나는 일에 관해 조건들을 사유하고, 현재에 감사함을 가지는 마음을 내어 그것들을 연결하려는 시도만이 내가 기쁠 수 있는 모든 것이라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