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읽기 숙제방

2학기 스피노자 에세이

작성자
gini
작성일
2016-10-06 16:07
조회
333
규문/스피노자세미나/에세이

2016.10.6./주진희

 

코나투스와 감정 그리고 이성

 

이 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감정과 이성이 스피노자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 알기 위해서 스스로 정리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성과 감정의 일반적 용법은 양자를 대립적으로 보는 것, 이성을 선으로 감정을 악으로 보는 것, 감정은 언제나 이성으로 눌러야 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는 감정과 이성에 대한 이 단순하고도 이분법적인 용법과는 달리 스피노자는 이에 대해 다른 더 풍부한 함의를 보여준다. 감정과 이성에 대한 스피노자적 접근이 어쨌든 간에 쉽지 않은 감정의 컨트롤을 어떤 식으로 방향제시해 줄지 알아볼 것이다. 또 하나는 코나투스의 문제인데 그것이 존재를 지속하게 하는 노력이라고 했을 때 자기파괴적인 어떤 감정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이성과는 또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건지 고찰할 것이다.

 

코나투스 : 술주정뱅이의 코나투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를 각각의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노력”(3부 정리6)이라고 정의한다. 존재를 지속하고자하는 노력은 모든 사물의 본성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만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설령 술주정뱅이가 죽도록 술을 마신다 해도 그는 죽으려고 마시는 게 아니라 마시지 않을 수 없어서, 마시지 않으면 오히려 죽을 것 같아서 마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술주정뱅이의 코나투스는 존재를 지속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이끄는 것처럼 보인다. 술이 주는 기쁨의 과도함이 코나투스를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종종 코나투스를 능가하곤 하는 감정의 힘에 대해 스피노자는 경종을 울리는데, 존재를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술주정뱅이의 코나투스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3부 정리7은 각각의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는 노력이라는 코나투스의 정의에 “(코나투스는) 그 사물의 현실적 본질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술주정뱅이의 현실적 본질은 술주정뱅이다. 술주정뱅이는 외부사물인 술이 주는 기쁨의 과도함에 예속되어 있는 신체다. 이때 코나투스는 기쁨의 과도함에 예속되어 있는 이 신체를 끈질기게 지속시키고 있다. 그런데 기쁨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술이 필요하다. 술주정뱅이의 코나투스는 이를 추동하고 있는 것이다. 코나투스는 과도한 술이 초래할 파괴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코나투스는 다만 지금의 신체 즉 기쁨에 젖어있는 이 신체를 어떻게 하면 지속시킬지에만 관심이 있다. 술주정뱅이가 아닌 자로서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코나투스의 소관이 아닌 것이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의지, 충동, 욕망과 동의어로 쓰고 있다.(3부 정리9 주석)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충동은 인간의 본질 자체일 뿐이며, 그것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인간의 보존에 기여하는 것들이 나온다. 따라서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행하도록 결정되어 있다.”충동 즉 코나투스는 인간을‘더 잘(바르게, 건전하게, 옳게, 선하게 등등)’존재하게 하는 능력이 아니다. 인간에게 어떤 순간의 특정한 현실적 본질이 결정되면, 코나투스는 그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는, 다른 더 좋은 것이 되도록은 작동될 수는 없다. 현실적 본질대로 작동은 결정되어 있는 것. 이렇게 거칠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코나투스는 선악을 모른다. 코나투스는 주어진 현실을 파괴하지 않고 다만 지속하고자 하는 운동성이다. 그러니 술주정뱅이라는 현실이 비록 비루하더라도 코나투스는 술주정뱅이라는 현재적 존재를 지속시키는데만 힘을 쓸 줄 안다. 술을 계속 마시는 것이 그 사람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도 코나투스는 상관하지 않고 술 마시는 존재로서 그 사람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코나투스와 감정

감정은 다종다양하지만 그것들은 기쁨과 슬픔이 갖는 운동성으로 모두 구별가능하다. 스피노자는 기쁨을“정신이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이라고 이해한다. 슬픔은 당연히 그 반대 “정신이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이다. 보통의 인간은 완전성의 정도를 이행하도록 강제되면서 수동적으로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완전성이 보다 큰 쪽에서 작은 쪽으로 이행할 때를 슬픔의 상태라고 작은 쪽에서 큰 쪽으로 이행할 때를 기쁨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인데, 인간은 기쁨으로 때로는 슬픔으로 이행하면서 다시 말해 끊임없이 변용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불완전한 존재는 하나도 없다. 모든 사물은 일단 모두 완전하다. 작게 완전한 것, 크게 완전한 것이 있을 뿐이다. 완전함이란 그 자체로 족함, 결핍 없음을 의미한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완전성을 보증하는 존재는 신이다. 신이 불완전한 것을 존재하도록 했다면 신이 완전하지 않아서거나, 악취미를 가졌거나 여서 일 텐데 신을 그렇게 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또 하나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 완전성을 고정된 상태로 지속하는 것은 없다. 신 이외의 모든 유한사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침투하면서 살고 존재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완전성의 이쪽으로부터 저쪽을 유랑하며 살게 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우리 인간은 완전성의 정도의 다양함을 살지 못한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전유해야 한다는 조건 하에서다.

스피노자는 감정을 신체변용의 관념이라고 가르쳐주었다. 감정은 외부사물이 우리 신체에 가하는 흔적, 그 흔적에 대한 관념이다. 그것은 기존의 신체에게는 침입자와 다름없다. 우리가 감정에 휘둘린다고 할 때 우리는 이 신체변용의 관념을 침입자로 여기고 싸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신체변용의 관념을 전유해서 그것마저도 나의 신체로 만들 수 있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인간의 신체를 단일한 것으로 보지 않았고, 집합적 신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체는 무수한 부분신체들의 집합이고, 신체는 유한 양태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외부사물과 영향을 주고 받는 존재다. 감정을 느끼는 것은 유한 양태의 존재조건이다. 감정은 우리 신체가 단일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외부 사물 때문에 슬픈 감정이 될 때는 내가 기존의 신체를 고수하고 그 외부 사물의 영향을 철저하게 방어하려고 할 때다. 하나의 완전성을 자기라고 고집하고 있을 때다. 이때 코나투스는 기존 신체를 현실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그 신체를 지속하려고 노력한다. 술주정뱅이가 술주정뱅이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술주정뱅이에서 벗어나게 하는 외부의 모든 영향-친구의 잔소리든, 술의 해악에 대한 지식이든-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해서 코나투스가 술주정뱅이인 신체를 보존해야하는 현실적인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술주정뱅이의 신체는 그 자체로 불완전하지는 않지만 완전성의 한 정도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성의 다양한 정도를 살 수 없다는 면에서 무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유한양태인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신이 준 선물 혹은 자연의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는 수동적인 것이지만 그 감정을 내 것으로 전유하면서 세상사의 한 가지를 더 긍정할 수 있는 신체로 자기를 변이시킬 때 우리의 정신은 보다 큰 완전성으로, 기쁨의 신체로서 이행을 지속할 수 있다. 이때 코나투스는 기쁨으로 이행하는 신체를 지속하고자하는 자기의 필연적 본성으로서 도울 것이다. 문제는 감정을 전유하는 것이 무엇인가인데, 그 노력이 바로 이성이다.

 

코나투스와 이성

4부 정리14는 선과 악의 참된 인식은 그것이 참인 한에 있어서는 어떤 감정도 억제할 수 없고, 단지 그것이 감정으로 간주되는 한에 있어서만 감정을 억제할 수 있다.” 말한다. 이 정리를 참된 인식을 감정으로 바꾸는 문제로 생각하면 불가능하다고 성급하게 결론 내리게 될 소지가 크다. 어떻게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가 1억5천만km라는 사실을 감정화해서 태양 때문에 느끼는 더위를 멈추겠나. 이 정리를 다음과 같이 독해해보자.

선악에 대한 참된 인식이 고정불변의 진리로서 존재한다고 보면 아주 많은 현실적 감정들이 모두 악이 된다. 진리로서 선악이 존재한다는 이 판단을 풀어놓을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가 계속 강조하는 것이 본래 선인 것, 악인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것, 유익한 것, 기쁘게 하는 것들을 선(善)이라고 부른다. 백이면 백 모두가 판단하는 선악은 다르다. 고정불변한다고 믿는 참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을 때 일상에서 시시각각 일어나는 감정은 잘못된 것(악)으로 비교당하고 무시되기 일쑤다. 어떤 감정이 좋고 나쁘고를 판단하기 전에 ‘그것’이 ‘감정으로 간주되는 한에 있어서만’다시 말해 그것이 감정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할 때만 그 감정의 발생 원인을 고찰해볼 수 있는 마음을 내게 된다. 그럴 때 감정의 억제도 가능해진다.

우리는 보통 이성을 감정에 대립되는 것으로 즉 감정을 억누르는 선한 능력으로 믿어왔다. 그러나 반복하지만 선악은 초월적으로 선재하지 않는다. 즉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초월적 지표로서 선한 이성은 선재하지 않는다. 이성을 나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적 상황이 어떻게 벌어지게 되었는지 그 발생 원인을 여러모로 따져보는 정신의 행위라고.

스피노자는 4부 서론에서 완전/불완전이라는 관념의 편파성에 대해 길게 말한다. 완전/불완전이라는 관념은 사람들이 어떤 목적원인을 생각하고 여기에 동종(同種)이라고 여기는 개별사물들을 서로서로 비교하면서 순서를 매긴 편견에 불과하다. 신이 사물을 산출할 때 신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생산하지 않았고 오직 자기 본성의 필연성에 따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봐야 한다. 만일 목적을 갖고 있다면 완전한 무엇이 존재할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생각하듯이 세상의 많은 불완전한 사물들은 신의 실패작이 되기 때문이다. 신이 실패할 수 있다는 것보다 이상한 말은 없다. 그러니 사물의 완전, 불완전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유한 양태로서의 인간이 감정에 의해 휘둘리며 산다고 해도 그것은 불완전함의 증거가 아니고 신적 필연성이 표현이다. 만약 그 감정의 발생 원인을 사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신적 필연성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며 결과로서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떤 감정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의 필연성이라는 것이 반드시 1 더하기 1은 2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과 같은 일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상황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있다는 것은 피상적인 이해이며 어떤 상황은 받아들이는 신체의 상태- 그 만의 독특한 운동과 정지의 비율 –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사실상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감정이 일어난 부분적인 원인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부분적인 원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감정을 이해하게 되고 그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는 것이다.

4부 서론은 선/악에 대해서도 말한다. 여기서도 스피노자는 어떤 사물이 선 또는 악이 될 어떤 적극적인 것도 갖고 있지 않다고 강조하고 있다. 어떤 감정에 의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 자체를 선이라거나 악이라고 결론지을 수 없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선악을 초월적 진리로 상정하고 인간의 감정과 그 감정에 휘둘리는 것을 악으로 보는 것이 더 악일 수 있다고. 감정적 삶을 악이라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억압할 수밖에 없고, 감정에 휘둘리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비하하거나 그렇게 사는 타인을 비난밖에 할 것이 없게 된다. 이는 너무나 쉬운 해결이다. 스피노자가 완전/불완전에 대해서 그리고 선/악에 대해서 길게 의견을 피력한 것은 초월적 원리로서 그런 것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선이라고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실재적인 삶 속에서 소위 감정에 휘둘리는 삶 속에서 그 감정의 실재성과 작동방식을 인정하고 그것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따져보는 것 그래서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일 것이다.

 

선이란 우리가 우리 앞에 설정해 놓은 인간 본성의 전형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것이다. 또 악이란 우리가 그 전형처럼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임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것이다.(4부 서론)

 

어떤 감정이 누군가에게는 악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증오할 때, 질투할 때, 불쌍히 여길 때 등등 스피노자가 ‘슬픔’에 포함시키는 감정들이다. 슬픔이 악이 되는 이유는 그로 인해 우리의 활동능력이 감소하고 억제되기 때문이다. 신체적으로 힘이 떨어지고, 움직이기 싫고 동시에 정신적으로는 더 많은 감정을 경험할 수가 없다. 여러 감정들을 경험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하나의 슬픔에서 빠져나오기가 더욱 어렵게 된다. 악이라고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슬픔이 되어서 활동능력을 떨어뜨리고 점점 폐쇄적으로 몰아가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나투스는 모든 사물의 자기 보존 능력이다. 우리의 코나투스는 우리를 파괴하지 않는다. 감정에 휘둘릴 때도 이성적으로 사유할 때도 코나투스의 작동은 그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코나투스가 의지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코나투스의 작동 본질이 그렇다. 코나투스는 활동 자체며 그 활동은 더 힘이 강한 쪽으로 이끌리면서 자신의 운동을 지속한다. 한 신체에서 감정의 힘이 셀 때 코나투스는 그 힘을 따라 움직인다. 애인에게 버림받은 누군가가 슬픈 음악이나 슬픈 영화를 보면서 더욱 슬퍼지려고 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그는 그 슬픔을 더욱 다그쳐 한번 펑펑 울고 잠시나마 잊기 위해서다. 아무리 슬퍼도 배가 고파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이 모든 것이 코나투스의 작동이다. 물론 슬픔이 너무 커서 스스로 죽지 않으면 그 슬픔을 그칠 수가 없다고 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라도 자살행위는 자기의 슬픔을 넘어서기 위한, 즉 살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코나투스의 작동은 기계적이다. 감정으로든 이성으로든 존재가 자기를 인식하는 상태대로 코나투스는 작동할 뿐이다. 누군가 슬픔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의 활동능력은 감소하고 감소된 그 범위 안에서만, 그 자신이 긍정하는 작은 실재성 안에서만 코나투스는 작동된다. 이때 슬픔과 반대되고 더 큰 기쁨의 감정이 요구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동종의 인간이고, 웃겨주는(기쁘게 해주는) 인간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데 이런 역할을 하는 타인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도움은 필요하다. 그러나 결국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이 이러저러한 감정에 빠진 원인을 하나하나 추적해보는 것이다. 감정의 필연성을 긍정하고 감정 자체에는 어떤 선악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악처럼 보이는 슬픔마저도 그 발생 원인을 차분히 고찰한다면 그 경험은 자신의 역량이 된다는 것, 그것이 이성의 역할이며 이성적 사유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예속했던 감정에서 서서히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맺음말

이성을 사용한다는 것은 감정을 해석하는 일이다. 감정을 신체변용의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감정을 일으켰던 낯선 대상이 내 몸을 침범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동시에 내 신체가 낯선 신체를 받아들여 내 신체가 변이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침범당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고정된 내 신체라는 관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낯선 싵체를 거부하려고만 하고, 감정이 자신을 휘두른다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신체를 단일하게 보지 않았다. 신체는 집합적이다. 언제든지 다른 신체가 끼어들어 집합적 신체에 부분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감정이 그 증표다. 감정을 싸워서 물리쳐야 하는 대상으로 볼 때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고, 그 감정의 힘이 이전 신체의 자기 보존 능력을 능가할 때 우리는 감정에 휘둘린다, 예속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싸우지 않는 방법이 있다. 그 낯선 신체를, 그 낯선 감정을 받아들여 내 신체로 전유함으로서 변이된 신체, 다른 신체가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이성이다. 이성적 사유를 통해 감정의 원인을 알고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럴 때 슬픔에 휘둘리지 않고 슬픔마저도 내 것으로, 능동적 능력으로 만들 수 있다. 기쁨을 주는 것들 역시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 발생 원인을 알면 기쁨을 소유할 수 있다. 그래서 더 큰 활동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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