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읽기 숙제방

에티카 에세이

작성자
동하
작성일
2016-10-07 23:05
조회
324
스피노자세미나/에티카에세이/2016. 10. 6.

존재의 지속- 자유로운 삶은 무엇인가

1.나는 자유를 꿈꾼다.

에티카를 읽고 있으면 ‘코나투스’라는 한마디에도 삶의 본질을 분명히 손에 잡은 듯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부정할 만한 근거가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너무나도 가볍고 경쾌하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는 순간부터 부딪치는 일들에서 넘어지는 것을 매번 반복하는 이유는 도대체 뭣 때문인가. 그 매커니즘을 한 번 다시 복기해 보고 어떻게 해서 스피노자는 자유로운 삶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자유롭다는 것에 대한 나의 기존 생각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먼저 되짚어 보아야겠다. 내가 갖고 있던 자유로움의 이미지는 아마 이리 저리 가고픈 데로 훨훨 날아다니는 저 하늘 위의 새의 이미지가 아니었을까(새가 아닌 내가 본 새). 아니다.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조건, 사회의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유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 사회적인 구속이나 억압에서 자유, 도덕적 감정에서의 자유 등 할 수 있는 것을 하고자 하는 자유와 해야 한다고 부여된 것을 안하겠다는 것이 두루 혼재되어 있다. 이렇게 자문해보니 도리어 자유롭다는 것이 뭔지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그것이 딸, 아내, 엄마, 며느리 등의 역할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움을 말하는 게 아닌 것 같고 결국 그것은 내 존재의 역량을 더 강화하고자 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몇 년 전 신체가 삐꺽거리는 우울한 상태에서 만난 스피노자는 마치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는 것 같은 경이로움을 주었다. 아마도 그 때 나는 그 깊이를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어떤 기운에 이끌리어 맛 본 삶의 자유로움과 유쾌함에 대한 강렬함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후‘나는 절대 부정적 감정으로 삶의 활동력을 감소시키지 않고 기쁨을 창출하는 사람으로 살아 가겠어’ 라고 굳은 결의를 해도 다시 일상의 습관으로 되돌아간 채 여전히 감정의 쓰나미에 굴복하여 기쁨, 슬픔, 실망, 분노, 자책, 희망 등의 다양한 감정을 두루두루 섭렵하면서 지내지 않은 날들이 없었다. ‘공부를 한다는 사람이..’라는 말은 더욱 나를 옮아매는 것이 되었다. 그 문제를 공부로 풀어보면 될 것을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멸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옳다구나! 에티카를 다시 보게 된 것은 나의 행운, 지복이었다.

2. 자유의지의 허상

스피노자는 자유의지란 불가하다고 했다. 인간은 정념에 사로잡혀 있고, 필연성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인간이 자연에 대해 우월성을 갖고 있다고 착각에 빠져있을 때 나오는 허위에 불과하다. 자연 안에서 인간은 자유롭지가 않다. 이점이 ‘인간은 만물의 영장’, ‘인간의 자유의지로는 못할 것이 없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세뇌된 채 고착되어 온 사고의 변화를 어렵게 하였다. 스피노자도, 붓다도 인과적 조건, 연기적 조건 속에서 인간은 자유롭지 않고 필연성에 의해서 작동될 뿐이라고 했다. 모든 개별사물이 일정 방법으로 존재하고 활동하도록 결정하는 것은 바로 자연의 질서, 운동과 정지의 비율과 같은 필연성이다. 타자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우리 존재는 의존적이며 부분적이고 혼란한 관념에 의해 흔들리는게 당연한 이치다. 자유의지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나 자신의 허영이고 과도한 자만이었다. 우리는 외부의 원인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 방식으로 휘둘리며 바람에 요동치는 바다의 파도와 같이 우리의 앞일과 운명을 알지 못한 채 동요할 수밖에 없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인정하니 나의 존재의 왜소함이 서글프지만 한편으론 알 수 없는 편안함이 밀려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순응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스피노자의 자유는 마치 단독자처럼 뭔가를 시원하게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란 다만 무지에 의한 착각일 따름이라고 한다.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부적합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스스로도 나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에만 관심을 둘 뿐, 어째서 그런 욕망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면서도 무관심하다. 바삐 움직여야 하는 일상 속에서 그때그때 충동에 따라, 관습에 따라 당연하게 요구되는 것으로 이해했지 놀랍게도 그 원인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어떤 대상이나 어떤 사건이 나와 부딪친 결과에 집착하게 되지 그 본질적인 원인은 알려고도 하지 않은 것이다. 행위가 의지나 결의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하면서도 도대체 의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의지가 어떻게 신체를 움직이는지 잘 몰랐다.

자유의지에 의한 굳은 결심으로 이 난관을 극복하여 이성을 회복한 후에 무엇인가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능동적인 삶에 대한 나의 메커니즘이 형성되어있다면 스피노자는 우리의 의지는 지성과 같은 것이므로 사물의 필연성에 대한 깊은 인식이 바로 의지를 생산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보았다. 그는 무한한 자연의 힘 속에서 필연의 인과관계에 엮여져 있는 우리 존재가 자유를 향해 가기 위해서는 무한한 방식으로 지성을 갖추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한 것이다.

3. 지성의 장애물 혹은 도약대

지성을 이르기 전에 부딪치는 장애물 혹은 도약대가 바로 감정이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 존재의 모든 표현은 감정으로 나타나고 교환된다. 감정은 신체의 변용의 표현이다. 표현이 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야 이 감정의 힘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지 그 방법이 나올 것이다.

기쁨과 슬픔의 감정은 수동적 감정이라고 말한다. 대상에 의해 하루에도 셀 수 없을 만큼 기뻤다가 슬펐다가 미워했다가 용서하자거나 혹은 사랑하자 다짐을 하는 등 이런 감정의 기복은 나의 신체가 능동적인 변용을 통해 형성되는 것보다 대상에 의해 흔들리는 수동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적이고 타당하지 못한 관념을 갖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작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외부의 원인으로부터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변용된 신체는 기쁨, 슬픔, 사랑, 미움 등 다양한 감정으로 드러난다. 모든 개인의 본성은 관계 속에서 저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펼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도 각각 다를 수밖에 없으니 또 다시 변용된 각 개인의 감정 역시 다 다르다. 그러므로 나는 나와 다른 대상의 감정의 전부를 알 수가 없고 그러한 조건이 형성된 상황의 전부를 역시 알 수가 없다. 당연히 20년을 넘게 살을 맞대며 살아온 남편의 바람 든 마음도 안다고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오로지 나에게 대상의 상황이 부딪치는 딱 그만큼의 부분만을 취하기 때문에 내가 형성하고 있는 이 감정은 오롯이 나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감정은 없애려고 노력한다고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억누를수록 끈끈이주걱처럼 신체에 찰싹 달라붙어 눈덩이 같은 망상을 만들어내는 것을 경험하지 않는가. 스피노자는 신체를 변용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수동적으로 작용 받는 것으로서 감정과 더불어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서의 감정도 있다. 수동적인 감정을 능동적으로 바꾸려면 반대의 벡터를 가진 더 강력한 힘으로 신체를 변화시켜야 감정이 바뀐다. 도약대가 필요한 것이다. 이전의 나를 넘어서는 능동적인 기쁨과 욕망의 감정은 정신이 자기 자신의 활동능력을 파악할 때 생산된다. 정신은 참된, 즉 타당한 관념을 파악할 때,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살펴보게 되는데 어떤 면에서는 혼란스러운 관념을 갖는 한에 있어서도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노력하는 코나투스에 의해 능동적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인식의 측면인데 스피노자는 이러한 정신의 힘을 인식능력 즉 활동능력이라 말한다. 또한 작용하는 한에서의 정신에는 어떠한 슬픔의 감정도 관계될 수 없다고 보았다. 작용하는 힘은 기쁨과 욕망의 감정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식하는 능력, 작용하게 하는 능동적인 정신의 힘은 무엇일까.

4.  필연성 속에서의 자유

더 좋은 것을 보면서도 더 나쁜 것을 따른다’고 하는 오비디우스의 말처럼 인간은 참된 이성을 본성으로 부여받았으면서도 왜 선과 악에 대한 갈등을 일으키며, 감정의 잦은 흔들림에 붙잡히는가. 우리 존재는 그 자체로는 완전하지만 자연 안에서 항상 이행의 과정에 놓여있으며 능력과 무능력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유한양태이다. 외부원인에 의해 과거의 습관적 감정이나 미래의 희망 같은 감정으로 현재의 나 자신을 무차별로 사로잡고 마비시킨 채 현행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감정의 힘은 이성이라는 정신적 힘으로 치료하지 않으면 우리의 능력을 능가하게 되면서 참된 인식을 방해한다. 한순간도 마주 오는 바람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행하게도 이성은 본성에 반대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존재가 본성적으로 욕망하는 것은 각자가 모두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고 보다 큰 완전성으로 가는 것이다. 바로 절대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선악이라는 개념이 선재하여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존재나 공동체가 만들어 놓은 더 좋은 것에 대한 관념으로 지향하고 노력하고 추구하고 욕구하는 것이므로 상상에 의해서라도 기쁨이나 선으로 향하는 많은 관념을 생산해 내어야 하고 그렇게 행위 하도록 스스로에게 힘을 부여해야 하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자유는 형상도 실재도 주어져 있지 않다. 자유의 대한 관념도 자기 존재를 보존하는 노력의 과정일 뿐이다. 지복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나온다. 이런 존재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역량이 발휘될 때 자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인식하는 한에 있어서의 정신에 관계하는 감정에서 생기는 온갖 활동들을 나는 정신의 힘으로 간주하며 그것을 용기와 아량으로 나눈다. 용기란 각자가 오직 이성의 지령에 따라서만 자신의 유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욕망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아량이란 각자가 오직 이성의 지령에 따라서만 다른 사람들을 돕고 그들과 친교를 맺으려고 애쓰는 욕망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3-59주석)

정신은 모든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한에 있어서 감정에 대하여 보다 큰 능력을 갖거나 또는 감정으로부터 보다 적게 작용 받는다.(5-6) 예기치 않은 사고, 즉 교통사고에 의해 큰 부상을 입었을 때나, 우연히 큰 병에 걸렸을 때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행한 일이 내게 일어난 것이라고 인정하며 치료에 전념하며 건강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방향으로 간다. 현재 우리 사회 환경에서는 확률 상으로 누군가가 선택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대부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이 안 해도 되는 주식을 하여 패가망신한다든가, 연인관계에서 배신을 한다든가 하는 경우는 의지와 인식의 문제에 관계가 개입됨으로 복잡해진다. 대부분 관계에서는 개인의 노력이 중요하지 필연적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데 이 또한 생각해보면 다양한 상황이 놓여있고 개인의 욕망을 다른 개인은 이해할 정도가 될 수 없으므로 선악으로 판별할 수도 없다. 행과 불행도 자연 안에 있는 어떤 현상이기에 각자가 자신의 존재역량을 발휘하여 행위를 했다고 한다면 그 개인이 얼마만큼의 최대의 공통관념을 형성하고 있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이점에서 볼 때 보다 명료하고 생생하게 표상하는 개물들에 보다 많이 적용되면 될수록 감정에 대한 정신의 능력은 더 커지는 것은 확실하다. 실패할 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은 로또나 주식에 투자하다가 패가망신 하지 않을 것이며, 성인이 감당해야 할 일을 책임지기 싫다고 어린애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역량의 감소와 약화를 나타내는 감정에 휘둘려 힘을 빼기보다는 어떻게 역량의 증대와 강화를 표현하는 감정으로 전환할 것인가에 있을 것이다.

심상은 보다 많은 사물에 관련되면 될수록 그만큼 정신은 보다 많이 활성화된다.(5-11) 보다 많은 심상은 우리 신체를 보다 많이 더 자주 변용을 할 수 있게 하고 그 변용은 다양한 것에 결합할 수 있는 보다 많은 공통관념을 형성할 수 있는 역량을 부여한다. 대단히 많은 것에 유능한 신체를 가진 사람은 정신의 가장 큰 부분이 영원한 그런 정신을 가진다(5-39). 우리 정신이 형성하는 관념은 오직 우리 신체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것들일 뿐이다. 신체가 경험하는 것들, 그것들의 강도와 밀도에 의해 우리 정신이 결정되는 것이다. 감정에 휘둘려 자기를 결정하지 않고 정신의 인식능력, 즉 지성에 의해 자연의 질서에 따라 감정의 원인을 고찰하게 함으로 감정을 제어하는 능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제어’라는 말에 걸리는데 제어보다는 자연의 필연성을 인식하게 되면 예속되는 감정에서의 해방이 더 가까울 것 같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쉽게 나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단순한 옛말의 이치처럼 좋은 약은 입에 쓰고 불량식품은 맛이 좋기 때문이다. 불확실하고 어지러운 감정을 억제하는 자연의 질서, 지성을 갖추는 것이 너무 많은 힘이 들고 어렵다. 망상으로 이어지는 감정은 순식간에 바다를 건너 탑을 쌓지만 자연의 질서를 신체에 새기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런데 그것이 어렵고 힘든 일일까. 이것도 나의 선입견이 아닐까.  다시 잘 생각해보면 우리 존재는 필연적으로 지극히 많은 것에 유능한 신체를 갖고자 욕망하고 보다 많은 완전성을 가질 것을 원한다. 이렇게 행복하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도리어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길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유로움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 다시 읽은 에티카에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스피노자는 지복이 덕의 대가가 아니라 덕 그 자체이며 감정을 억제하기 때문에 지복을 향수하는 것이 아니라 지복을 향수하기 때문에 감정을 억제할 수 있다(5-42)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자기의 감정을 뚜렷하고 명확하게 인식한다는 것도 자연의 질서를 알게 되는 것과 동시적임을 알 수 있다. 최고의 덕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인데 자연 속에서 자신의 이익이란 바로 그 자연의 필연성을 이해하고 자기 원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럼 일상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세심하게 스피노자는 아주 쉽고 단순한 힌트를 주었다. 올바른 생활규칙, 일정한 생활지침을 구상하고 이것을 기억에 남겨 인생에서 흔히 마주치는 개개의 경우에 끊임없이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다.(314) 생활규칙으로 삼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머릿속에 떠올라 일상의 혼란된 감정을 추스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책상 앞에 우선 ‘기쁨’과 ‘용기’, ‘지혜’라는 세 단어를 써 놓았다. 이것을 어떤 원인의 방식으로 연관 지을 것인지를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 에티카 전체를 통해 스피노자는 기쁨의 감정이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한다고 말하고 정신의 강함으로 자연 안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위험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은, 모든 것이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각별히 명심하고, 따라서 불쾌하고 악하다고 생각되는 온갖 것과 부도덕하고, 혐오스럽고, 부정하고 비열하게 보이는 온갖 것은 자신이 사물 자체를 혼란스럽고 단편적이고, 어지럽게 파악하는 것에서 생긴다는 것을 유념한다. 이런 이유는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고 노력하며, 참된 인식에 장애가 되는 것들, 즉 미움, 분노, 질투, 비웃음, 거만 그리고 우리가 주의한 기타의 것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295)

지금 공부하고 있는 불경에서도 붓다 역시 ‘있는 그대로를 보라’는 지관수행을 말씀하시며 끊임없이 반복하여 작은 계행에서 큰 계행의 방도를 일려주시는 구절이 나온다. 자유를 어디 막힌데 없는 시원한 느낌으로 표상했었는데 실제는 이런 계행처럼 무한한 방식으로 무한한 일들이 일어나는 이 필연의, 영원의  열도를 저벅저벅 딛는 순간순간에 일어나는 지혜의 기쁨이 아닐까. 지복이 자신이 행하는 덕 그 자체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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