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읽기 숙제방

스피노자 에세이

작성자
하동
작성일
2016-10-24 11:48
조회
276
스피노자 에세이(3-5장). 2016.10.6. 하동

 

더 단단하고 자유로운 삶을 위하여

 

1. 들어가며

스스로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고 생각해 왔음에도, 난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에 대한 오해나 환상의 그물에 갇혀 살아온 걸까. 어쩌면 자유롭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내 나름의 사유를 펼쳐본 적이 있기나 한 건지. 생각해 보면, 내게 자유는 늘 ‘~로부터의 자유’였던 것 같다. 언제나 나를 에워싼 구속이나 억압들이 있는 거고, 그것들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를 꿈꿔왔다는 것. ‘가족으로부터의 자유’, ‘사회나 제도의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심지어는 ‘나’로부터의 자유에 이르기까지, 그 목록은 끝이 없을 것 같다. 사실, 그동안 공부하면서 참 많이 듣고 배웠던 게 자유에 대한 이 같은 오해로부터 벗어나야한다는 게 아니었나 싶은데, 맘속으로만 백번 지당하다 생각했지, 실제로는 여기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슨 투사처럼 그 구속을 무너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맞서 싸웠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것들이 왜 자유롭고자 하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가 하고 늘 불평하고 불만스러워하면서, 언젠가 이것들이 사라져 정말 자유로워질 날이 오겠거니 하는 막연한 기대만을 품고 살아왔다는 것. 그도 아니면, 그것들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국외자의 포즈를 취하면서, 이 정도가 자유인의 자리이겠거니 하는 말도 안 되는 환상에 취해 살아온 건지도. 그러니, 내게 자유는 늘 ‘지금 이 자리’가 아닌, 미래의 알 수 없는 시간으로 유예되거나, 현실이 아닌 공상 속에서나 떠도는 신기루나 다름없었다. 이번에 읽은 스피노자는, 이런 나 같은 인간이야말로 자유와는 거리가 먼 예속적인 노예라는 사실을 절절히 깨우쳐 준 한편, 진짜 자유인으로 살아갈 방도를, 그 심원한 비밀로 향한 길을 친절한 교사처럼 꼼꼼하게 일러주었다. 물론,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게 쉽지 않은 만큼 그것들을 짧은 시간 내에 온전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2. 관계와 조건 속에서의 자유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나는 뼛속 깊이 정념의 노예다. 그것도 기쁜 정념보다는 슬픈 정념의. 사랑보다는 미움을, 희망이나 환희보다는 공포나 절망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왔다. 심지어는 자시 과시나 거만함보다는 소심함이나 자기 비하에 더 익숙하다. 그런 주제에 나와 달리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낯설어하고 또 은근히 질투하거나 깎아내리려 드는 습성까지 있다. 하~~.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나 관계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인식하고 접근하려들기보다는 정서적인 반응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다. 내게나 주위에 불운한 사태가 터졌을 때도, 먼저 그 인과를 따지고 캐물어 해결하려들기보다는 혼자서 우울해하거나 슬퍼하고, 또 누군가와 함께 아파해 하거나 분노하고, 이런 내가 고유한 ‘나’라고, 나아가 어쩌면 슬픈 정념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짐지고 살아가야 하는 당연한 운명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며 살았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아주 무능하고 의존적인 상태에서, 끝없이 외부 대상에 작용을 받으며 살아가는 게 바로 나였고, 나라고 하는 것. 이런 나의 보잘것없는 ‘저질 정신’에 깊이 탄식도 해보고 벗어나보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지금 하고 있는 공부도 바로 그같은 노력의 일환일 터. 허나 여전히 쉴새없이 요동하는 감정의 너울 가운데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지도 못하고, 이런저런 숱한 강박이나 망상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상태에서 나를 구원해 줄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으로 자유를 꿈꿔 온 것이었으니, 진짜 내가 갈망하고 추구해 온 것은 자유가 아닌 예속과 부자유의 수렁이 아니었나 싶다.

자연 안에서는 자연의 결함 탓으로 여길 수 있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은 항상 한결 같으며, 자연의 힘과 활동 능력은 어디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만물이 발생하여 한 형상에서 다른 형상으로 변화하게 하는 자연의 법칙은 어디에서나 항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사물이든 그것의 본성을 인식하는 방법도 역시 동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것은 자연의 보편적인 법칙과 규칙에 의한 인식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증오, 분노, 질투 등의 감정도, 그 자체로 고찰한다면, 다른 개개의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필연성과 힘에서 생겨난다. -3부 서론 중

스피노자는 내가 나의 무능력이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원인을 인간으로서의 본성적 결함이나 주체로서 갖는 자유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공통적인 자연력’에 돌리고 있다. 어떤 사물이 자신보다 더 크거나 강한 존재에 의해 눌리거나 타격을 받게 되면, 그 사물의 운동과 정지의 비율이 달라지게 되어 어떤 식으로든 변형이 되는 게 자연의 보편적인 법칙이다. 유한 양태로서의 인간 또한 자신의 외부에 있는 사물에 의해 지배되고, 자신의 본성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원인의 본성에 좌우되기 때문에, 연장 양태인 신체는 물론이고, 이 신체에 새겨진 흔적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감정 또한 수동적인 상태에서 무능력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자기 원인으로만 존재하고 작용을 하고 자신을 펼치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과 달리 인간은 부적합한 관념을 가지게 되고, 이에 기반한 행위나 욕망으로 인해 수동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3장에서는 우리가 일상에서 끌어안고 살아가는 온갖 정서들이 어떤 자연학적 메커니즘 속에서 발생하고 서로 결합하는지를 명쾌하고 세세하게 증명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국가 속의 국가’로 스스로를 만물 위에 세워놓은 인간의 자기규정이 얼마나 어이없는 환상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처럼 우리를 수동성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필연적인 조건을 스피노자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인 한에서 우리의 본성에 따라서만 살 수 없으며, 우리의 힘은 제한되어 있는데도 외부의 힘은 우리를 무한히 능가한다(4부 정리 2-4)! 이 지경인데도 우리 인간이 제 뜻과 마음으로 자기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고? 그렇다면 그간 나의 의지 박약이나 결핍 탓이라고 생각해 온 나의 정서나 감정들 또한 단순히 개인적인 의식의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인 자연의 법칙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의지의 발현이나 금욕적인 처방, 도덕적인 선의 실천 등을 통해서 바꾸거나 고치는 일은 쉽지 않거나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정념에 예속된 채 자연의 우연적 지배 아래에서 수동성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 타력에 의한 가짜 구원이 아닌, 자력에 의한 진짜 구원의 길을 없는 것인가? 스피노자는 이에 대한 유일한 길로, ‘자연의 보편적인 법칙과 규칙에 의한 인식’을 바탕으로, 철저히 이성의 지령에 따라 사는 삶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생활할 때 전적으로 자기 본성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며, 또 그러한 한에 있어서만 다른 인간의 본성과 필연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므로 개체들 중에서 이성의 지도에 따라 생활하는 인간보다 더 인간에게 유익한 것은 없다. - 4부 정리 35 증명

-정신이 모든 것을 필연으로 이해하는 한 감정에 대해 더 많은 지배력을 갖게 되거나 그 감정에 덜 지배받을 것이다. -5, 정리 6

 

이성에 따른다는 것은, 눈앞의 결과에 집착해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발생시키는 무수한 원인들을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이는 자연 전체의 관점에서, 자신은 물론이고 외부 사물의 본성에 대한 참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적합한 관념을 획득하고 이에 따르는 삶일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원인에 의해 파악하지 못하는 부적합하고 혼란스러운 관념이다. 그것들이 정확한 원인들과 연결되기만 하면, 다시 말해 ‘수동적인 감정에 대해 우리가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을 형성하기만 하면’ 감정은 감정이기를 그친다. 이처럼 원인에 대한 인식, 즉 필연성에 대한 인식은 우리를 수동적인 정념의 지배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자유인의 삶이란 적합한 관념을 바탕으로 한 능동적 변용 여부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내가 헤어나올 수 없었던 ‘~으로부터의 자유’가 왜 말도 안 되는 건지가 이제 분명해졌다. 모든 존재들은 신의 속성의 양태들로 존재하는 한에서, 서로 관계 맺으며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자신의 본성을 온전히 실현하기 힘든 자연적인 조건에 처해 있다. 그게 ‘나’라는 개체에게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있겠지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것들에 의해 작용을 받으며 휘둘리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러니 ‘자유’라는 게 있다면, 오로지 ‘~안에서’, 그 변화무쌍한 관계 속에서 실현되어야만 것이고, 그것도 자연의 질서 및 힘 관계에 대한 이성적 인식을 바탕으로 ‘자기 원인성’을 확장시켜가는 능력의 정도에 따라 그 정도나 폭이 달라질 것이다. 결국, 지금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무수한 관계들을 구속으로만 바라보고 그것들부터 벗어난 상태를 꿈꾸고 상상하는 것은, 무중력에 나를 위치시키는 것일뿐더러, 현재의 내 슬픔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예속화와 수동성의 정도를 높이는 데 기여할 뿐이지 않겠는가.

 

3. 타인, 지옥이 아닌 내 자유의 근거

살아오면서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 깊은 신뢰감을 갖거나 그 속에서 일체감을 느낀 적이 거의 없다.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이나 능동성의 정도가 약하니, 인간관계 또한 넓지도 못한 건 당연하려니와 깊이도 얕기 그지없다. 타인이나 집단에 대해 내가 느끼는 이같은 불신이나 회의의 바탕에는, 외부는 오로지 나의 자유를 가로막는 장애물이거나 적대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관념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무리 속에 섞이는 일은 내게 불편함을 넘어 두려움까지 느끼게 한다. 이같은 사실을 당연히 예전부터 알고 그러려니 생각해 왔는데, 이번에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이 점이 참 뼈아프게 다가왔다. 나의 활동능력을 감소시키는 슬픈 마주침들을 지나치게 자주 경험해온 탓에, 나는 타인과 조화로운 합성을 이루지 못하고 방어적으로밖에는 대응하지 못하는 걸까?

 

-덕은 자기 고유의 본성의 법칙에 따라 작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누구나 자기 고유의 본성의 법칙에 따라서만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하므로, 덕의 기초는 자기 고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 자체이며, 행복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할 수 있는 것에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4, 정리 18 주석

-덕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위하여 추구하는 선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욕구할 것이며 신에 대한 그의 인식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많이 욕구할 것이다. -4, 정리 37

 

스피노자의 세계에서 자기의 실존을 보존하고 유지함으로써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부도덕이 아닌 덕의 기초이다. 이게 비약이나 역설이 아닐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이성적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서적 반응이 아닌 이성적 인식은 전체 자연의 질서나 연관 속에서 자아와 외부의 관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타인과의 공통관념을 형성함으로써 적대 없는 삶을 가능케 하고, 나아가 타인과 공동체 모두 자유롭게 존재케 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결국, 덕을 따르는 사람은 타인과의 본성의 일치 속에서 더 큰 능동과 자유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니,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공동체와 공유하고 그 속에서 능동성을 실현해 나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자체의 본성이 우리의 본성과 전혀 다른 개물은 우리의 활동능력을 촉진할 수도 억제할 수도 없다. 또 절대적으로 어떠한 것도 만일 그것이 우리와 어떤 공통점을 갖지 않느다면 우리에게 선도 악도 될 수 없다. -4부 정리 29
  • 미완으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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