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읽기 숙제방

에티카 에세이

작성자
유 성혜
작성일
2016-10-10 02:20
조회
312
스피노자 세미나 <에티카> 에세이 (2016. 10. 6) / 성혜

완전한 지성

스피노자는 이름만 알았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몰랐던 내가 <에티카> 공부 모임에 참석하게 된 것도 스피노자의 신안에서는 필연적이리라(제1부 정리 29 : 자연에는 우연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결정되어 있다. 모든 것은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는데, 의지의 자유나 절대적 재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절대적 본성 또는 무한한 능력에 의해서 그러하다(제1부 부록)).

최근에 나를 둘러싼 어떤 변화가 앞으로 내게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이 일은 내게 필연일거야’하는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이 세상은 슬픈 것 이라는 관념을 갖고 살아온 나(언니가 중학교 때 교통사고로 한 다리를 못쓰게 되어 우리 집의 모든 무게중심은 언니에게 맞춰졌음)같은 사람에게 위의 필연성이란 말은 묘한 느낌으로 다가 온다. 결혼 후 죄책감, 억울, 분노, 배신감에 사로잡혀 살아왔었고 지금은 지나간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 일 또한 내게 필연적이었구나’ 되짚어 보게 만든다. 그런데, ‘필연이야, 필연이었구나’ 생각이 듦과 동시에 짐이 가벼워지는 일도 있지만 자식문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자녀를 양육할 준비가 덜 된채 큰 딸을 출산했고 직장생활도 계속 했는데 큰 딸과의 관계가 참 힘들었었다. 큰 딸이 대학입학 하고 나서부터 거의 지난 겨울까지 나랑 언쟁이 있을 때면, “너 같은 딸 정말 키우기 어렵다!” “그 때는 계모엄마인 줄 알았다!”는 등 감정 섞인 말들을 날리면서 주로 딸이 많이 울었다. 그러면 나는 혼돈된 감정을 채 가라앉히지도 못하고, “그 때 네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사과해야 했다. 처음 딸에게 사과할 때는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자격미달인 엄마였다. 딸의 상처와 나의 반응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대처 했었고, 그럴수록 골은 더 깊어만 갔다. 주변과의 관계에서도 겉으로는 인정이 있는 것처럼 보여지나 감정에 대한 공감능력이 부족해서 ‘이 빈자리를 어떻게 채우나’ 하는 고민을 늘 해왔다. 최근에는 소소한 모임에서 나 혼자 외롭게 빠져 나오게 되면서 이기적이고 성숙하지 못한 나의 속 모습을 또 한 번 더 보게 되었다.

관계의 회복

어떤 상대와 회복불능의 관계가 됐다는 건, 내가 상대에게 한 어떤 말과 행동이 상대에게는 치명적이었고 반대로, 그가 내게 한 어떤 행동과 말 또한 현재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역량(코나투스)을 능가해 버려서 회복하는 데 쏟아야 할 시간과 힘을 아예 포기하기로 결정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선의를 베푸는 일은 육체가 조금 고단한 것만 감내하면 할 수 있지만, 자녀에게도 감정에 휘둘려버리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내게 상처를 준, 용서하고 싶지 않은 OO에 대하여 사랑으로 미움(증오)을 극복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는 에티카 3부에서 우리가 증오 (미워)하는 상대에 대한 증오를 사랑의 노력으로 제거해 나갈 수 있다고 했다.

증오는 증오의 앙갚음에 의하여 증대되고, 반대로 사랑에 의해서 제거될 수 있다(제3부 정리 43). 내가 증오하는 상대가 나에 대하여 증오로 변화되어 있는 것을 표상하는 대신에 사랑으로 변화되어 있는 것을 표상한다면(정리30에 의해), 그런 한에 있어서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더 노력할 것이다(정리 29에 의해). 즉 (정리 41에 의해)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한 노력을 할 동안에 상대를 슬픔으로 자극하여 변화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만일 이 노력이 증오에서 생기는 노력보다, 또한 증오하는 상대를 슬픔으로 자극하여 변화시키려는 노력보다(정리 26에 의해) 더 크다면, 그것은 우위를 점하여 상대의 마음에서 증오를 제거할 것이다.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사랑의 노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관계에 대해서 사랑의 노력을 적용한다는 건 너무 힘이 들 것 같다.  스피노자는 감정의 모방에 대해서 고찰해  놓았는데, 관계가 악화되고 나서 회복하는 데는 너무나 힘든 사랑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의 정신 능력이 중요하다고 일깨워 준다.  신체변용의 관념인 사물에 대한 심상은 우리 신체의 본성과 동시에 외부 물체의 현재적 본성을 포함하고 있다(제2부 정리 16). 즉, 우리와 유사한 어떤 사람이 어떤 감정으로 자극 받아 변화되는 것을 우리가 표상한다면, 이 감정에 유사한 우리 신체의 변용을 표현할 것이다. 이 감정의 모방이 욕망에 관계되어 있을 때에는 경쟁심이라고 한다. 경쟁심은 우리와 유사한 다른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가 표상할 때 우리 안에 생기는 동일한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제2부 정리 27의 주석).  가족과 친구,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사이에서 상대의 성정을 용인하면서도 그들의 감정을 모방하지 않도록 자제하려는 노력과 노력을 통한 정신력을 키워나가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회복불능의 관계로 치닫기 전에 서로 감정전이(모방)하지 않도록 자제하는 노력이 필요했었다.  그러나 이미 회복불능상태인 나는,  위의  경쟁심을 ‘불신감으로 인한 오해의 감정’으로 대체하여 관계가 악화된 상대를 표상해 보니 상대의 감정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상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불편해 져서 힘들었었는데, 호흡이 조금 편해지니 마음의 동요도 조금 차분해지는 듯 하다. 그러나 상대에 대한 나의 감정이 다소 누그러졌다고 해서 내가 감정에의 예속에서 완전히 해방된 건 아니다.

감정 다루기

스피노자는 4부 서론부분에서 감정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며 단지, 신체의 활동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신체의 변화로, 동시에 이러한 변화에 대한 관념으로 이해 했다. 즉 선이란 인간본성의 전형에 더 가까이 도달하는 수단을 확실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악이란 우리가 그 전형처럼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임을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으로도 이해 된다. 하지만, 감정에 종속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운명의 지배 아래에 있으며, 스스로 더 좋은 것을 보면서도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종종 강제될 정도로 운명의 힘 아래에 놓이게 된다고 했다.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며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르고 복종하며, 사물의 본성이 요구하는 만큼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적응한다(제4부 정리 4의 계).

자연의 일부분이며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수동적 감정에 예속되고, 외부의 영향에 휘둘릴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다.  스피노자는 우리의 정신의 힘으로 참된 사유를 할 때,  감정에 덜 휘둘리고 적게 작용받는다고 한다.  참된 사유란 우리 각자의 지성의 힘과 능력을 사용하여, 사물의 최초 원인을 반성적으로 인식하는 것. 우리의 지성이 영원한 사물(사물의 최초 원인)의 참된 관념을 인식하는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했다(지성교정론 70,105).

수동적인 감정과 타당하지 못한 관념에서 생긴 모든 충동 또는 욕망은  참된 관념이 아니다. 우리가 수동적인 감정에 대하여 뚜렷하고 명확한 관념을 형성 한다면, 이 관념은 오직 정신에만 한정된 감정과 개념상으로만 구별될 것이며(제2부 정리 21과 주석) 그 감정은 수동적이기를 멈춘다(제3부 정리 3에 의해). 그리고 우리가 감정을 더 많이 인식하면 할수록, 감정은 그만큼 많이 우리의 능력 안에 있으며, 또한 정신은 감정으로부터 그만큼 적게 작용 받는다(정리3의 계).

우리는 살아가는 매순간 순간 마다, 감정의 변화를 겪으며 살고 있다. 우리가 외부 상대와 관계맺음을 통하여 살아 온 삶의 흔적이 곧 신체변용의 역사이고, 외부의 영향에서 자신의 역량 (코나투스)만큼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데 유리한 신체변용을 해온 것이다. 외부 상대 또한 마찬가지다. 외부에 영향을 받는다는 건, 그 영향에 관한 한 나의 실존능력이 관계맺음 하는 외부상대의 실존능력보다 약할 때 그러하다는 것과도 같다. 그러할 때도 '이건 자연의 일부인 내게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던 거야'하고 인식할 때, 그만큼 수동적 감정의 영향을 덜 받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 지성의 힘과 능력으로, 자신의 감정의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인식할 때, 우리의 수동적 감정이 수동이기를 멈춘다고 한다.

신을 사랑하자

자기 자신과 자기의 감정을 뚜렷하고 명확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신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과 자기의 감정을 더 많이 인식하면 할수록 더욱 더 신을 사랑한다(제5부 정리 15).

자기를 보존하려는 노력[코나투스]은 덕의 유일한 기초이다. 참으로 유덕하게 행동하는 것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기초로 하여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행동하고, 생활하고,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것이다(제4부 정리 24). 또한 우리가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한 정신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애쓰는 노력[코나투스]은 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최고의 행복은 우리의 이성(지성)의 능력을 키워서 신을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정신의 만족을 누리는 것이다. 또  최고의 욕망은 우리 자신 및  우리의 인식의 범위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을 타당하게 파악하도록 끌어가는 욕망이다.  최고의(완전한) 지성은 신 및 신의 속성들 그리고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서 나오는 활동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유대인의 초월적 신, 인격적 신은 아님이 분명하다. 이 세상에서 신을 사랑한다는 건,  나 자신과 나의 속성과 나의 본성의 필연성에서 나오는 활동들을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