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후기(2월20일)

작성자
이정수
작성일
2019-02-23 14:30
조회
148
불교의 깨달음에는 ‘지혜와 자비’가 함께 간다고 합니다. 지혜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지 않으면 자비는 한낱 감정의 끄달림에 지나지 않으며, 자비의 마음이 없이 인식과 논리로 모든 것을 환원하면 지혜는 세상과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지혜와 자비’는 스피노자에게 ‘인식과 정서’의 문제입니다. 전통 철학에서는 정서를 신체와 연관시켜 인식보다 하위의 문제로 다루어 왔습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인식 역량의 확장과 능동적 정서는 함께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서가 능동적이 되려면 인식 역량을 통해 세상을 더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은 정서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을 잘 이해하지 못할수록 자신의 표상에 국한된 방식으로만, 자신의 감정으로만 세계와 만나게 됩니다. ‘상상적 인식’에 갇히지 않고 ‘적합한 인식’으로 가는 과정과 하나의 정서에 ‘예속’되지 않고 그 정서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인식과 이해가 곧 정서 해방의 길입니다.

데카르트는 신체보다 정신을 특권화하여 정신에 ‘자유의지’를 부여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물질적인 법칙을 따르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신체는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신에는 뭔가 다른 것을 기대하며, ‘신체의 무력함’을 ‘정신의 우월함’이란 말로 대신하곤 합니다. 하지만 신체는 법칙을 따르는데 정신은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대로 뭔가를 더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무지한 자의 환상’일 뿐입니다. 스피노자는 이성을 중시하면서도, 정신이 신체나 정서보다 우월하다는 정신의 특권화는 거부했습니다. 스피노자의 ‘정신과 신체의 평행론’에 따르면, 정신과 신체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해 우월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정신 안에서도 이성이나 인식과 다른 정서 사이에 위계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유가 없다는 말이 ‘그저 되는대로 살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더 적극적으로 윤리를 구성하도록 요청합니다. 자유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세계 속에서 어떤 행위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며 살고 있는지를 더 많이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조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조건을 이해하는 가운데 어떻게 세계와 다른 관계를 맺어 나갈지를 실험하는 것이 존재가 해방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상상적 인식에 갇힌 무능력을 넘어설 때 사유의 역량이 커집니다. 많이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유지하고 있는 기존의 상상적 인식을 깨고 다른 방식의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세상은 복잡한 인과법칙에 의해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있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실체’란 무한한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생산되는 거대하고 복잡한 인과 전체의 장,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생성이 이루어지는 장입니다.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속성과 실체는 동일한 사물의 다른 이름들’입니다. 하지만 속성들은 실체의 부분들이 아니며, 속성들은 서로 대립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속성인 정신과 신체, 사유와 연장은 실체의 두 가지 표현 방식, 실체가 드러나는 두 가지 방식입니다. ‘신체적 차원의 나’와 ‘정신적 차원의 나’는 ‘내가 나라고 부르는 것’이 표현되는 두 가지 방식일 뿐입니다. ‘양태’는 독특한 실재,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모든 실재입니다. 모든 양태는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과 맺고 있는 관계가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이러한 실재는 끊임없는 네트워킹의 결과입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자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자유의지가 없는 주체’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윤리적 과제에 마주치게 됩니다. 스피노자-니체-푸코가 연결되는 지점입니다만, 우리는 이 세계의 물질적•시스템적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수동적으로 주체화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조건으로부터 생산되는 주체를 사유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조건이 우리를 완전히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방식을 실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능동적으로 주체화할 수 있습니다. 주체로 만들어지는 과정 안에서 어떻게 이로부터 벗어날 것인가? 나는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떠한 상상적 인식을 생산하면서 살고 있는가, 무엇이 나로 하여금 상상적 인식을 생산하게 만드는가, 상상적 인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떻게 다른 방식의 관계를 발명할 것인가, 인식역량의 확장과 능동적 정서로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다른 주체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스피노자를 공부하는 우리에게 이 모든 질문들이 윤리의 문제로서 제기됩니다.

속성과 실체가 사실상 동일한 것이라면 스피노자는 실체와 양태만으로도 세계를 설명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속성 개념이 더 필요했던 것일까요? 다양한 차원에서 접근해봐야겠지만, 우선 윤리적 차원에서도 속성 개념이 요청됩니다. 만일 실체와 양태만으로 세계를 설명한다면, 스피노자의 논의가 범신론 수준에 그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윤리의 문제도 ‘나를 비롯한 모든 존재에 신이 깃들어 있으므로, 모든 존재는 신 안에서 평등해야 하고 나는 모든 존재를 다 존중해야 한다’는 수준에 머물 뿐, ‘어떻게 나의 존재 역량, 신체•사유 역량, 관계 역량을 더 크게 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나오기 어렵습니다. 양태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실체를 능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속성들을 통해서 여러 관념들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관계 맺음의 총체, 즉 네트워킹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간을 출발점, 중심에 놓지 않고 인간 자체를 사유할 수 있을까요? 양태인 ‘나’ 이전에 실체가 자기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연장 속성과 사유 속성이 있으며, 이렇게 주어진 실체가 ‘나’로 양태화, 개별화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때, 우리에게 인간 주체를 중심에 놓지 않고 사유할 가능성이 열립니다.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은 생산하는 것과 생산되는 것, 규정하는 것과 규정되는 것, 힘을 가하는 것과 힘을 받는 것, 표현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생산하고 생산되는 과정 전체가 실체이고 신입니다. 하지만 속성을 통해 표현되지 않고서는, 양태를 통해 개별화되지 않고서는 실체 역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주는 표현되는 것 바깥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태가 자신의 존재 역량과 관계 역량을 확장하면, 그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것의 표현’으로서 신적 인식에 도달할 가능성이 열립니다. 우리는 어떻게 유한한 실존 속에서 유한성이 만들어내는 상상의 인식과 정서적 예속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생각이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이며 나의 몸이란 무엇일까요?
전체 4

  • 2019-02-23 22:55
    정수샘~ 수업내용을 정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였네요^^ 저는 속성개념이 아직도 애매합니다ㅎㅎ 스피노자의 개념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상상적 인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떻게 다른 방식의 관계를 발명할 것인가'와 같이 실천적 질문들은 불쑥 불쑥 올라오는 것 같아요. 스피노자의 개념이 어떤 대상으로 규정된 게 아니라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 2019-02-24 17:45
    역시 정수샘의 후기는 뱃멀미를 계속 하고 있는 제게 땟목입니다. 오! 스님! 정수샘님! ^^

  • 2019-02-24 20:01
    불교의 지혜와 자비가 스피노자에선 인식과 정서의 문제로 얘기될 수 있다는 게 가장 재밌었어요. 자비가 단지 대상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면, 어떻게 더 큰 역량으로 이행하는 행위일 수 있을지 궁금했거든요. 대상에 대한 자신의 표상적 인식을 교정하는 과정에서 정서 역시 다르게 작동할 수 있다는 얘기가 왠지 모르게 밝게 느껴집니다. ㅋㅋㅋ

  • 2019-02-24 20:16
    강의 내용이 정말 쏙쏙 들어오는 후기입니다 ㅋㅋㅋㅋ 자유의지와의 결별과 윤리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