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4.9 예술팀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4-15 15:14
조회
112
후기가 늦었습니다. 이번 주 예술팀은 《마르크스 레닌주의 미학의 기초이론》 6, 7장과 《해방된 관객》 2장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우선 6장 ‘예술의 인민성, 계급성, 당파성’에서는 “진실로 인민적인 작품은 자신의 시대를 앞지를 수 있다”(10쪽)라는 문장을 가지고 토론을 했습니다. “한 시대에 있어서 최고의 인민성을 체현하고 있는 작품들은 항구적 의미를 갖게 되어 뒤이은 여러 세기 동안에도 자신의 미적 가치를 보존하게”(11쪽) 된다는 것이죠. 맥락이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니체의 ‘반시대성’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니체적 의미의 반시대성이란, 시대의 주류적인 가치들에반(反)한다는 의미의 반시대성이 아니라, 자신의 시대를 근원적으로 통찰함으로써 그 조건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도주로를 그리게 되는 것 정도를 의미합니다.

혜원누나도 사카구치 안고의 예를 들며 비슷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안고는 자신의 시대를 ‘타락’이라고 규정하며 고결함을 되찾고자 하는 사람들에 맞서 ‘타락’ 자체를 지식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자기 시대, 자신이 놓인 조건,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타인들을 부정하지 않고, 그 너머를 꿈꾸지 않고 그것에 직면하려 할 때, 역설적으로 자신의 시대에 규정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안고의 글들 또한 그 예가 되는데, 그는 가장 비근한 것들을 소재로 삼아 일상적인 글들을 쓰지만 그의 글은 항상 가장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해 예측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함께 봤던 영화 《카메라를 든 사나이》의 감독 지가 베르토프를 비롯한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가장 난해한 작품들로 민중들을 만나고자 했던 그들. 인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그들의 태도에서 인민적인 것과 전위적인 것이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7장 ‘예술가’에서는, “예술가는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결국은 자신이 그 대표자가 되는 바의 사회세력의 사회적 실천에 의해서 규정된 자신의 욕구에 부응해서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다”(73쪽)라는 문장을 놓고 예술가의 당파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술가나 예술 작품을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또는 현실을 초월해야 하는 무엇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유물론적 미학이론의 관점에서는 그러한 신비하고 초월적인 무엇으로서의 예술, 예술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술은 특정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예술가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체화하고 있는 정치적 입장 혹은 이데올로기와 별개의 무엇일 수 없다는 것.

이러한 생각을 통해 우리는 예술이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조건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예술이 지닌 정치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술과 정치를 재현의 방식으로만 결부시킵니다. 특정 사회의 시민으로서 예술가가 하는 정치적 실천 혹은 소위 정치적 예술이라고 불리는 예술이 담고 있는 정치적 메시지 같은 것들만을 떠올리는 것이죠. 그러나 마르크스 레닌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예술가의 활동 자체가 어떠한 생산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를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가령 배우가 자신을 상품화하여 광고를 찍는다거나, 다양한 정치적 메시지들을 던지는 독립 예술가들이 국가의 지원금에 의존하는 등의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까, 하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주제의 대략적인 윤곽이 잡혔는데요, 본인이 ‘순수예술’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계셨다고 말씀하신 현숙샘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으로서의 예술’이란 무엇일지를 고민해보기로 했고, 혜림누나는 ‘노동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주제로 본인이 노동과 예술을 분리하고 각각을 실체화해온 방식들을 돌아보기로 했고, 저는 ‘예술로서의 노동’이라는 주제로 왜 지금 우리의 ‘일’은 ‘예술’이 될 수 없는지를 고민해보기로, 혜원누나는 ‘소비로서의 예술’이라는 주제로 예술 소비자로서의 윤리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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