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소생 러시아 3학기 6주차(4/16) 공지

작성자
정옥
작성일
2020-04-12 21:16
조회
131
소생러시아 3학기 6주차(4/16) 공지

4월 중순이 다 되어 가는데, 바람이 꽤 쌀쌀합니다. 그래서인지 올해 잘 버티던 채운샘께서 몸살로 고생하셔서 모두들 걱정하고 있습니다. 빨리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이번 주는 각 조의 텍스트들과 공통 텍스트를 함께 읽느라 분량이 좀 많았습니다. 이번 주 공통 텍스트가 에티엔 발리바르의 <맑스주의의 역사> 중 3편의 논문이었습니다. 3편의 논문이 다 쉽지 않았는데, 특히 자유와 평등을 논하는 논문은 무척 어려웠습니다. 맑스를 해석하는 발리바르의 논지를 꿰기가 쉽지 않았어요. 저희 조는 열심히 읽은 건화의 덕을 많이 보았지만, 토론이 쉽게 정리되지는 않았습니다. 다음 주에 이걸 다시 논의할 것 같지 않아, 잘 정리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발동했습니다. 공지를 위해 다시 읽고 정리하는 수밖에 없었네요. 논문 3개 중 2개밖에 토론을 하지 못해, 다음주는 나머지 토의 못한 논문만 더 읽고, 주제 글을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자고 했습니다.  일정은 지난주와 같이 오전에 조별 토론을 하고 산책과 오금희를 하고 오후에 공통 토론을 하고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조별 진행 상황

조별 모임 진행 상황을 잠깐 볼까요? 일단 마지막 주에 주제 글에 대한 프로포절이 나와야 하는데 좀 편차가 있습니다.

예술조: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공동작업을 결정한 예술 조, 일명 “주제만 있는 조”는 교과서 중심의 충실한 공부를 해나가고 있습니다. <맑스 레닌주의 미학의 기초이론>과 <해방된 관객>을 함께 읽고 있네요. 노동- 예술을 공통 테마로 잡았네요.

아나키조: 이 조의 공통 주제가 ‘아나키와 나’ 인지 오늘 알았습니다. 아나키즘인데 ‘나’와 엮어 풀어내나요? 아주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무척 열공하는 조입니다. <곰에서 왕으로>와 <빵의 쟁취>를 읽고 있네요

역사조: ‘주제도 못 정한 주제에 책만 많이 읽는 조’ 로 연옥에 빠진 조라고도 하구요. 문제화를 해보고자 책을 읽는 조인데, <독일 이데올로기>와 <무엇을 할 것인가> 맑스와 레닌의 저작을 읽고 있습니다. 주제 없는 조, 특히 자신의 문제 의식을 벼릴수 있길 바래봅니다.

    

 

조별 산책

발리바르의 <선언> 재해석

맑스주의와 역사는 논문집입니다. 이번에 읽은 논문은 발리바르의 <레닌 1914-1916: 전쟁에 의해 규정된, 정치에서의 철학적 규정> 과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평등과 자유의 근대적 변증법>이었습니다. 어려운 논문이네요. 이 논문은 프랑스 혁명에서 주장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인식의 오류를 발리바르가 다시 지적하며 잡아내고 있는 글입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부르조아의 전유물이라고 평하는데, 그렇게 의식하지 않았던 선지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맑스는 파리코뮨을 기존의 국가기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정치형태를 실현하려 한 시도였다고 해석합니다. 노동자 같은 하위 계급과 여성들의 참여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죠.

발리바르는 이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에서 두 가지 중요한 지점을 발견합니다. 인간=시민, 자유=평등 이라는 독창적인 발견이지요. 보통의 사유는 보편적 인간 상위에 시민이 존재한다고 보고,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도 서로 부정하는 관계라고 생각하지요. 자유롭기 위해선 평등이 침해받아야 하고, 평등은 자유를 침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동일함을 강조합니다. 먼저 인간=시민의 논지를 따라가보죠.

<선언>을 다시 읽어보면 인간의 권리시민의 권리사이에 실제로 내용상의 어떤 편차도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즉 그 둘은 정확히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시민 사이에도 적어도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들의 성격과 외연에 의해 실천적으로 정의되는(그런데 이것이 바로 <선언>의 목적이다) 편차나 차이가 없다.(221)

발리바르의 인간=시민이라는 등식은, 흔히 주장되는  <선언>이 근대 자연권 사상(특히 로크나 루소)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근대 자연권 사상과의 단절을 표현한다는 보충적인 정식을 함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근대 자연권 사상이 정치적 성원으로서 시민의 권리를 중요하게 본 반면, <선언>은 어떤 ‘인간 본성’도 설정”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것은 “개인적 또는 집합적 인간을 정치사회의 구성원과 동일화 합니다.”이것은 곧 인간의 권리 또는 인권은 그 자체가 정치적 권리이며, “정치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함축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스피노자를 해석한 발리바르의 저작을 보면, 어떤 규율도 없는 본래의 권리인 자연권과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권리로서의 시민권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비슷한 논조 위에 있는 것 같은데요, <선언>은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를 어떤 자연적인 본성에 기초 짓는 대신, 인간들의 권리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부여하고 보증하는 권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상호성과 상보성이 있다) 오히려 억압하거나 부정하려고 하는 세력이 있다면 저항과 투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인간=시민이라는 명제는 고대의 정치적 관점과 달리 평등을 자유의 한계 속에 위치시키지 않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의 평등은 자유를 지닌 시민들, 자유로운 성인 남성들에게만 부여되는 것이었기에, 이에 따라 평등은 자유의 결과이며 자유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 곧 노예나 여자, 아이의 배제를 근거로 합니다.

<선언>에는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바와 같은 사적 인간과 공적 시민의 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처음부터 정치적 인간, 곧 시민이라고 보는 것이 발리바르의 시각인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선언>에서 발리바르가 중요하게 보는 것이 평등과 자유 사이의 완전한 동일성, 곧 평등=자유입니다. 자유라고 하면 부르조아의 전유물로 생각됩니다. 평등=자유 명제가 표현하는 것은, 각자 상이한 본질을 지닌 두 가지 관념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양자가 현존하거나 부재하는 상황들이 필연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 곧 “자유의 역사적 조건들은 평등의 역사적 조건들과 정확히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다시 말하면 평등=자유는 평등이 반박되고 부정당하는 역사적 상황은 자유가 반박되고 부정되는 역사적 상황과 정확히 같다는 사실입니다. “평등을 억압하거나 제한하지 않으면서—즉 폐지하지 않으면서—자유를 억압하거나 제한하는 조건들의 사례는 없고, 또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이렇게 평등과 자유가 각각 동일한 억압과 제한의 역사적 조건 속에 놓여 있다면, 중요한 것은 개인적 자유와 실질적 평등을 구별하고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과 자유를 서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건을 묻는 것이겠지요.

# 다음주에는요,

* <맑스주의의 역사> 중 “사회주의와 맑스주의” 다시 읽어옵니다.

* 간식은 호정샘, 혜원

전체 1

  • 2020-04-13 14:42
    평등과 자유가 근본적으로 동일함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완전히 반대로 이해해버렸던 1인입니다.
    '어렵다'라는 생각에만 가득 차서 읽었던 발리바르 님의 글, 숨을 고르고 다시 차분히 읽어봐야겠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