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앓이

23.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6-04-28 21:13
조회
497
23.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논어》에서 인(仁)은 가히 최고의 덕목이다. 인(仁)이 없다면 예도, 즐거움도 아무 것도 아니다.(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오직 仁한 자만이 사람을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있다.(子曰 惟仁者 能好人 能惡人) 그 뿐인가. 최고의 인간인 군자는 식사를 하는 순간에도 인을 떠나지 않았다.(君子 無終食之間 違仁) 주자의 설명을 빌리자면 仁은 인간의 마음의 완전한 덕이다.(仁者 人心之全德) 《논어》에서 말하는 仁은 말하자면 공자의 발명품이라고 한다. 공자 당대에도 그 이전에도 仁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어떤 유능함에 관련된 것이었을 거라고 한다. 공자는 이 통념들을 넘어 仁을 새롭게 규정했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 仁에 대한 구절도 이 맥락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공야장(公冶長)>(《논어》)에는 맹무백(孟武伯)과 공자(孔子)의 대화 하나가 나온다. 맹무백은 노나라의 대부로 당대의 실권자였다. 그런 그가 공자에게 인재 추천을 부탁한다. 그의 기준 역시 仁이었는지 공자의 제자들 - 자로(子路),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 - 이 仁한가를 묻는다. 그에 대한 공자의 일관된 대답, ‘(유능하지만) 仁한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 말은 맹무백을 당혹케 하였을 것이다. 왜냐 공자가 증언하고 있는 그 제자들의 면목은 맹무백이 두 팔 벌려 환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자로는 대국(大國)의 재정을 담당할 만한 능력이 있다. 염유는 작지 않은 고을에서 재상노릇을 할 만하다. 공서화는 조정에서 사신 등을 맞이 할 만하다. 공자의 말에 따르면 그 제자들은 군사, 행정, 외교의 부문에서 분명 크게 쓰일만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공자는 그 자신의 권위를 통해 제자들의 뛰어남을 보장했다. 그러나 공자는 “仁한지는 알지 못하겠다”(不知其仁也)는 말을 붙인다.

이 장면에서 공자는 맹무백에게 仁을 되묻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仁한 자를 추천해 달라고 말하지만 그 때 그대가 말하는 仁이란 무엇인가’라는 것. 실제로 맹무백에게는 제자들의 저 유능함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자가 그들의 仁만은 보장해주지 않으니 대체 뽑아야 하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仁한 자를 뽑자니 추천자의 증언이 확실치 않고 유능한 것을 믿고 뽑자니 仁한 자를 구한다는 자기의 말이 걸린다.

그렇다면 대체 공자의 제자들은 실제로 仁한가, 仁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서는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 같다. “仁한지는 알지 못하겠다”(不知其仁也)는 대답은 어떻게 읽으면 제자들이 ‘뛰어나지만 仁한 것은 아니다’라고 들린다. 또 ‘仁함을 어떻게 군사, 행정 분야 등의 능력에서의 유능함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겠는가’로 들리기도 한다. 처음에 나는 공자가 제자들의 능력을 언급한 것이 그들이 유능하지만 어질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어쩌면 저만한 능력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것 역시 그의 어짊(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닐까.

벼슬 자리에 오를 만한 능력은 한 사람의 덕성(仁)과 등치될 수 없다. 하지만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적합하게 일을 해낼 수 있기 위해서는 그가 사사로움에 치우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주자는 仁을 “사욕(私欲)에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라고 풀었다. 제자들이 완전히 仁을 체득한 인물은 아닐지라도 그의 행동들에서 仁을 헤아리지 못할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仁한지는 알지 못하겠다”고 한 것은 어째서일까. 그것은 역시 仁함이 그 어떤 사회적 유능함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仁한지는 알지 못하겠다”라는 공자의 대답은 일차적으로 맹무백에게 중요하다. 그대가 얻으려는 인간은 정말 인한 자인가, 아니면 그저 몇몇 사회적 분야에서 출중한 자인가. 몇몇 재주나 사회적 능력 등을 통해 仁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이제 내게 돌아온다. ‘누구와 함께 일을 도모할 것인가.’ 인재를 등용해야 할 입장은 아니지만 우리도 알게 모르게 사람을 가리고 취한다. 알게 모르게 어떤 이를 친구로 삼고, 믿고 따르고, 가까이 할 지를 정한다. 그 때에 각자의 기준은 무엇인가. 적어도 공자가 사람을 뽑았다면 그는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순한 평판 역시 그에게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순한 성격 좋음, 유능함, 인정받음 등이 공자의 등용문에는 있을 수가 없다. 공자의 문하에 지위고하 신분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오직 인한 자만이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다.”(子曰 惟仁者 能好人 能惡人)는 구절을 주석하며 주자는 유씨(游氏)의 말을 옮긴다. “사람이 매양 그 올바름을 잃는 것은 마음이 매여 있는 바가 있어서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어진 이는 私心이 없으니, 이 때문에 제대로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는 것이다.” 어진 이는 마음이 매여 있는 바가 없다. 마음은 무엇에, 어떻게 얽매이나. 벼슬자리에 오를 때 기준이 되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세상의 여러 가지 기준들이 나 대신 사람을 본다. 그것은 개인의 취향이 되고 과거 기억이 되어 사람과 상황을 이해하는 잣대가 된다. 이렇게 쓰고 보니 私心이란 넘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얽매인 바 없이 사람을 대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어진 이는 그가 알게 모르게 세워 둔 기준들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자라고 말이다. 어진 이는 자신이 좇는 기준이 실상 아무 것도 아님을 안다. 공자의 등용문에는 기준이 없다. 이것은 ‘무조건 오케이’라는 말이 아니다. 처한 독특한 상황에 앞서 기준을 두지 않는다. 또, 맞닥뜨린 이에 앞서 기준을 세우지 않는다. 몇가지 기준들을 핑계삼아 자기의 무능을 가려버리지도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람을 훤히 본다. 또 언제 어디서건, 누구와 함께이건 적합하게 사람을 대할 수 있다.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仁한 자는 철저히 침묵할 수 있다. 누구를 고르겠나. 무엇을 기준 삼아 고르겠나. 시험 감독관이 아니라서가 아니다. 맞닥뜨린 이들 그 누구도 함부로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마찰이 일어나고, 사고가 생기고, 못마땅한 점들 투성이인 것이 무슨 문제가 될까. 공자에게는 제자들이 仁한지 그렇지 않은지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나의 기준들을 가지고 상대의 마음을 해치지 않겠다. 내게 온 이가 누구이건 그에 맞게 배우고 익힌다. 능히 사랑하고 미워할 수 있다. 부데끼고 또 즐거워하며 함께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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