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앓이

22. 후중(厚重)함에 대하여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6-04-14 17:00
조회
562
22. 후중(厚重)함에 대하여

군자에 대한 제자(자공子貢)의 물음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 적이 있다. “先行其言而後從之.”(論語 爲政), 먼저 그 말을 행하고, 그 후에 말이 행동을 좇는다. 이 구절은 말이 행동에 앞서는 것을 경계한다. 경험상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분명 내가 어떤 말들을 하지만 스스로 그 말들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들떠서는 생각 없는 말들을 늘어놓고, 침울해져서는 해야 할 말조차 제 때에 하지 못하는 일은 흔하다. 말은 내 것이지만 또한 내 것이 아니다. 먼저 행하고 후에 말이 행동을 좇게하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말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음을 경계하라는 뜻이 아닐지.

한편 공자님께서는 교묘한 말과 아름다운 낯빛에 주의를 주기도 했다. “巧言令色, 鮮矣仁!”(論語 學而) 이 유명한 성어는 말이 본심을 가린 채로 쓰이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얼마든지 교묘해질 수 있는 것이 나의 말이다. 남을 속이고 나를 속이는 말. 아첨하는 말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다. 때때로 말들은 저희들끼리 연결되며 사태에 대해 멋대로 정리를 해버리기도 한다. 그 그럴듯함에 얼마나 잘 걸려 넘어지는지.

위의 두 구절을 어급한 것은 ‘말’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말이 많은 것을 그다지 높게 치지 않는다. 수다쟁이가 무슨 문제이겠나.(;;) 말이 그만큼 위험한 것이라고 여겨서가 아닐까. 말과 행동은 쉽게 어긋나게 마련이다. 또 말은 그 본심을 읽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말과 행동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여도 분명 말에 걸려 사태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는 일은 흔하다. 드러난 행동보다 말을 믿는다. 뱉었던 말이 허망하게 무너져버리는 지점보다는 어찌됐건 만들어낸 말들을 고집하고 싶어 한다. 혹은 뱉어진 말들이 만들어내는 사태들을 외면해 버리는 일도 흔하다. 말이 주는 당장의 단맛에는 쉽게 이끌리고, 온갖 기대치를 투사해 자기와 세계를 이해하려고 한다.

이런 인간에게 치료약은 결국 자기 말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말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은 재난이지만 또한 구원처가 될 만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기의 깜냥이 드러나는 자리이고 상대방에 대해서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자리가 된다. 하지만 말과 행동의 엇갈림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역시 군자라야 가능할 것 같다. 보통은 말과 행동의 간극을 살피고 경계할 힘이 없다. 말이 없는 자는 말이 없는 대로 행여 실수같은 것을 만들지 않을까 두려워할 뿐이다. 말이 많은 자 역시 자기의 말이 만들어 낸 세계 속에서 쉬고 싶어한다. ‘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었던 것은 실은 사람이 후중(厚重)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해해보고자 해서이다.

子曰 君子不重 則不威 學則不固 (論語 學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후중하지 못하면 위엄을 잃는다. 배움도 견고하지 못하다."

위 구절에 따르면 군자는 중(重) - 주자의 풀이에 따르자면 후중(厚重)함 - 을 본인 삶의 기본 태도로 삼는다. 중(重)하지 못하면 위엄을 잃고 배움 또한 견고할 수 없다. 이 구절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풀이를 달았다. 바깥의 행동거지가 가볍다면 결코 내면에 견고할 수 없다(輕乎外者 必不能堅乎內). 우샘(우응순샘)은 후중(厚重)함은 진실되고 신중한 태도라고 말해주시기도 했다. 진실되면서도 망동하지 않고 신중한 태도라야 비로소 위엄을 잃지 않을 수도 있다.

군자의 후중함은 몸무게의 무거움과는 별 상관이 없다.(;;) 그의 직책의 고하(高下)에 견줄 것도 아니다. 또 말이 없고 행동이 굼뜨다는 식의 겉보기 특성으로 말할 수도 없다. 군자의 후중함은 말과 행동을 살필 수 있는 그 힘에 달린 것이 아닐지. 말이 많고 적고를 떠나 그 말을 맹신하지 않을 수 있는 자라야 신중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말과 행동이 어긋남을 외면하지 않는 자라야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람은 신을 믿고 제도를 믿고 또 권위자를 믿는다. 더불어 자기 말이 만들어내는 세계를 믿는다. 함부로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자기의 말, 그 말이 전제하는 세계를 의심할 수 없는 데서 온다.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니지만 자기 말이 언제든 엎어질 수 있음을 이해하지 않고서야 사람은 망동(妄動)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함부로 말하고 행동한다. 단죄하기를 잘하고 헛되게 추앙하기도 잘 할 것이다. 이러한 인간에게 위엄이 있을 수 있을까. 그가 어떤 사회적인 지위를 갖고 있든지 간에 결국 자기의 말과 함께 울고 웃고 할 뿐이다. 말을 삼갈 수 없는 자는 위엄을 잃는다. 그가 실수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기의 실수를 알아챌 힘이 없어서이다. 자신의 단죄가 단편일 뿐일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후중(厚重)하다는 것은 배움의 문제와도 결부된다. 중(重)하지 않고서 배움 역시 견고할 수 없는 것(學則不固). 사람이 배울 수 없는 것은 그의 지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자기 말을 믿고 망동(妄動)하는 자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배울 수는 없는 것이다.

《논어(論語) 》를 읽고 있는 탓인가. 요새 새로운 근심이 생겼다. 아무래도 매사 망동(妄動)하기만을 잘하는 것 같다는 것.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또 매번 생겨나는 갖가지 마음들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다. 그 때에 어떻게 후중(厚重)할 수 있는 것일까. 말이 많고 적음을 떠나 자기 말을 맹신하는 자는 후중할 수가 없다. 하지만 또한 매 번의 말 한마디들에 내 전부가 드러나기도 한다. 군주의 중(重)은 이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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