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앓이

20. 사람을 보는 법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6-04-01 10:24
조회
707
20. 사람을 보는 법

썰렁한 이야기 하나.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아들에게 어머니가 말했다. “아들, 여자는 자고로 마음이 이뻐야 한다.” 아들, “어머니, 그런건 보이지 않습니다. 얼굴이 착한지, 몸매가 착한지는 잘 보이는데….” 이 대화에 한참 웃었던 기억. 그런데 종종 의아하다. 마음은 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어째서 그것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한 것일까. 꼭 마음만을 가지고 말을 할 것도 아니다. 사람에 대해서 그렇다. 늘 보고 있지만 때때로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는 것만 같다. 보고자 할수록 보이지 않게 되고, 알려고 할수록 알 수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내게 공자님은 말하시는 것인가.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는가. (人焉廋哉 人焉廋哉)”

子曰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 論語 爲政(10)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 행하는 것을 보며, 행동이 연유하는 바를 살피며, 편안히 여기는 바를 관찰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는가.

여기서는 ‘보다’를 뜻하는 세 가지 서로 다른 한자가 등장한다. (볼 시), (볼 관), (살필 찰). 우샘께서는 이 “보다”들을 다른 “보다”들과 견주어 설명해 주셨다. 看(볼 간)과 示(보일 시).  看(간)과 示(시)는 지나가며 흘끗 보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굳이 보고자 하지 않아도 보이니까 보는 것, 그냥 지나치는 것들. 이에 반해 視(시), 觀(관), 察(찰)은 상세하게 무엇인가를 본다는 뜻을 갖는다. 視(시), 觀(관), 察(찰)을 쓸 때는 눈에 단순하게 들어오는 것 이상을 보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 아닐지. 참고로 다산은 視(시), 觀(관), 察(찰)에도 서로 다른 강도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문장으로 더 들어가보자.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사람을 보는 법에 대한 구절이다.

어떻게 사람을 보는가. 먼저, 사람의 행동을 본다(視其所以). 그의 말과 행위가 선한지 악한지를 관찰한다. 주자님 주석하시기를 ‘선(善)을 행하는 자가 군자다’! 고지식한 말이지만 또한 군자 간별법이 참 감단하게 다가온다. 행동이 선한지 악한지만 보면 되는 것. 행동은 분명 밖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그 선악도 밖으로 드러나는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사람을 보는 법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두번째, 사람의 행위만이 아니라 그것이 연유하는 바를 살핀다(觀其所由). 연유하는 바(所由)는 대체 무엇인가. 다산은 행위가 어떠한 길을 거쳐 왔는지 그 전개과정을 살피는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中所經者何道) 도올샘은 행위를 유발시킨 동기이자 지나온 역사적 전개과정을 보는 것이라 말한다. 무엇이 됐든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 이상이 있음이 아닐지. 물론 겉과 분리된 어떤 연유는 아니다. 사람의 말과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복잡한 상황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동기, 욕구, 의도, 욕망, 갖가지 사정… 이 모든 것들을 연유로 하여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이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간파할 수 있는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察其所安', 편안하게 여기는 바를 살필 것. 주자는 편안하다(安)를 ‘즐기다(樂)’로 풀기도 했다. 이 대목에 이르면 “숨길 수 없다”는 공자의 말이 확 다가오는 것도 같다. 사람 마음 참 숨길 수가 없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의도했든, 그가 편안하게 여겨 좇는 바는 정직하게 그에 대해 말해준다. 가령, 똑같이 청렴을 말하고 부귀(富貴)를 멀리 하여도 둘은 서로 다를 수가 있다. 가난 속에서 진정 편안할 수 있는가. “청렴해야지!”하고 애를 쓰고 있는 이상 아직 안빈(安貧)은 아닐 것이다.

앞의 두 가지 - 視其所以 觀其所由 - 는 마지막 대목 - 察其所安 - 과 만나 비로소 힘을 갖는 것 같다. 사람의 행동을 보고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사정을 본다. 이것들은 또한 그가 진정 편안하게 여겨 좇는 바와 함께 한 사람의 진실을 맞닥뜨리게 한다. 남을 이렇게까지 볼 수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스스로에 대해서는 확실히 그렇다. 察其所安을 들었을 때 찾아왔던 당혹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편안하게 여기는 바를 감출 수가 없다는 것.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바라든 나 자신 지금 즐겨 좇는 바는 숨길 수가 없다.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는가. (人焉廋哉 人焉廋哉)” 여기서 다시 의문, 자기에 대해서는 숨길 수 없어도 타인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점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알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남에 대해서도 알 수 없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 마음이 편안하게 여기는 바를 어찌 모르는가. 그것은 역시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한 바람 속에서 자기 자신의 진실은 외면해 버리는 일은 흔하다. 행여 비난받을까(;;) 여러가지로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것. 상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이러한가 저러한가, 이러지 않는가 저러지 않는가.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보려고 할 수록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된다. 자신의 혼란한 마음들만 드러날 뿐.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가 자기를 감추고 있어서가 아니다. 차라리 그 모든 것을 포함하여 사람이 처한 조건들을 알고싶어하지 않는 것. 그의 마음이 편안하게 여기는 바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사람을 보는 법은 어렵다. 그의 진실이 감추어져 있어서가 아니라 알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는가. (人焉廋哉 人焉廋哉)" 이 대목에서 공자는 사람이 무엇에 편안하게 여기는가 따위를 문제삼으려는 것이 아니다. 보지 않으려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남도 타인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그 태도 역시 숨길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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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01 13:04
    마자마자, 숨길 수가 없지. 숨길 수가 없는 법이지. 그래서 사는 게 만만치 않구나,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