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6월 10일 2학기 5주차 수업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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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7 20:27
조회
98
# 명상과 입중론 낭송

요번 주 명상은 비오기 직전의 후덥지근한 날 속에서 인내를 새기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땀도 많이 나고 살짝 정신이 없었는데 차분하게 앉아서 더워하는 스스로를 알아차리니 서서히 더위도 가시고 차차 열이 가라앉는 것 같았어요. 윤지샘께서 명상에서는 각 단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탄이 있다고 하셨어요. 명상을 하는 와중에 스스로가 아! 하면서 경험으로 깨우치는 것인데 이것을 건너뛰면 다시 흔들리기 쉽다고요. 10분 20분이 모여서 50시간이 되면 다음 단계로 진행할 수 있다고 하니 성실히 수행하면 년말에는 혹시 아!하고 감탄하는 경험을 가지면서 다음 단계로 갈 수도 있으시겠죠? 은순샘께서 다행이 수술 잘 끝나셨다고 은미샘이 전해주셨어요. 부디 회복이 잘 돼서 얼른 오시길 빕니다.

# 중론 8장 (유위에 대한 고찰) 세미나와 채운샘 강의

지난주에 이어 8장 유위에 대한 고찰에 대해서 세미나를 하고 채운샘께서 강의를 해주셨어요. 은주샘께서 발생에 대한 논박에 있어서 무한소급이 왜 오류인지 질문하셨어요. 너무 당연하다고 넘겼는데 진지하게 따지니 발생의 발생, 발생의 발생의 발생 이렇게 거듭되는 것이 “진짜 발생다운 모습”일 것 같은데 그게 왜 오류가 되는지 의문이 남더라구요. 채운샘께서 강의하시면서 이 질문에 답해주셨는데요.

후기는 강의를 중심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중론이라는 관수행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실제 사유에 접목시키는데 이르러야 하는데 중론의 실천이라...무자성을 행하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 거창하게 느껴집니다.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채운샘께서는 분별적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는 무의식과 의식을 그 뿌리에서부터 흔들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염불처럼 공하다는 것을 외우는 것보다 생각을 다듬고 하나라도 가지고 있던 분별을 넘어서도록 기존의 언어로 구성된 사유를 흐트러뜨리고 균열을 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훈련이 읽고 쓰는 것이라고요. 강의 중에 실소가 터진 부분이 있었는데 우리는 생각이 늘 따로 있는데 글이 잘 안써진다고 습관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생각이 딱 나오는 글 수준밖에 안되는 것이라고요. 하하. 이해가 따로 있어서 이해는 됐는데 말이 안 나온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네요. 지금도 그렇지만 후기나 숙제를 쓰다보면 제가 가진 언어가 얼마나 빈약한지 느낄 때가 많습니다. 몇 백 단어로 돌려막기 하고 있고 그것도 헉헉 대고 있으니까요. 그 만큼이 저의 기억이고 생각의 범위였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더 쥐어짜서 생각을 글로 옮기는 만큼 사유가 확장되는 것이고 분별로 가려진 마음에 숨구멍을 만드는 것!

조금만 적용해보면 우리는 늘 분별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시간도 초단위로 분별하고 사람에 대해서도 성실한, 불편한, 친한, 착한, 못된 같은 분별적 수식어를 붙입니다. 어떤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뿐만 아니라‘무엇이 있다’는 생각이 모두 분별입니다. 그렇게 치면 생각은 모두 분별입니다. 그렇다고 감각하는 세계를 모두 아지랑이라고 여기고 경험과 과거를 지우고 매번 새롭게 차이를 인식할 수도 없어요. 실재로 반복되는 패턴을 의식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무의식은 몰라도 의식의 차원에서는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착되어 있는 자기전제를 - 니체의 표현으로는 전제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마치 자신의 피부와 같이 느껴지는- 의심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인과론입니다. 현상이 연기하는 데는 근본원인이 있다는 전제(아비달마),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를 만든다고 여기는 것.  이렇게 원인을 계속 추적하면 닭의 원인인 달걀, 달걀의 원인인 닭의 순환논리에 갇혀버리게 됩니다. 무한소급은 인과론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자 무엇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인과론은 그 단순성 때문에 세계를 이해하기 편리하지만 인과가 늘어날수록 인간의 사유 안에서 세계가 더 실체적으로 쪼개지고 파편화되는 한계가 있습니다. 실상은 세계가 생,주,멸로 구분되지도 않을 뿐더러 무엇하나 규정할 수도, 규정되지도 않는 변화 그 자체입니다. 세계는 발생 이전에 근원이 있는 것도 아니며, 결과와 연하여 원인이 있는 것이지 결과에 선행하는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생, 주, 멸은 언어적 분별일 뿐인데도 대상세계에 발생이나 지속, 소멸이 있다고 실재를 언어에 맞추어 거꾸로 믿게 됩니다. 문제는 이렇듯 고착된 자기전제는 스스로 그 당위에 대해서 의심조차 아니 그런 전제가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아요. 뭐가 잘못됐는지 스스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거든요. 채운샘께서 마주침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encounter, 조우, 교전이라는 뜻인데요. 종전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건, 기존의 전제로 이해할 수 없는 난제 앞에서 자기 전제가 낯설어지는 경험이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등장하시면 두 팔 벌려 반겨야 하는 것이죠. 중론하라!의 수행을 도와주는 보살인 것을!

채운샘께서 흄과 베르그송을 예로 들면서 현재가 품은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요. 아마 마주침이라는 것에 응축되어 있는 시간성에 대해서 얘기해주신 것 같아요.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다른 이름일 뿐, 현재 속에 과거와 미래의 두 차원이 같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흄). 현재는 반쯤 온 과거이고 현재는 이미 모든 과거와 더불어서만이 현재로서 작동하는 것이다(베르그송). 마주침은 현재의 변화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 온 우주의 변화를 불러온다는 것으로 이해해 봅니다. 난제와 고전분투하면서 머리가 깨질 것 같이 고민하고 무의식을 헤집는 새로운 해석에 다다른다는 것이 우주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 것 아니 개벽천지 같이 온 우주가 뒤흔들리는 것이겠죠. 중론하라!의 위대함.

마지막으로 언어 자체의 연기성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어요. 언어야 말로 그 의도라든지 의미가 따로 있어서 그것을 그대로 전달하는 도구라고 여기는 것이 얼마나 순진한 발상인지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정서나 강도를 가지게 하는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 언어도 없습니다. 진리, 선, 악, 신도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도 “멸”도 절대적인 의미를 지닐 수 없을 것입니다.그래서 메아리, 아지랑이, 구름과 같은 것이라고 하셨나봅니다. 언어야 말로 맥락에 따라서 각자의 해석이 출렁이는 변화의 장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통의 도구로 믿어지는 언어야 말로 개별적인 해석과 오해를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그 불통의 오류마저 포함하는 것이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이고 이해의 방식이라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후기 논고에 이렇게 썼다고 해요. “나는 언어가 노니는 탈시간적이고 공간적인 투명한 수정체 같은 공간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세계에 마찰이 없는 세계, 시공간이 없는 세계는 없다” 중론에서 언어를 보는 관점도 연기 조건 속에서 생기할 뿐이라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언어의 작동은 특정한 맥락(조건) 안에서 연기하여 매번 다른 방식으로 발생(이해)되는 것입니다. 공의 용법을 통해서만 공을 깨닫는 것이지 공의 정의를 통해서 공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어요. 아~! 공의 용법을 통해서 공을 깨닫는 것은 너무 어렵네요. 이것이 공이 어려운 것인지 공의 용법이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불티모아 6주차 공지입니다.

1). 명상 : 하루 10분이상 꾸준히~^^

2). 쁘라산나빠다 제8품

1-2: 설 /3,4 은주 / 5,6 현화 / 7,8 길/ 9,10 은미 /11,12 경아 /13 윤지

3)<입중론>과 <중론1품> 학기말 낭송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한 페이지씩 돌아가며 하기로 했습니다. 다음주에 낭송 순서 추첨하겠습니다
전체 4

  • 2021-06-17 21:40
    ㅋㅋㅋ 지하철타고 규문 오는 길에 댓글을 달던 길례샘의 신기한 손놀림으로 갑자기사라졌던 설샘의 소중한 후기가 다시 돌아왔네요~ ^^
    촘촘하고 알찬 후기 속에 "중론하라!"는 설샘의 구호가 메아리칩니당.... ^.^/

    • 2021-06-18 01:29
      후기의 안위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다음주에 뵐께요. ㅎㅎ

  • 2021-06-19 16:29
    몇 달 전 [중론]과의 첫 만남이 'encounter'라고 부를만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정말 기존의 어떤 방식으로는 접근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몇 달 지난 지금은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는 것도 아닌 상태인데요 ... 약간 감이 잡힌다 싶다가도 뒤통수를 맞는 경험을 여러 번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이것도 익숙해지는 듯 ... ㅎㅎㅎ

    언어 자체의 연기성, 중론이 말하고자 하는 또 다른 것이겠지요. 무엇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온전한 실체의 이미지를 자동적으로 떠올려요. 하지만 용수는 언어가 실재를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작정하고 언어의 실체성을 따져보니 무한소급에 빠지고, 언어의 그물만이 둥둥 떠다니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저 같은 범부에게는 용수의 논파가 참으로 억지스럽고, 부당하고, 이상하게 느껴지고, 대론자들의 주장은 오히려 익숙해서 그런지 별로 반감이 들지 않아요ㅠㅠ ... 이것은 제가 인도인의 논리(귀류논증 포함)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만큼 제가 대론자들처럼 무의식 깊숙히 언어를 실체화하고 있다는 반증이겠지요ㅠㅠ
    공은 규정된 정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용법, 즉 상황과 조건에 따라 드러난다고 했으니 도반들과 함께 계속 가보는 수밖에요~
    후기 잘 읽었씀다!!!

  • 2021-06-20 19:39
    두번씩이나 후기 올리게 해서 쏘리~~ 이제 비번을 바꾸었음ㅋㅋ
    그날 지하철 타고 가면서 후기 내용이 쏙쏙 들어오길래 평소에 하지 않던 휴대폰으로 댓글을 달았던게 화근이지요.
    그라도 저 덕분에 한바탕 웃으면서 수업할 수 있어서 좋았지요?ㅋ 쉽게 공유되는 비번들 어서어서 바꾸시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