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8월 19일 3학기 3주차 수업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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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8-20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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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티모아> 8193학기 3주차 수업후기

계속되는 코로나 4단계 지속으로 인해 이번 주도 줌으로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줌으로 해서 집중력이 좀 떨어진다는 의견과, 간식을 먹을 수 없어서 아쉽다는 이야기를 서두로 생각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16장 속박과 해탈에 대한 고찰

1~2게송

대론자들은 윤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들의 자성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나가르주나는 윤회가 존재한다면 반드시 행들의 존재하든 중생의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두 가지 다 오류다.

왜냐하면 행들이 윤회한다면 상주적인(영원히 존재하는)행들은 작용하지 않기에 윤회하지 않는다. 또한 무상한 행들도 윤회하지 않는다.  만일 무상한 행들이 존재한다면, 무상한 것들은 찰나적 존재들이기 때문에 발생 직후에 소멸할 것이다. 소멸한 것들은 현재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상한 것들의 윤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생도 이와 같은 논리로 상주하는 인간이든 무상한 인간이든 윤회하지 않는다.

대론자들은 행과 중생의 윤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자아는(오온과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푸드갈라=자아=윤회의 주체) 확실이 윤회한다고 주장한다.

나가르주나는 설령 자아(푸드갈라)가 윤회한다고 할지라도 다섯 가지 탐구로 적용해 보면 온, 처, 계에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섯 가지 방식은(동일성, 상이성, 소유, 상호내재(相互內在),)으로 자아를 탐구한다.

자아를 온蘊과 비교해보면, 자아는 오온과 동일하다. 자아는 오온과 다르지도 않다. 자아는 오온을 소유한다. 자아 속에 오온이 존재한다. 오온 속에 자아가 존재한다.  이렇게 보면, 자아는 온, 처, 계의 자성이 아니다. 현재 존재하지 않는 자아가 어떻게 윤회하겠는가? 이처럼 자아의 윤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3~4게송

“取에서 취로 윤회하는 자는 무유자(無有者)일 것이다.  취가 없는 무유자는 누가이며, 어떻게 윤회하겠는가”

여기서 무유자를 설명할 때, 취를 오취온의 몸으로 적용하여 해석해보자.

만약에 인간의 몸에서 천신의 몸으로 옮겨 가는 자는 인간의 몸을 버리고, 천신의 몸으로 옮겨 가든지, 아니면 인간의 몸을 버리고 않고, 옮겨 갈 것이다.

만일 버리고 간다면, 앞의 취를 버리고, 뒤의 취를 아직 취하지 전까지는 중간에 有가 없는 자가 존재할 것이다.

여기서 무유자는 有가 없는 자를 뜻한다. 그러므로 취가 없는 무유자는 오취온이 없기에 취라는 원인은 무원인이 된다.

무원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의 몸이 존재하지 않을 때 천신의 몸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윤회하는 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대론자는 또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앞에 유와 뒤의 유의 중간에 中有의 속성을 지닌 오온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취에서 취로 윤회하는 자에게

무유라 함은 오류라고 주장한다.

나가르주나는 중유의 속성을 지닌 오온에 있어서도 앞의 취를 버리는 경우와, 버리지 않는 경우에 있어서 모두 타당하지 않다.

그러나 대론자들은 앞에 취를 버리고 다른 취를 동시에 버려서 취하기 때문에 오류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나가르주나는 자아의 일부분에 의하여 앞의 취를 버리고 다른 일부분에 의하여 중유의 취로 옮겨 가는가, 아니면 자아 전체에 의하여 중유의 취로 옮겨가는가?

만약 전자에 의한 것이라면 두 개의 자아라는 오류가 따라붙고, 후자라면 자아는 무유라는 오류에 빠진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자아 전체에 의하여 하나의 집에서 다른 집으로 옮겨갈 때, 그가 두 개의 집을 동시에 버리고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자아 일부에 대해서 예를 들어 보면, 한쪽 발에 의하여 하나의 집을 버리고 다른 쪽 발에 의하여 다른 집을 취하므로 동시에 버리고 취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대론자들이 주장하는 앞의 유와 뒤에 유의 중간에 있는 중유의 속성을 지닌 오온의 존재도 윤회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대론자들은 다시 윤회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윤회와 대립하는 짝인 열반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윤회는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나가르주나는 만약 대립하는 짝인 열반이 존재한다면, 윤회는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열반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있다면, 상주하는 행들의 것으로나 무상한 행들의 것으로 분별될 것이다. 만약 상주하는 행들의 영원히 불변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열반에 이르겠는가? 무상하고 현재 존재하지 않는 행들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열반에 이룰 수 있겠는가? 중생의 열반한다는 것도 상주의 행과, 무상의 행을 적용하여 타당하지 않다.

존자께서는 “수보리 존자여, 열반도 환화와 같고, 꿈과 같다. 佛法들도 환화와 같고, 꿈과 같다. 선남자여 만일 열반보다 더욱 수승한 다른 가르침이 있다고 해도, 그것조차도 환화와 같고 꿈과 같다.” 이 의미는 중생들은 끊임없이 표상을 부여하여 유신견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자성으로 붙잡으려는 중생심리는 말하는 것 같다. 윤회도 열반도 불법까지도 다 꿈이고 환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방편으로 쓰라는 의미가 아닐까?

5~6게송

대론자들은 윤회와 열반이 부정될지라도 속박과 해탈이 실재하기 때문에 존재들의 자성은 확실히 존재한다.

나가르주나는 ‘생명의 속성을 지닌 행들은’ 찰나멸적인 것이므로, 즉 발생 직후에 소멸하며, 이미 소멸하여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번뇌에 속박되겠는가.

그러므로 탐욕을 비롯한 속박을 끊었다는 상相을 지닌 해탈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상한 행들이 현재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제행들이 속박과 해탈이 존재하지 않듯이 중생도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하지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속박도 해탈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론자들은 다시 비록 행들 또는 중생에게 있어서 속박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탐욕 등으로 이루어진 취(오취온)라고 불리는  속박은 존재한다.

나라르주나 ‘취의 소유자’는 현재 존재하는 취의 소유자를 뜻한다. 즉 취의 소유자는 ‘이미 속박된 자’이다. 그런데 다시 속박된다는 것은 오류다.

속박에서 떠난 ‘취의 비소유자도’ 속박에서 떠났기 때문에 속박되지 않는다. 이미 속박된 소유자는 속박에서 떠난 비소유자이든 상호 모순되기 때문에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9~10게송

대론자들은 윤회와 열반을 부정하고 속박과 해탈을 부정한다면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탐욕을 어떻게 하겠는가?

중생들은 유신견이라는 거대한 바위에 둘러싸이고, 쉴새 없이 흐르는 갈애의 강물이 주위를 덮쳐 흐르는 윤회의 깊은 숲속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그러면서 중생들은 ‘취가 없는 자가’ 되어 열반에 도달하길 바란다.

나가르주나는 ‘취가 없는 자가’ 되어 열반에 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집착에 빠진자 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열반에 도달하려는 것도 유신견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이다.

승의제 관점에서도 열반에 존재를 갖다 붙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열반이라 것을 존재 위에 올려놓는다고 하더라도 자성에 의하여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식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윤회로부터 중생을 끌어내는 것, 즉 윤회의 소멸도 불가능하다.

어떤 중생을 윤회로부터 끌어내어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 그리고 열반에 존재를 갖다 붙이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윤회와 열반은 둘 다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수사리는 (항마경)에서 "해탈하는 사람들은 어떤 것으로부터 해탈하는 것이 아니다. 해탈하는 사람들은 비실재의 想(무자성, 무상)을 완전히 알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안 다음에 해탈한다” 라고 말한다. 성전에서의 해탈의 의미는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전도된 생각을 절단할 때, 해탈과 열반에 도달한다고 한다.

윤회와 열반에 존재(자성)를 갖다 붙이면 아무리 노력해도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상은 윤회이든 열반이든 번뇌의 속박된 상태가 있는 것처럼 자성을 부여하는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왜 끊임없이 취하려고 할까요? 뭔가를 잡지 않으면 존재하는 것 같지 않은 이 사유는 대론자들과 닮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론 27품 중 절반을 넘어가면서 대론자들의 사유에서 중론의 사유로 약간의 균열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세미나를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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